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오던 비가 그쳤다. 습기 가득한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창문을 열면 습관적으로 하는 심호흡으로 날씨를 온몸으로 느꼈다.
‘걸어가기 딱 좋은 날씨네’
오늘은 큰 아들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아이라인을 그리고 립틴트도 바르고. 거울 속 나를 이리저리 쳐다봤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네’ ‘다행이다’ ‘편하게 다녀오자! ’ 기분 좋게’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도 걸었다.
화장으로 평소보다 밝아진 피부톤, 아이라인으로 또렷해진 눈, 핑크빛 입술, 나름 한껏 꾸몄더니 가슴이 쫘악 펴지며 발걸음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비록 운동화에 롱패딩을 입었지만 마음은 밝은 빛으로 채워졌다.
북적거리는 학교 앞, 빠른 발걸음, 설레는 마음, 뾰족구두에 코트로 한껏 꾸민 엄마들, 손에 들린 꽃다발. 화려한 색으로 조화롭게 모여있는 꽃들이 춤을 추며 학교로 들어갔다. ‘어서 와, 같이 가자.’ 반갑게 맞이해 주는 듯했다. 보고 있는 나도 덩달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서 오세요. 졸업을 축하합니다”
선생님들의 반가운 인사에 ‘우와, 선생님들 정말 친절하시다~!’ 놀랍고 감사했다. 서둘러 졸업식장으로 올라갔다. 강당에 들어가기 전 파란 부직포 커버를 신은 뒤 들어가서 둘러본 학교는 그대로였다. 안내장을 받고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코로나로 3년간 닫혔던 학교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모를 것이다. 그런데 고생했다고 격하게 반겨주는 것 같았다. 강당입구 졸업생을 위해 준비된 텅 빈 의자들을 지나 학부모를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갔다. 이미 도착한 학부모들이 많이 보였다. 빠르게 굴러가는 눈, 재빠르게 움직이는 몸, ‘찾았다.’ 내가 앉을자리.
암진단 후 사람이 많은 곳은 피했지만 오늘은 예외다. 매의 눈으로 찾은 자리에 앉았다. ‘휴~! 살 것 같다.‘ 긴장이 풀리고 맘이 놓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큰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 졸업식인데 아무렇지 않네 ‘ ’ 그래, 나도 많이 덤덤해졌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꽃다발과 가방을 바닥에 두며 자리를 고쳐 앉는데 묵직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게 뭐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어깨는 들썩거렸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랐다. 마스크가 있어서 다행이다. 마스크 덕분에 편하게 울 수 있었다.
’ 큰아들 졸업식 못 올까 봐 두렵고 무서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4기 암 진단 후, 평균 생존율이 10% 미만이라는 얘기를 듣고 무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큰아들 20살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던 화창한 그날도 생각이 났다. 꾸역꾸역 묻어뒀던 죽음의 두려움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학교 정문에서는 큰 아들 손잡고 입학하던 날이. 강당 앞 파란 부직포를 신을 때는 참관수업 하던 날이, 강당 안에서는 큰 아들 학예회 하던 날과 오버랩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영혼은 내가 있던 공간 속 모든 에너지를 눈물로 알려주었다. 이미 몸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버티고 잘 견뎌줘서 고마워~!!’ ‘넌 해낼 줄 알았어’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온 세상이 나를 응원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벅찬 감정들 사이로 3년 전 눌러뒀던 죽음의 두려움을 마주하게 되는 이 순간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벅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꺼이꺼이 울며 무섭고 두려웠던 감정을 뱉어낼 수 있었다.
축복의 순간과 죽음의 두려움이 공존한 그 순간 나는 이원성의 세상에 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걸 느끼려고 지구별에 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사춘기 아들과 함께 매 순간 성장하고 있다. 한 뼘 더 깊어지고 온전해지며 엄마사십춘기를 잘 보내고 있다. 암이라는 친구가 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이 감정들.
감사합니다. 암은 고통이었지만 이제는 선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