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대통령의 '국가개조론'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많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원인에 대한 분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한 탓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변화는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상식을 외면한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적폐가 세월호를 침몰시키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잘못된 상황 인식과 통치 철학이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는 채 3년이 걸리지 않았다.>
아시아경제 2014년 5월 29일 자.
"그 최대 위기는 최대 위기가 아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집권 2년 차 초반의 선박사고가 박근혜 정부를 끝없는 해저터널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있다. 승부수도 몇 차례 던졌지만 상황은 악화될 뿐이다. 국정의 핵심 포인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정부는 개점휴업 수준의 무기력함에 빠졌다. '구원투수' 안대희는 자신을 등판시킨 감독을 향해 폭투(暴投)를 던지고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박근혜팀은 악몽이 될 지방선거를 6일 앞에 두고 별다른 돌파구 없이 시간이 다가오는 것만 지켜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국가개조를 선언하고 이를 진두지휘 할 역할에 안대희 전 대법관을 선택했다. 세월호 사고로 급격히 약화된 국정동력을 반전시키려는 비장의 카드였다. 그러나 그는 전관예우 논란에 지명 6일 만인 28일 국무총리 후보직을 내던졌다. 박 대통령과 상의하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에 박 대통령은 "안타깝다"는 말을 남겼다.
'전관예우'라는 법조인의 도덕성 검증에 실패한 건 김기춘 비서실장과 홍경식 민정수석 등 같은 법조계 출신 인사담당자의 안일한 생각 탓이란 분석이 많다. 그 정도 관행은 불법도 아니며 개인재산 기부 등으로 해결될 정도의 사안으로 보고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후보자 지명을 강행토록 했을 수 있다. 국민정서를 읽지 못해 벌어진 최악의 판단이다.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를 8일 만에 뒤집은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을 포함해 현재의 난맥상에 대한 책임은 청와대 핵심 참모진에게 쏠리는 분위기다. 그러나 취임 후 가장 중요했던 인사를 참모들에게만 맡겼을 박 대통령이 아니란 점에서 사안은 간단치 않다.
이번 인사실패는 내각 개편이 그만큼 순연되는 결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장 김기춘 비서실장의 사퇴 요구가 커지는 분위기다. 지방선거 후 물러난다는 관측도 나왔다. 수석비서관 9명 전원이 교체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청와대 실무진은 사실상 일손을 놓고 앞날을 걱정하며 허둥대고 있다.
이미 사의를 표해 '시한부 총리직'을 수행하는 정홍원 총리에게 바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박 대통령이 개각을 공식화 한가운데 각 부처 장관들이 정책 동력을 발휘할 여지도 없다. 더욱 심각한 부분은 안보라인의 공백이다.
외교ㆍ안보ㆍ국방의 컨트롤타워인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국가정보원장은 8일째 공석이다. 다른 자리는 제쳐두더라도 안보라인 2명은 이번 주 내 확정할 것이란 전망이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새 국무총리 후보자 인선이 더 급해진 탓이다. 청와대는 국무총리와 안보라인 후보자들을 함께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안대희 카드의 실패로 분위기 반전 기회를 놓친 탓에 6일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결과는 박 대통령에게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줄 가능성이 더 커졌다. 이렇게 되면 박근혜 정부의 국가개조 프로젝트는 추진동력을 상실한 채 상당기간 표류할 수 있다.
