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화 May 17. 2021

40살이 되어서 다시 본 둘리

못된 둘리와 불쌍한 고길동


'요리보고 저리봐도 음 음 알수없는 둘리 둘리~~~'

귀에 익은 노래지요. 어렸을 적 많이 봤던 만화영화 둘리의 노래입니다.


 유치원 시절 텔레비전에서 봤던 만화영화인데, 지금의 20대나 30대도 둘리를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귀여운 둘리와 친구들이 나오고, 못된 고길동 아저씨가 나왔습니다. 가끔 길동이 아저씨의 아들과 딸인 철수와 영희가 나왔는데, 착한 언니 오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희동이도 나왔지요.


 오늘 낮에 저희 집 아이들이 텔레비전에서 '아기공룡 둘리'를 보았습니다.  

 요즘은 텔레비전에서 예전에 방영했던 만화영화들을 찾아서 볼 수 있더라고요. 갑자기 왜 둘리가 보고 싶어 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아기공룡 둘리'를 찾아서 보더라고요. 세 아이들이 조르륵 앉아서요. 그 옆에 저도 살며시 앉아 아이들과 같이 둘리를 봤습니다. 옛날 생각하면서요.


 노래도 여전했고, 또치와 도우너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상하더라고요.


 분명히 6살의 제 기억 속에는 착한 둘리와 나쁜 고길동 아저씨였는데 말이지요.

 40살이 되어 다시 보니 못된 둘리와 불쌍한 고길동 아저씨로 변해있었습니다.

 

 둘리는 고길동 아저씨네 집에 얹혀사는 객식구입니다. 그런데 둘리는 웃어른인 고길동 아저씨한테 예의 없게 행동하고 반말도 합니다. 온 집안을 자기 집처럼 휘젓고 다닙니다. 고길동 아저씨의 머리도 이상하게 잘라놓아 회사생활도 힘들게 하고요. 더운 여름에 선풍기도 뺏어서 혼자 독점하려 합니다. 객식구이면서 또 다른 객식구도 데려 옵니다. 또치에다가 도우너까지요. 얘네들도 예의 없긴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둘리보다 더하면 더했지요.


 우리 집에 둘리 같은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봅니다.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사람 같지 않은 존재. 그래도 갈 곳이 없다니 불쌍해서 집에서 재워주고 먹여줬습니다. 그런데 예의가 없습니다. 고마움도 모르고요. 이것저것 요구만 합니다. 거기다 제 생활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사회생활도 힘들게 만듭니다. 편하게 쉬고 싶은 집이 곤욕스러운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얼마 뒤에 똑같은 아이들을 몇 명 더 데리고 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네요. 역시나 어디서 온지도 모르고 사람이 아닌 존재입니다. 거기다 둘리보다 더 무개념인 친구들이네요.  저는 아마 고길동 아저씨보다 더 못된 집주인이 되었을 거예요. 솔직히 고길동 아저씨는 특별히 나쁘게 한 건 없어요. 둘리와 둘리 친구들한테 당하고서는 소리나 지르고 혼만 내는 정도였지요. 불쌍한 아저씨입니다.


 희동이도 있었네요. 희동이가 누군지 아세요? 저는 이제까지 고길동 아저씨네 막내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여동생네 아들이었습니다. 조카인 거죠. 여동생 부부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젖먹이 아기를 오빠네 집에 맡기고 간 거였습니다. 고길동 아저씨는 제일 키우기 힘들 때인 한 두 살 먹은 어린 조카도 맡아 키워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고길동 아저씨의 아내인 박정자 씨도 생각해 봅니다. 둘리, 또치, 도우너, 객식구 3명에다가 시누이 아들인 희동이도 키우고 있습니다. 성격이 모난 남편에다가 아들 딸도 있습니다. 사실 뒤치다꺼리는 박정자 여사가 다 하는 거죠. 고길동 아저씨가 밥을 합니까, 빨래를 합니까, 청소를 합니까. 매일 소리만 질렀지요. 화만 낼 수밖에 없었던 고길동 아저씨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박정자 여사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둘리 만화영화에서 가장 마음 넓은 천사는 박정자 여사일 겁니다.  6살 제 기억 속에서 고길동 아저씨의 아내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가끔 혼나는 둘리와 친구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는 게 다였죠. 제 처지라고 생각해봐도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영희와 철수도 나이 들어 다시 보니 반전이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고길동 집에서 제일 착한 언니, 오빠로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다시 살펴보니 방관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집 일인데 크게 관여를 안 합니다. 둘리가 잘못을 하든, 아빠가 화를 내든 그냥 상관을 안 해요. 둘리가 집을 나가도 '나갔네.'하고 끝. 아빠가 울화통을 내도 '화나셨네.'하고 끝.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마치 다른 집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바라보듯 행동합니다. 이런 철수와 영희를 왜 착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어떻게 보면 둘리 속에서 제일 나쁜 인물일 거예요. 착한 척하는 방관자요.


 6살 때의 둘리와 40살에 본 둘리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6살 때의 저처럼 착한 둘리 나쁜 고길동으로 보고 있겠지요. 딱 잘라 착함과 나쁨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착함과 나쁨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회색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검은색과 흰색이 완전히 바뀌는 문제는 다르잖아요.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봅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전부 옳지 않을 수도 있고, 지금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나중에는 옳은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괴성을 지르며 퇴근하는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