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별꽃 Jan 07. 2021

20년 전 김소연을 뛰어넘은 김소연

TV 캐릭터 박물관③ 김소연VS이유리,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악녀

한국 드라마계에서 ‘악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2014년 MBC ‘왔다 장보리’에서 연민정을 연기하고 시청자 투표로 연기대상의 영예까지 안은 이유리다. 그 전과 후에는 김소연이 있었다.



김소연은 SBS 연기대상의 강력한 대상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지난 2020년 한 해 하드캐리했다. SBS 월화극 ‘펜트하우스’의 천서진을 보면 김소연의 본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당황하면 속사포랩을 뱉고 상냥한 말투와 착한 심성을 지닌 김소연은 간데 없고, 카리스마부터 처연함까지 한계없이 표현해내는 천서진만 존재한다.


천서진은 절친의 남자를 뺏어 결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유부남과 외도를 하고, 청아재단 이사장이라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친아버지를 계단 위에서 밀어 죽이는 엽기적인 인물이지만 이를 맡은 김소연의 연기는 꽤나 설득력이 있다.  


김소연은 불과 15세의 나이에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가요 프로그램 MC까지 보던 그녀는, 2000년 MBC ‘이브의 모든 것’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후 잊혀질 뻔 했다.



그러다 2009년 KBS2TV 드라마 ‘아이리스’ 북한 특수요원 김선화로 다시 세상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김태희와 차 안에서 보여준 액션씬과 그해 연기대상에서의 수상소감으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엔 일부러 악녀를 피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범하고 착한 역할을 도맡았다. SBS ‘검사프린세스’에서는 나이에 맞는 발랄한 매력을 과시했다. 30년에 가까운 커리어를 일군 끝에 만난 인생캐릭터가 바로 SBS 월하극 ‘펜트하우스’의 천서진이다.





찔러도 눈물 한번 흘리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채찍질만 하는 아버지에게서 칭찬한번 듣지 못한 설움을 토해낼 때, 남편인 하 박사(윤종훈)에게 이혼하자고 하면서 그동안의 외로움을 고백할 때, 나는 그녀가 그간 품어왔을 것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렸다.


특히 아버지의 피가 묻은 손으로 피아노를 쳐내려가는 광기 어린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극 초반 트로피로 오윤희(유진)의 목에 상처를 내고도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던 연기와는 또 다른 깊이가 있었다. 목소리 뿐만 아니라 얼굴 근육과 눈동자의 움직임으로도 연기하는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펜트하우스 속 김순옥 작가의 발상은 넷플릭스 오리지널만큼이나 ‘톡톡’ 튀고 신박했지만, 엽기적이었다.



천서진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누군가의 연인이자 친구로서 뭐하나 일반적인 면이 없다. 툭하면 주단태(엄기준)와 스킨십을 하고, 본인을 예쁘게 꾸미기에 바쁘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딸의 마음을 돌보는 것은 뒷전이다.  


그뿐인가. 리틀 헤라클럽 멤버와 그들의 부모인 헤라클럽 멤버가 파티에 참석했다가 심수련(이지아)에게 혼쭐을 당하는 것도 만화를 보는 것 같았고, 오윤희가 술 기운 때문에 자신이 살인한 사실을 기억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깨닫는 설정은 너무 황당해서 드라마에 대한 정이 확 떨어졌다. 마지막회에서 로건리(박은석)와 심수련의 복수가 물거품 되고 갈등의 핵인 오윤희까지 자살을 암시하는 걸 보고선 그간 쌓아온 긴장감이 풀어져 화가 났다.


매 회차를 ‘찢는’ 김소연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일찍이 펜트하우스를 포기했을 것이다. 욕망을 표현하는 악녀는 많았지만 천서진처럼 순간순간의 행동과 감정을 이해시키는 악녀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녀는 이미 한번 악녀로서 정점을 찍은 ‘선수’다. 2000년 방영한 MBC ‘이브의 모든 것’은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가 손꼽아 기다리며 시청하던 드라마다. 거기에서 허영미는 뉴스 간판 앵커가 되기 위해 악행을 일삼고, 나중에는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실은 선미(채림)의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 하는 거였는데, 그걸 감쪽같이 속인 김소연에게 감탄했었다.



김소연의 힘있고 당당한 눈빛연기를 2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히 기억한다. 그간 다채로운 연기를 펼치며 연기자로서 성장을 하느라 가장 잘하는 것을 아끼고 있었고, 40대가 된 지금에야 와인처럼 무르익은 ‘진짜’를 꺼내보인 것이리라 생각한다.   


연기대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천서진을 사랑한 시청자들은 알고 있다. 진정한 대상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이유리, 이젠 '연민정' 말고 ‘아! 이유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