당장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지방선거 전 '괜찮은' 총리 후보자를 선보이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여러 인사가 거론되고 있으나 박 대통령이 가장 쓰기 껄끄러웠던 '안대희 카드'마저 실패한 마당에 새 후보자에 대한 눈높이는 이미 너무 높아졌다. 앞서 박 대통령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안보실장과 국정원장을 포기했다. 협조가 간절한 국회의 대표는 친박계에서 친이계로 최근 바뀌었다. 마지막 보루인 김기춘 비서실장도 잃기 직전이다. 박 대통령은 에어포켓이 얼마 없는 청와대호(號 ) 맨 아래층에 고립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청와대 참모들은 사석에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번에도 VIP(대통령)가 상황을 바꿀 거야. 박근혜는 '얼웨이즈 윈'(언제나 이긴다)이거든." 최악의 조건에서 당을 일으켜 세우고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또 그렇게 대통령 자리까지 거머쥔 박근혜. 그는 수많은 정치적 싸움에서 전승을 거둬왔고 세월호 정국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러나 세월호는 얄팍한 '프레임 씌우기'로 해결될 수준의 사안이 아니었다. '만약'이라 가정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라도, 달리 생각해볼 여지도 있기는 하다. 최순실이 발각되지 않았더라면, 남은 임기 동안 남북문제나 경제와 관련해 어떤 가시적 성과가 도출됐다면, 세월호 참사에 임했던 박 전 대통령의 평가도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져있지 않을까. 만약 그랬다면 세월호로부터 우리가 얻었어야 할 교훈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과연 우리가 그 교훈대로 살고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이 위험한 사회의 한 모퉁이를, 우리는 아직도 생각 없이 걷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아시아경제. 2015년 4월 15일 자.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에 두 가지가 없음을 증명했다. 하나는 위기대응 매뉴얼이며 또 하나는 위기대응 리더십이다. 전자의 부재는 눈앞에서 304명이 수장되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지켜본 원시적 참사의 원인이 됐고, 후자의 부재는 5000만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나라를 두 패로 분열시켰다.
2014년 4월 16일의 '1차 참사' 후,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혼란과 분열'이라는 '2차 참사'를 겪어야 했다. 그것은 리더십의 참사였다. 사고의 원인 규명과 국가시스템 개조, 책임자 처벌과 공직사회 개편 등 과정에서 온 국민이 뜻을 모아 힘 있게 추진하고 이루어낸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정부와 국회의 모든 결정은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다. 사고 수습ㆍ대책 마련을 위한 방법ㆍ시기ㆍ인물ㆍ언어 등을 두고 국민과 정치권은 두 쪽으로 나뉘어 현재도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해경은 세월호 침몰을 막아내지 못했고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의 추락을 조장했다.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왜 위기상황에서 국론을 모으기는커녕 허둥대고 분열을 조장하는가. 최진 대통령 리더십 연구소장은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최 소장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과 정홍원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들이 세월호 참사를 다룬 기본 바탕은 '정치공학적 대응법'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정치공학의 시대에서 정치심리의 시대로 넘어왔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표적 리더십 실패 사례는 박 대통령의 실종자ㆍ희생자 가족들의 면담 요청 거절이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되며 추모와 국가운영은 별개로 가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실천하려 했다. 이것은 국정운영의 편의성ㆍ효율성을 먼저 고려하는 정치공학적 리더십의 발로다.
박 대통령이 견지한 이 같은 리더십은 차분함ㆍ안정감ㆍ합리성 등 단어로 표현되기도 하며, 평상시 국정을 운영하는 데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정치공학적이 아닌 정치심리적 리더십, 특히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적 상황에서는 '감성 리더십'을 적절히 발휘해야 했지만 박 대통령은 자신의 기본 성향을 넘어서지 못했다. 평상시의 차분함은 위기상황에서 '답답함'으로, 안정감은 '소극성'으로, 합리성은 '냉정함'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다.
보안을 중시하는 폐쇄적 의사결정 구조를 선호하는 박 대통령은 핵심 참모진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동시에 차단했다. 이것은 위기상황에서 박 대통령 리더십의 단점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원활함을 확보함과 동시에 "세월호특별법은 국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의 면담요청을 거절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 모두 얻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지도자들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뒤 자신들의 리더십을 어떻게 개선하고 보완하고 있을까. 그리고 성과는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부정적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각종 안전 사건ㆍ사고가 다수 발생했고 인사파동, 정윤회 비선 실세 논란 등 나라가 발칵 뒤집힌 사건은 지난 1년간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종의 '국가적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건들에서도 리더십의 부재는 여전했다.
'허둥대고, 질타받고, 미봉책을 (뒤늦게) 내놓는' 3단계 헛발질은 '성완종 리스트'라는 대형 사건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위기상황에서 어떤 매뉴얼을 통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 "국론을 모으고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치지도자들의 뼈아픈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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