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별꽃 Oct 18. 2023

어쩌다 금산여행

인생이 코미디다

"우리 녹용은 믿고 드실 수 있어요. 여러분들 건강 지키시라고 아끼지 않고 서비스 해드립니다. 대신 드셔보시고 입소문 타게 부탁드려요."



30년째 사슴농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장은 그 자리에서 사슴뿔을 갈아보였다. 냉동고에서 꺼낸 길다란 뿔이 윙~ 소리를 내더니 차가운 은색빛 쇠에 갈려 얇디 얇은 종이조각처럼 뚝 떨어졌다. 바싹 말려 딱딱해진 바나나 절편처럼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니 상온에 녹으면서 말랑말랑해졌다.



사장이 시범을 마치자 문을 열고 중년 여성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파일철 된 계산서(계약서)가 하나씩 쥐어있었다. 사장의 눈짓에 여성 직원들이 한명씩 손님들에게 붙었다.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끈질긴 구매 강요에 못이겨 계산서를 작성했다.



어리둥절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엄마가 속삭였다.


"엄마도 이런 건 줄 몰랐어. 미안해."



나와 엄마는 기나긴 명절 연휴를 맞아 군산 선유도 여행을 하기로 했었다. 몇 년 전 여름, 군산에 가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폭염일 때여서 햇볕에 고통 받으며 바닷가에서 땀만 줄줄 흘리고 헉헉대며 돌아온 적이 있다. 이번엔 가을이니 선선한 여행을 즐길 수 있겠지 싶어 설렜다.



1인 25000원의 여행. 엄마는 친구들과 안동을 이 패키지 프로그램으로 가봤다며 꽤 오래전부터 나를 졸랐다. 교통비, 식비, 문화탐방비 까지 모두 들어간 금액이라 가성비 짱이라는 설득과 함께. 안동에서 불고기 정식을 점심 메뉴로 주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 문화체험도 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혜자인가! 처음에는 "에이~ 그런 거 다 의심해봐야해"하면서 경계를 하다가 끈질긴 엄마의 강추에 넘어가 선뜻 선유도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전날 밤까지 고된 개인 일정을 마치고, 여행 당일 오전 7시에 맞춰 버스정류장에 대기를 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나면 버스가 떠나버린다며 시간맞춰 오라고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는 여행담당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20분이 지날때까지 말이다. 여행담당자는 전화 통화로 "@@ 여행사라고 버스에 적혀있다. 곧 갈 것이다" "도착하면 전화를 주겠다"고 만 했고 엄마와 나는 히치하이킹을 해야하는 여행자처럼 허탈히 도로만을 목빠지게 바라봤다.



마침내 @@ 여행사라는 글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반가움도 잠시, 아침일찍부터 기다림을 선물해준 여행담당자에게 화가 솟구쳤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를 향해 쭈뼛쭈뼛 다가온 아줌마는 애교많은 전화 목소리 그대로 핑크로 도배를 한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에게 쓱 다가오더니, 만원짜리 한장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하나 생겼어. 여행지가, 선유도가 아니고 금산이야. 인삼축제 좀 다녀와"



엥? 갑자기 왠 금산? 패키지 여행사 직원이 당일 지각해놓고는 약속된 장소가 아닌 새로운 장소로 간다고 말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황당함에 "지금 뭐하는 거냐"고 했지만 아줌마는 이런 일은 종종 있다는 듯 "저 버스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다 동의를 해서 온 거다"라며 "장어랑 소고기 실컷 먹고 와요" 하고 설득을 시작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금산으로 여행을 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이미 한시간 가량을 기다림으로 보내 지친 우리는 결국 도전을 택했다. 다만 나는 좀 놀랐다. 버스에 올랐더니 온통 노인들이었다. 심지어 빈 자리가 없어보일 정도로 바글바글. 엄마 말로는 추석 연휴인데다 여행지가 금산이라서 젊은이들이 평소보다 안탄 것 같단다. 계단에 오르자 마자 버스는 움직였고, 엄마와 나는 맨 뒷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내 옆자리에 할아버지 두분이 씩 하고 웃으며 인사를 대신했다.



머지않아 나는 멀미를 시작했다. 버스 맨 뒷자리가 다른 자리보다 몇 단이 높은 탓에 버스가 요철을 밟을 때마다 꿀렁였다. 아, 끔찍해. 오늘 하루 잘 보낼 수 있을까.



이렇게 급작스러운 변수가 생길 때마다 스트레스가 몰려오지만, 이를 잘 넘기는 건 내 몫이다. 울렁거림을 타파하기 위해 준비한 아이템을 하나씩 꺼냈다. 약과 4개가 가지런히 상자를 꺼내 두개는 엄마와 내가 하나씩 먹고, 옆에 앉은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그랬더니 "어이구, 이 귀한걸.."하시면서 기쁘게 받아주셨다. 두 분은 다음 휴게소에서 쉬어갈 때 "잘먹었다" 하시며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내게 주셨다. 그때부터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내가 탄 버스가 향하는 곳은 금산인건 맞았지만, 패키지 여행이기도 했다. 그말인즉슨, 물건을 사는 시간이 포함돼 있다는 거였다. MC 역할을 해주는 가이드 아주머니는 그 행위를 '재판'이라고 표현하면서 "앞으로 총 세 번의 재판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 승객 대부분은 웃었지만 나와 엄마는 알아듣지 못했다.



관광지는 하나도 못가고 버스는 오전부터 오후 3~4시가 될 때까지 공장 세 곳을 들렀다. 그리고 우리는 차례로 재판장에 앉은 것처럼 의자에 가만히 앉아 사기꾼스러운 사람들의 일장 연설을 들은 후 녹용-홍삼-장판 영업을 당했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뭐 하나라도 사게끔 강요하는 분위기에 계속해서 거절만 하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마침 겨울도 다가오고 집에서 쓰던 장판을 바꿀 예정이었어서 40만원 짜리를 하나 사고 말았다. 일반 장판과 달리 전자파가 통하지 않는 아이라며 직접 전자기장 기계로 시범까지 보인 덕에 신뢰도가 확 올라버리고 말았다.


4시쯤 무한리필 장어집에 가서 한바탕 연기를 마시며 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가이드가 바로 서울로 올라가자는 걸, 어떤 사람이 이의제기를 해서 금산인삼시장에 잠시 들렀다. 출발한 지 10시간여 만에 관광을 처음해봤다. 그것도 20분정도밖에 시간을 안줘서 엄마랑 인삼튀김을 하나씩 사 먹고 차에 올랐다. 서울로 돌아오니 저녁 8시였다.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데, 별안간 '푸하하'하고 웃음이 났다. 명절 연휴에 노인들 틈에 끼어서 엄마랑 놀러온 내가 좀 웃겼다. 안그래도 하루 종일 "남자친구 없지? 그러니까 엄마랑 이러고 있지"라는 소리를 듣는다든가, "아가야, 이제 대학생 정도로밖에 안보이는데 몇살이야?"라든가 "우리 아들이 마흔 셋인데 장가를 못갔어. 혹시 남자친구 있어?"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올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다.



가끔 생각하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으로 엄마와 내가 한 데이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겠지?

작가의 이전글 지하철에서 주저앉아 출근 못한 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