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별꽃 Jan 31. 2021

지하철 안내 방송이 이렇게 훈훈해도 되는 거야?

퇴근길 최고의 위로

요즘 ‘3cm 헌터’라는 네이버 웹툰을 읽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3cm로 몸이 작아져버린 사람들이 각기 다른 능력으로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며 생존해나간다. 게임을 진두지휘하는 세력은 우주의 위기에 맞서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3cm로 크기를 줄였다고 합리화한다.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세력에 조종당하며, 다른 생명체를 죽여 포인트를 쌓아가는 극 중 인물들을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삶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6시에 회사에서 ‘칼퇴’를 한다고 해도 집에 도착하면 7시가 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시계는 9시를 바라본다. 씻고 TV를 보다보면 잘 시간이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해서는 정신없이 시간이 흐른다. 점심 식사마저도 미팅이 이뤄지기 때문에 일의 연장선상이며, 주말에도 추가근무를 해야 할 일이 종종 생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지 뭐”


상사가 주말 업무를 강요하면서 한 말이다. 실제로 회사의 업무 시스템에 불만을 느껴 문제를 제기한 한 직원은 퇴사를 당했다. 이후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강해졌다. 단톡방에서 상사의 카톡에 답을 안 하면 안한다고 혼이 나고, 카톡을 안 읽어도 혼이 난다. 군대가 따로 없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기계’나 ‘인형’으로 대할 때는 반발심이 쌓인다. 


지난해에만 해도 여름 휴가, 추석, 크리스마스 등 모든 합법적 공휴일에 쉬지 못하고 일을 했다. 로마에서 로마의 법을 따르는 게 맞지만, 그 로마가 썩어빠진 나라라면 나는 굳이 법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울 회사의 최상위층은 추가 수당을 주지도 않으면서 일을 시키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상위층인 부장급 직원들은 그 명령을 떠안아 고스란히 평직원들에게 전달한다. 중간에서 바른 소리를 할 수도 있는데, 강자에게 한없이 약한 캐릭터들이다. 


회사에서 ‘막내급’인 나로서는 바른 말을 할 권리도 없고, 설사 용기를 낸다고 해도 ‘바위에 계란치기’에 불과할 것이라는 걸 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넵’이라 말하고, 빠릿빠릿하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다. 영혼없는 로봇처럼, 몸에 ‘쭉’ 힘을 빼고 내려놓고 일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차라리 만약 내가 사는 일상도 누군가가 조종하는 게임 중 하나라면, 내가 ‘계시자’가 짜놓은 시험에 걸려든 것이라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객관적으로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금요일에도 거북이처럼 노트북 가방을 메고는 퇴근길 열차에 지친 몸을 실었다.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거나 쌓여있는 문자메시지에 답장을 보낼 기력도 없었다. 멍 때리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힘든 마음 이 열차와 함께 내려놓으시고 내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좋은 일이 가득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기장의 따뜻한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열차 내에 잠시 정적이 일었다. 방송은 1분이 넘게 계속됐다. 다들 가만히 눈을 감고 안내 방송에 집중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힘내라는 말을 해주는 게 이리도 따뜻함을 주는 일인지. 


기장이 마법이라도 부린 것인지, 도착역에 내려서 집까지 걷는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제 이직할까’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주말에 뭘 하면서 쉴까’ ‘저녁에 뭘 먹을까’ 같은 희망찬 생각들로 채워졌다.


‘TV 동화 행복한 세상’에서나 나올 법할 동화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에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데, 기장 아저씨가 내게 꼭 그런 사람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종당하지 않고, 내 스스로 미래를 바꿔나가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살아야지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핍이 드라마를 만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