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필자의 손 상태는 ... 거의 나은 상태라고 보면 된다. 흉터는 크게 났고 아마도 이건 없애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흉터 부분의 두꺼워진 피부층은 늘어나는 것이 멀쩡한 곳에 비해서 자연스럽지 못해서 주먹을 꽉 쥐거나 손가락에 힘을 주게 되면 그 부분이 살짝 피부가 당겨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지는 정도? 그런 느낌이 있다.
그리고 필자도 이제 일상을 시작했다. 손이 아파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시작했고 ... '손을 다치다' 시리즈도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물론 쓸 거리를 하나님이 주신다면 그걸 쓰는 거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ㅎㅎ 지금 현재로서의 생각은 그렇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 부터 눈이 안보이는 맹인을 고치셨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병자에게 예수님의 자신의 침과 흙을 섞어서 그 맹인의 눈에 발라주고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 ... 그 맹인의 병이 나았고 , 그 맹인에게 제사장에게 보이고 이제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유대인의 공동체에 합류하라고 말씀하신 ... 뭐 그런 스토리. 아마 교회 좀 다니시던 분들은 다 아실만한 스토리다.
헌데 필자는 그 맹인은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과연 없었을까 .... 하는 의문이 든다. 필자가 헬 조선에 살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ㅎㅎ
'아니 눈이 멀었을때는 그래도 근근히 먹고 사는 걱정은 크게 안했는데 ... 내 구걸의 나와바리가 그래도 나름 정착되어 있었고 , 오가는 사람들이 적선을 해 주어서 그걸로 먹고 사는 걱정은 안했는데 , 이제 눈이 떠지고 나니까 나와바리도 없어지고 구걸도 못한다. 내가 평생에 배워서 할 줄 아는 일이 뭐가 있나? 아무것도 없고 나이도 젊지 않다. 헌데 이 상황에서 먹고 살려고 하니 삶의 질 측면에서는 차라리 구걸하던 때가 더 나았던 것도 같다. 과연 내가 눈을 뜨게 된 것이 잘된 일이었을까나?...'
아마 저런 생각 전혀 안하고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어쩌면 저 생각 처럼 삶의 질 측면에 있어서는 차라리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가 더 나았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는 그 시절에 맞는 은혜가 필요했다 . 그리고 눈을 뜨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눈이 뜨고 나면 그것에 맞는 은혜가 없이는 살아 낼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닐까나 ... 하는 생각 말이지.
인생 전체에 걸친 축복을 한방에 다 받고 , 그 이후에는 구지 축복을 구할 필요도 없이 인생을 즐기고 아무런 걱정도 , 근심도 없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모습 ...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축복의 모습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복된 삶이라는 것은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하루 하루의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주기도문에 언급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지.
.....
하루 어치의 생각과 하루 어치의 행동 , 그리고 하루 어치의 은혜 ... 그것을 보고 사는 인생은 어쩌면 답답하고 불안정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다. 계산이 서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 하루 근근히 은혜로 살아내는 삶도 그렇게 나쁜 것 만은 아닐 것 같다. 손을 다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하루 하루 그날 그날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삶이 그렇게 비참하지도 않았고 , 무의미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 중에서는 '아니 얼마나 무능하고 무계획하게 살아가면서도 입만 살았네. 그건 잘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커다란 비젼을 외면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냐? 너무 패배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인데 , 그걸 또 합리화하기 까지 하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얘기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고 했어. 지금 우리는 선과 악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예수님은 이미 이천년 전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고. 나는 지금 그 승리의 영광속에 있고 , 그것에 대해 더 깊이 깨닫고, 알고, 충분히 누리면서 살고 싶을 뿐이야' 라고 얘기하고 싶네. 하긴 이런 논쟁은 끝이 없다. 아마도 결론은 안 날 것인데 ...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내 노동력을 끌어내어 그것으로 특정 교단의 교세를 확장하는 데 쓰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는 않았다는 거고 , 하나님을 전하는 것과 교세를 확장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는 거고 ...
( 필자가 생각해도 입은 정말 살았다 싶다. ㅎㅎ 이런 쪽으로 논쟁해서 밀린 기억이 별로 없다 )
.....
헌데 하루 하루 또 살아내는 모드로 슬슬 전환이 되면서 오히려 골치아픈 일은 더 많아진다. 손이 부상중에 있을때는 일단 손이 낫는 것에 전력을 다 했고 , 거기에 맞추어서 살았다. 그 이후의 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손을 다쳤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에 생각 해 봤자 별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말이다. 헌데 이제 손이 낫고 난 다음에 뭔가를 해야 하는 시기가 되니 또 이런 저런 걱정들이 앞서네.
