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상담소"는 이렇게 시작됐다
모든 드라마는 결핍에서 시작된다. 결핍된 것에서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이 캐릭터의 원동력을 좌우한다. 나는 어떤 욕망을 지닌 캐릭터인가.
친구들과 20대를 돌아보다가 어떤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외로움이 앞으로도 지속되리라고. 나는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 그에게 결핍은 외로움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만나기를 좋아하는데, 지금 직장에선 업무 위주인 동료들이 많아 외롭다는 고민이었다. 친구는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호주에 간다한들 외로움이 채워질까. 나의 이의제기에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때론 채워지지 않을 결핍을 위해 싸운다.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정을 다 버릴 정도로.
내가 20대 때 갈망해온 것은 "표현"에 대한 인정이었다.
아이디어를 내고 채택되면 좋아했고 그 다음 채택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남들 앞에서 칭찬을 받는 것이 내가 인정을 받는 방법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관심이 쏠리면 작아졌다. 내 의견에 아무도 관심이 없으면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고 비참해졌다. 그런 감정에서 나온 말과 행동은 내 값어치를 스스로 깎아내렸다.
그만큼 내겐 타인이 중요했고, 그 결과 주위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했다. 누구도 채우지 않은 족쇄를 매단 채, 스스로 를 고문시켰다. 원하는 게 있어도 그걸 가질 수 없는 상황이면 참았고, 어떤 감정이 일어나도 내 표현으로 벌어질 일들을 의식해 내뱉지 못했다. 진심은 꽁꽁 숨겨두고 대외적으로 활동할 ‘또 다른 나’로 활동해오는 동안 진짜 자아는 곪아터졌다.
왜 다른 사람에게 평가를 받을 생각만 했을까. 상을 못 받는다면 내가 만든 상을 스스로에게 수여하면 되었을 것을.
그래! 나의 결핍은 나에 대한 "사랑"이었던 거다.
로맨스 없는 밋밋한 드라마는 얼마나 삭막하고 메마른가. 내 20대의 서툰 기억들도 내가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몰라 벌어진 일이었던 거다. 아프면 아프다고, 미우면 밉다고,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표현하지 못했다. 그게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 지도 모르고.
사랑에는 그 사람의 결핍까지도 포함된다. 그 사람의 아픔에 안쓰러움이 느껴질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안쓰러움을 느껴보기로 했다. 나를 사랑해주기로.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나를 위해 영화도 보여주고 좋은 공기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여주고, 가꿔주기로. 진정 매력적인 사람, 사랑이 가득찬 사람이 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