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탄에 부모를 잃은 영애가 청와대를 떠나는 장면은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그 순간을 찍은 사진이 슬퍼 보인 건 어쩌면 그의 무미건조한 표정 때문일지 모른다. 겉으로는 저렇게 태연하지만 속은 얼마나 무너져 내릴까. 국민은 마치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격하게 감정 이입했다.
18년 칩거 후 박근혜는 정치에 입문한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그를 튼튼하게 지지해준 후원군은 70년대를 추억하는 세대였다. "불쌍한 우리 근혜, 한 번 도와줘야지"라는 말 어딘가에는 박근혜에 대한 괜한 '미안함'마저 깔려 있는 듯했다.
그리고 박근혜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부채의식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 할 수 있는지. 박근혜는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어떤 비장의 무기처럼, 자신을 향한 동정 여론을 자극할 다양한 소재를 발굴했다. 우리는 그 얄팍함을 알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것은 언제나 효과를 발휘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붕대 감은 손을 보란 듯이 흔들어댔다. 결과는 대역전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 손이 부었다고 했고 투표 당일에는 맨손으로 나선 모습이 목격됐다. '쇼 아니었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총선은 이미 끝났다. 2004년 총선과 2007년 대선 경선에서도 그는 손에 붕대를 감았다. 불쌍한 우리 근혜를 마냥 돕고만 싶어 지게 만드는 방법으로 '공적인 일을 하다 병이 났다'는 것 이상 좋은 게 없었다. 그리고 2013년 그는 대통령에 올랐다.
아시아경제. 2015년 4월 25일
9박 12일 중남미 4개국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고열과 복통에 링거 주사를 맞아가며 일정을 강행해왔다고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25일 오전(현지시간) 전했다.
민 대변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지난 18일 진행된 콜롬비아 동포 간담회에서 기침을 몇 번 하다 "수행원들이 고산병에 다들 고생하는데 나는 고산병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목으로 온 모양"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고산병 때문에 힘들어하시는데 다들 괜찮으세요"라고 수행원들의 건강을 챙기기도 했다.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는 해발 2640m에 자리 잡고 있어 수행원들이나 동행 기자들 중 상당수가 두통과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한 바 있다.
민 대변인은 또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이는데, 주치의가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아래로 자꾸 불려 가더라. 그래서 알아봤더니 대통령이 편도선이 붓고 복통에 열이 많이 나서 매일매일 주사와 링거를 맞고 강행군을 하신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국내 사정이 이쪽과는 달라서 가면 또 고생을 하셔야 할 것 같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완구 총리 후임자 인선 작업 등 산적한 국내 현안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들린다.
2015년 4월에는 '성완종 리스트'가 터지면서 이완구 당시 총리가 사임하는 등 정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위 기사는 그 때 청와대 대변인의 공식 브리핑으로 전달된 내용을 전한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박근혜는 지지율이 하락하거나 비판 여론이 비등할 때 그 돌파구로 '동정심 자극' 전략을 활용했다. 참석하기도 안 하기도 애매한 불편한 자리를 앞두고도 '건강'은 단골 핑계 거리였다. '국가와 결혼한' 그의 건강 변명을 사람들은 언제나 이해해줬다. 실제 감기에 걸린 것인지, 과로가 진짜 원인인지 중요하지 않다. 나빠진 건강상태를 박 전 대통령 자신이 그리고 참모들이 국면 전환용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후 며칠간 청와대에 머물다 12일 청와대를 떠났다.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동정심 자극 전략은 어쩌면 최순실 작품이 아니었을까. 두 번이나 청와대에서 끌려나온 기구한 운명, 그러나 1979년과 달리 2017년 상황에서 우리 뇌리에 박힌 어떤 대표적인 혹은 상징적인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 건 왜일까. 최순실 도움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된 상황과는 관련 없을까.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 비선실세 논란이 구체화되자 기자회견을 열어 "최순실과 왕래해왔으며 주로 홍보 쪽에서 도움을 받아왔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