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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별꽃 Jun 18. 2022

서른살, 덤으로 얻은 두 번째 인생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단어들 기억나세요?”


“비행기, 연필... 음 나머지는 모르겠어요”


10초 전에 들은 단어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담배 연기가 가득 찬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간호사는 빠르게 손을 움직여 내 상태를 기록했다.


지난 2020년 12월, 생일날 새벽이었다.


우당탕 소리가 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일어서려는데 온몸에 힘이 풀렸다. 방을 나오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의지와는 달리 팔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숨을 쉬기 어려웠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가족들도 나와 같은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바닥에 광어처럼 붙어 ‘이러다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주말에도 일을 시키는 상사를 남몰래 욕했던 일, ‘집콕’ 생활에 지쳐 가족들에게 자주 짜증을 낸 일 등 불만 가득했던 일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모든 것마저 내 삶의 일부로 겸허히 받아들이리라.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 작게 읊조렸다.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살 시도를 한 거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의사는 정상 범위의 10배가 넘는 일산화탄소가 내 혈액을 타고 온몸을 돌아, 호흡이 가빠진 거라고 했다.


바로 전날 보일러가 고장 나 고쳤을 때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내쉬는 숨이 달큰했다. 이전에는 몰랐던,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응급실에서 며칠간 치료받으면서, 내 양쪽 팔은 주삿바늘 흉터로 얼룩졌다. 하지만 병원에는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자살 시도를 한 젊은 남자, 손목이 부러진 할머니, 이마에 유리 조각이 박힌 아저씨 등 여러 환자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을 돌보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의료진의 모습도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렸고, 아픔에 허덕여 내는 환자들의 울부짖음이 응급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전쟁터 같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건강히 살아있는 게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서른 살 생일을 기점으로 인생 제2막이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한층 여유로워졌다. 이게 바로 덤으로 주어진 생명을 누리는 자의 특권인 것일까.


이전까지는 내가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해왔다면, 이제는 내 능력이 되는 범위에서 과감히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이 역시 나를 사랑해주는 방법의 일종이니까.


일과 휴식의 균형도 찾아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해 일하고 쉴 때는 최대한 회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먹하던 가족들과의 사이도 가까워졌다. 예전보다 자주 전화하고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다 보니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이 밖에도 내가 누리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가족과 지인들이 있다는 것, 편히 숨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낀다.


병원 측에 따르면 치매 증상 등 몇 달 안에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또다시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내게는 건강한 정신력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내 사람들’이 있고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된 성숙한 ‘제2의 나’도 있다.


팔에 든 멍이 희미해졌듯, 새로운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질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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