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는 말을 우리는 어릴 적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어릴 적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TV 속에서 본 파리의 거리의 화가를 보았을 때 나도 저런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하지만 커가며 나는 나에게 그럴만한 뛰어난 미술적 재능도 경제적인 걱정 없이 순수 미술을 할 만큼의 넉넉한 배경도 파리의 화가들처럼 경제적인 안락함을 포기할 만큼의 열정도 용기도 없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거나 무언가가 꼭 하고 싶다거나 하는 것들이 없었던 것 같다.
많은 부모님이 청소년기의 자식들을 달랠 때 하는 말처럼, 대학에 가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정작 대학교에 갈 즈음에는 그런 것보다는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싶지 않았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우선이 되었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복수전공을 신청해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다 일 년을 보냈고 2학년이 되던 스물한 살의 봄 날 입학 동기인 친구가 자기 동아리는 2학년도 신입으로 받아준다기에 따라갔던 동아리 방에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만났다.
처음 그 동아리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친구는 일단 밥을 먹어야 다음에 또 온다며 배달 밥을 시켜주었고 학술동아리라는 모습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를 만큼 자유분방하고 개성 강한 친구들 하나하나 모여 앉아 자기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일생이 집순이인 나에게는 나와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꽤나 재밌는 일이기도 했고 나이에서 오는 서열을 없앤다며 서로가 정한 닉네임을 부르며 개인의 취향, 개성을 존중해주던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게 매력적인 일이었다.
또 지금은 술 문화가 많이 변했지만 10년 전 동아리 회식으로 학교 근처 술집에 가면 알코올파와 논알코올파가 나눠 앉아 각자의 모습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술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꽤나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또 축제 때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축제 분위기 망친다는 우려를 뒤로하고 나눔의 집에서 빌린 주크박스와 기념품을 가져와 일본군 성노예의 참상을 다시금 기억하고 알리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고 그때는 흔치 않았던 유기농 생리대의 효과를 알리고자 민우회에서 면 생리대 도안을 다운로드하여 손바느질로 만든 대안 생리대를 판매하기도 했다. 바느질과는 거리가 먼 내가 집에서 그걸 만들겠다고 손바느질을 하고 있었더니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기가 막혔는지 참 너 다운 거하고 다닌다며 한마디를 하셨다. 엄마의 의도는 비싼 사립대 보내 놨더니 사회운동가라도 할 모양인지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일만 하고 다니는 나에게 하는 핀잔이었겠지만 아직도 그 말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나 다운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한 첫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내가 꽤나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나를 평범해 보이지만 특이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우리 엄마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나에게 표출했을 테지만 엄마가 지나가듯 던진 그 한마디를 통해 나는 내가 개성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동아리 친구들과 달리 겉모습이 조금 더 유순해 보일 뿐 다른 면에서 꽤나 평범하지 않은 한 사람으로 보이겠구나 하는 자아성찰을 하게 됐다.
내 모습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잘못되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같은 민족이라도 우리의 생김새는 각기 다르듯이 우리의 인생의 모습이나, 성격, 취향이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어가며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는 자라서 어떤 직업의 무엇이 되고 싶은 가를 묻거나 고민하기보다는 어떤 것을 할 때, 우리는 자신다워지는 가를 고민하고 알아가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학 시절을 마무리할 무렵 나는 다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초등학교 이후로 하고 싶었던 것이 없었던 나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적어 내렸고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 던 직군에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생각에 여자가 하기 좋을 것 같은 분야에 지원하기보다는 특정 직군을 하고 싶다며 외국계부터 국내 회사 여기저기 면접 보고 다니는 내 모습을 보며 부모님은 다시 한번 내가 꽤나 유별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 싫었고 영업을 해야 하는 일도 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불합격 문자를 받거나 면접 후 아무 소식이 없는 채로 졸업을 맞이할 때쯤엔 나의 소신도 조금은 흔들렸지만 나는 내 생각대로 수없는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도 보러 다녔고 3월의 눈 오던 어느 날 엄마가 내가 합격되리라 굳게 믿었던 제약회사 회계직 최종면접에서 첫 번째 면접 때처럼 아버지 직업이 뭐죠?라는 질문 하나를 받고 허무한 답변을 하고나서 속으론 이런 질문할 거면 이력서만 보고 뽑던가 이 추운날에 왜 사람을 세 번이나 부르냐며 불평하며 돌아오던 길에 지금의 회사 합격 소식을 들었다. 몇 년쯤 다니다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직장생활은 10년이 훌쩍 지난 오늘까지도 하고 있으며 지금도 퇴사의 꿈을 꾸며 또 한 편으로는 성공의 꿈을 꾸며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회사를 다니며 사회생활은 늘었지만 나의 개성도 그만큼 꺾이는 순간을 종종 마주하고는 한다. 외국계 회사가 조금 더 수평적이고 유연하다고 해도 조직이라는 체계적인 구조에서 일하는 순간 우리는 어느 정도의 절충선을 맞이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 절충이라는 것이 꼭 나 다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직장생활을 하며 나의 꿈이자 목표는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너는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 저는제 자신이 되고 싶어요.”라는 답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만한 성공이 있을까?
나 다워지는 것은 어떤 형태에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나의 모습,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며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생산적이라고 생각되는 직업활동 같은 생산적인 활동 이외도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 같다. 가령 소비를 할 때도 우리는 우리의 각자의 개성을 분출한다. 누군가는 물건을 사는 것을 좋아해 자신이 값어치를 느끼는 물건들을 소비하는 데 의미를 둘 것이고 나는 여행을 좋아하기에 때로는 좋아하는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시간을 맞춰 가까운 곳으로 또 먼 곳으로 여행을 다니는데 많은 돈과 시간을 소비했다. 나에게 있어 그런 시간을 통해 남긴 사진과 추억은 꺼내어볼 때마다 나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친구와 퇴근 후 만나 맛집을 찾아가고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서늘한 밤공기를 느끼는 일상의 순간을 맞이할 때나는잘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고는 한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좋아한 다는 것은 내가 나답게 잘 살고 있다는 반증아닐까?
물론 여전히 나는 나 다워진 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친구들의 절반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나이가 된 서른 중반에 나는 누구보다 오랜 연애를 했음에도 아직도 친구들이 끝낸 고민하고 있으며 이런 나의 모습은 흡사 이력서를 쓰며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나 하며 흔들렸을 때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면 어떠랴.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완벽한 선택이란 없기에 무엇을 선택하든 기쁨도 후회도 부차적으로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최선인 선택들로 인생을 채워가고 그 선택이 틀렸을 때는 겸허히 인정하고 그것을 바꿀 용기만 잃지 않는다면 나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을까? 나는 오늘의 흔들리는 나에게 그리고 나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때때로 흔들리는 순간에도 나 다워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용기를 가지라고. 왜냐고? 넌 너 다울 때 젤 예쁘고 멋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