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와 캘리그래피라니 너무 생뚱맞죠.
그런데 인문계의 거장, 걸어 다니는 도서관인 움베르토 에코가 캘리그래피를 틈새산업으로 추천을 했었습니다. 2009년 8월 7일에요. ^^
움베르토 에코의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이란 책 안에서 발견했어요. '아름다운 필체에 대한 단상'이라는 소제목의 글 마지막 문단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그런 학교는 이미 존재한다. 인터넷에서 <캘리그래피 학교>만 처보면 알 수 있다. 어쩌면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사업 아이템이 될지 모른다. p.212'
저는 글씨를 멋있게 못 씁니다. 중고등학교 때 썼던 둥글둥글한 글씨체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연필로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해서 지금도 연필로 연습장에 자주 끄적거리는데, 그런다고 글씨체가 멋있거나 예쁘게 바뀌어지지는 않더라고요. 습관대로 끄적거리다 보니까요. 오히려 글씨를 못 쓴다고 생각했던 옆 짝꿍이 붓펜을 들고 정자체를 쓸 때가 제 글씨보다 더 멋있게 써지더라고요. 저는 정자체도 둥그런 글씨체가 섞여 나와 초등학교 저학년이 어른 글씨를 따라 쓴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글씨가 써지거든요.
요즘 어린 친구들은 손글씨 쓸 일이 저희 때보다 더 적어진 것 같아요. 저는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깍두기공책에다가 철수와 영희가 나오는 교과서의 글을 따라 쓰는 숙제를 했었습니다. 고학년이 되면 친구들과 손편지도 많이 써서 주고받았고요. 중고등학생 때에는 초록 칠판에 처음부터 끝까지 필기만 하시는 선생님들이 어찌나 많으셨는지, 공책 필기도 많이 했고요. 빽빽이 숙제라고 아시나요? 연습장을 빈 공간이 없게 빽빽하게 쓰는 숙제요. 빡빡이? 깜지? 정확한 용어는 생각이 안 나는데, 아무튼 요런 글씨 쓰기도 참 많이 했습니다. 원고지 용지에 글짓기하는 숙제도 종종 했었고요.
그런데 중학생, 초등학생인 저희 아이들을 보면 공책 쓰는 일이 거의 없어 보이더라고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달랐습니다. 글씨 쓰는 숙제가 없었어요. 입학하자마자 받아쓰기 시험 본다고 시험 준비만 집에서 했지. 저처럼 책을 보고 글씨를 따라 쓰는 숙제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고학년이 되면 손편지가 아닌 문자나 카톡으로 친구들과 소통을 합니다. 요즘같이 코로나 때문에 친구들을 못 만날 때에는 줌을 켜놓고 서로 이야기하며 노는 광경도 보게 됩니다. 저는 친구들을 못 만나는 방학이 되면 우표를 붙인 편지지들을 빨간 우체통에 넣고 친구의 답 편지를 기다리는 낙으로 방학을 보냈었거든요. 중학생이 된 아들을 봐도 저희 때와 다릅니다. 저는 저 중학교 때를 생각해서 아들에게 교과목 수만큼 공책을 준비해줬습니다. 그런데 지금 학기가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가는데, 필기한 공책이 없더라고요. 선생님께서는 주로 유인물을 나눠주십니다. 온라인 수업할 때는 집에서 프린터 하라고 파일을 보내주시고요. 수행평가로 과제를 제출할 때도 손글씨를 쓸 일은 없습니다. 컴퓨터로 한글이나 파워포인트로 작성해서 선생님께 파일을 보내는 식으로 숙제가 진행됩니다. 그나마 선생님 재량에 따라 독서록 숙제나 일기 숙제를 내시는 담임 선생님을 만나면 그해는 손글씨 쓸 일이 있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희 아이들도 글씨를 예쁘게 못씁니다. '글씨 좀 바르게 쓰자.'라는 말이 매일 제 입에서 나옵니다. 사실, 제 글씨도 썩 자랑스럽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아이 친구들 글씨를 보면 저희 아이들이 제일 못쓰는 글씨는 아니더라고요. 요즘은 숙제를 패들렛에 올리거나 사진을 찍어 공유를 해서 반 친구들의 글씨가 보이거든요. 일부러 보려고 보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글씨들을 보면 글씨체는 저희 집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더라고요.
움베르토 에코가 '아름다운 필체에 대한 단상'을 집필했던 시기가 2009년 8월 7일입니다. 그 당시에도 벌써 이런 문제들이 있었네요. '알다시피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컴퓨터로 글을 쓰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데만 익숙해서 손 글씨는 인쇄체로 쓰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한다. P.207'
2009년을 돌이켜봅니다. 그때는 제가 아이들이 없어서 그 당시 학생들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0대인 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때도 역시 글씨 쓸 일은 특별히 없었습니다. 모든 과제와 보고서를 컴퓨터로 작성했을 때입니다. 스마트폰도 막 보급되는 시기였고요. sns가 대중화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의 소통은 문자 메시지로 하고, 컴퓨터 메신저인 네이트온을 주로 사용했었지요.
캘리그래피를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을 위해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취미생활로 하시는 분들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술 발달로 없어지는 부분들이 즐거움의 목적으로 다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인류는 진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스포츠나 예술적인 즐거움의 형태로 되찾아 오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말을 타고 이동할 필요가 없는 시대임에도 사람들은 승마장으로 말을 타러 간다. 비행기가 있음에도 많은 사람이 3천 년 전 페니키아인들처럼 범선 항해를 즐기고, 터널과 철도가 있음에도 알프스 산맥의 고갯길로 트래킹을 떠난다. p.211'
실생활에 손글씨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하긴 꼭 필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글씨체가 안 예쁘면 컴퓨터로 써서 프린터하면 되고요. 솔직히 손글씨 쓸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도 못난 글씨보다는 바른 글씨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바른 글씨에서 멋진 글씨로 더 나아가기 위해 글씨 연습을 해보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요.
'부모들이 자녀들을 캘리그래피 학교에 보내고, 관련 대회에 나가도록 격려하는 건 환영할 일이다. 그건 단순히 예쁜 글씨를 쓰는 데만 좋은 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좋다. p.212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