11화. 네덜란드에서의 한 달

여긴 다를 줄 알았지 뭐야

by 박서운과박식빵

자유가 가득한 나라 네덜란드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영국 집에 있던 짐과 가구들은 국제이사업체에 맡겨두었다.

회사에서 임시로 잡아 준 숙소에서 한 달 정도를 머무르며 우리 세 가족이 살게 될 집을 구할 예정이다.

영국만큼 취업 비자 문제가 까다롭지 않아 큰 어려움도 없었고, 이제 이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할 일만 남았다.

영국이 EU를 떠나니 마니 하는 마당에 여기서 만약 눌러 앉아 네덜란드 영주권을 갖게 되면 EU시민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유럽에서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나만 믿고 새로운 곳으로 함께 와준 수연에게 고마워서라도 어서 회사에 적응해야겠다.


평일엔 나는 회사에 가고 수연은 아직 어린 아기를 돌보며 부동산 사이트를 뒤져 뷰잉 약속을 잡았다. 런던보다는 집세가 조금 저렴한 것 같은데, 이제 아이가 있으니 최소 투베드룸을 빌리려다 보니 생각만큼 여유롭진 않았다. 영국에선 런던 시내에서 못 살아봤으니 여기선 암스테르담 안에서 한번 살아보자! 하며 호기롭게 집을 보러 다니다가 집값으로 고정비용을 너무 많이 쓰면 영국에서처럼 너무 빡빡할 것 같아 사무실이 있는 암스테르담 외곽지역까지 범위를 넓혔다. 어떻게 둘이서 부비며 살던 때완 다르게 아이도 하루가 다르게 클 것이고, 유치원, 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 수도 있으니 치안이 안 좋은 슬럼가는 피해야 했다.


회사에선 새로운 사람들과 업무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국에선 회사 코 앞에 살며 8시 50분에 집에서 나가 5시 40분이면 퇴근하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는데, 여기 와선 8시 전에 집을 나서 6시 30분~7시는 되어야 돌아왔다. 슬로바키아, 영국에서 이어 여기서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결국 한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4~5년의 경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현지채용인'신분이었다. 한국 본사에서 파견이나 주재원으해외에 나간 것이 아니라, 현지 나라에 살면서 채용된 신분이란 뜻인데, 이것은 결국 4년마다 물갈이될 주재원 밑이라는 뜻이었다.


나를 네덜란드로 부른 황부장은 일적으로 엮이지 않을 때에야 괜찮은 사람이었다. 밑에서 일해보니 그는 두어달에 한 번씩 미팅 때나, 회식 자리에서나 보던 때와는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자기 밑의 사람으로 부리게 되니 그는 나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다. 어느 회사에 가든, 어느 조직에 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또라이의 총량은 보존된다는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인지, 내가 기똥차게 재수가 없어서 저런 상사를 모시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데서나 욕지거리를 내뱉는, 상놈 중의 상놈이었다.


"야, 이 XX 새끼야!!"


"너 이 새끼, 이렇게밖에 못 해??"


차라리 내가 일을 못해서 그런 거였다면 어떻게든 꾹 참으며 버텼겠지만, 황부장의 인격모독 수준의 욕설은 점점 도를 넘어 심해졌다. 쌍욕에 손찌검까지 당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 즈음 알게 되었다. 내 전임자가 이런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그 자리에 내가 오게 되었음을. 황부장이 이제 막 네덜란드로 왔으니 최소 4년은 이 곳에 있을 텐데...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짓을 4년을 더 버텨야 하나. 영국에서도 박부장이 싸놓고 가버린 똥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4년을 어찌 버텨 새로운 주재원이 온다고 해도 내가 이 회사를 떠나지 않는 이상, 결국은 또 다른 주재원 밑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아닐까. 그때엔 정말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새로운 커리어를 한국에서 시작한다는 게 더 어려운 거 아닐까. 영국에서 본 그 사람들처럼 나도 결국 포기하고 안주하며, 유럽에 산다는 그 장점 하나만으로 버티며 살게 되는 걸까.


아직 6개월도 채 안 된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왔는데, 수연을 설득해서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영국보다 훨씬 나을 거라며 왔는데...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도저히 못 해먹겠다는 말이 혀 끝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하루를 더 버티고, 하루를 한번 더 버티고, 또 하루를... 버티며 네덜란드에 온 지 한 달 즈음이 된 어느 날, 나는 수연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내고 말았다.


"우리, 한국 가자. "


큰 결심을 하고 영국을 떠나온 수연은 별다른 힘든 기색도 보이지 않던 내가 갑자기 모든 걸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크게 놀란 듯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무슨 일 있어? 회사 일이 많이 힘들어?"


"정말 미안한데... 여기서 집 구하고, 계속 이렇게 살게 되면 더 되돌리기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와보니까 여기는 그냥 영국에서의 반복이야. 왜 그걸 몰랐을까. 왜 여긴 다를 거라 생각했을까. 나 그냥 한국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 내가 최대한 빨리 취직해볼게. 아무것도 없이 돌아간다는 게 진짜 힘들겠지만. 나 한번만 더 믿어줘 수연아. 우리, 한국 가자."


암스테르담의 아름다운 여름 날씨를 채 느껴보기도 전이었다. 이곳에 이렇게 잠시 머물다가 다시 떠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만.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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