물론 필자는 열심히는 아니지만 기도한다. 필자 앞에 되어진 상황들을 놓고 , 그리고 필자가 두려워하는 것과 필자 안에 내재되어진 결핍을 놓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기를 바라고 ,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을 얻어서 그러한 결핍을 내가 바란 방향으로든 , 아니면 하나님이 바라는 방향으로든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모든 기도가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응답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아니 바라던 방향이 아니더라도 응답이 다 된다고 믿지는 못한다 ) 솔직히 필자는 기도를 하기만 하면 무조건 다 응답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못믿겠다. 퍼센테지를 따져 볼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 필자의 경우에도 그다지 응답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는 거의 내성이 생길 지경이니 말이다. '그래 이런 기도는 또 응답 안해주시겠지... ' 라는 약간의 패배의식도 달고 살고 있고 말이다.
헌데 말이다 ... 그럴 때 마다 생각하는 성경상에서의 존경스러운 인물이 있다.
어느 가나안 지방에 터 잡고 있는 토착민 여인이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한다. 헌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신다. 유대인을 먼저 챙겨야 하고 , 이방인은 지금 순서가 아니기에 이방여인이 바라는 것을 지금 들어줄 수 없다고 하신다. 거기에 여인은 다시금 예수님에게 매달린다.
"집에서 캐우는 개들은 주인의 밥상에서 나온 부스러기 음식으로 배를 채웁니다. 저는 지금 그 정도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먼저 챙기세요 . 헌데 유대인을 챙기시면서 생기는 부스러기 정도의 은혜라도 주신다면 족합니다. 그것으로 제 딸아이가 나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 예수님은 그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시고 , 그녀의 자녀를 고쳐주셨다.
.....
필자는 과거에는 성경의 인물중에 베드로 , 야고보 .... 이런 인물들이 좋았는데 , 나이 먹고 나서 성경상의 인물 중에서 정말로 존경스러운 인물이 바뀌었다. 두 명 있는데 한명은 거지 나사로이고 다른 한명이 저 여인이다.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제게 그 정도의 은혜라도 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라는 믿음 말이다. 솔직히 필자는 자존심인지 자만심인지가 너무 강해서 저런 얘기 잘 못할 것 같은데 ... 저 여인은 필자보다 한창 고수임에 틀림이 없다.
솔직히 필자가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지만 필자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쌔고 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예를 들어서 손등의 부상 때문에 기도한다고 셈 치지만 ... 솔직히 손이나 발이 잘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이 세상에 없을 리가 없다.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을테고 , 아마도 지금 목숨이 오가는 지경에서 하나님께 울부짖는 사람도 있을거다.
그런데 그런 필자의 간절함과는 비교도 안되는 강도의 간절함으로 드려지는 기도도 솔직히 백퍼센트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다 들어 주셨다면 세상애는 손이나 발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없겠지. 아마도 죽는 사람도 대폭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만 하면 다 죽지 않고 살게 된다면 말이다.
하나님이 어떤 기도는 들어주고 어떤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지 솔직히 필자는 거기에 대한 공식 같은 것을 만들 능력은 없다. 미리 수치를 입력하면 이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확률 몇 퍼센트 입니다 ... 뭐 이런 걸 계산해 주는 소프트웨어가 만들어 질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인공지능으로 떡을 쳐 봐라 ... 기도의 내용을 미리 입력해 놓으면 이것이 하나님이 들어줄 확률이 나오는 소프트웨어 못 만들 거라고 본다.
결국 기도에 대한 응답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 하나님의 권한에 달린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안 들어주시고에 대해 왈가 왈부할 자격 없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인간은 그저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신다면 그것으로 살아보겠습니다. 그것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 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는 없는 존재인 것 같다. 그리고 저 가나안 여인은 그것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해서 이제 슬슬 손이 회복되고 평소에 살아가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 아무래도 손이 나아가던 시절의 신기함과 감격 같은 것들은 점점 더 옅어지고 , 삶의 무게는 점점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상황이 펼쳐질른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또 그 때에 맞는 은혜를 구하고 살아야지. 그것이 인생인 것 같다. 만일 그런 은혜 구함에 대한 응답이 제대로 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딸린 일이니 사람이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일거다. 다만 이렇게 기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 지금 저보다 더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들도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급한 계획 안에 있어서 그 계획에 쓰임받는 사람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름대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흐름 안에서 저의 기도는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하나님만큼 모릅니다. 제 기도는 제가 생각하는 것 보다 하나님에게는 정말 사소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대한 계획과 통치를 실현하시는 가운데에서 부스러기 은혜라도 제게 허락하실 수 있으시다면 제가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 주님 그런 부스러기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 부스러기 은혜로도 살아갈 수 있는 겸손과 믿음을 주세요."
....
그냥 뭐 ... 큰 대접 받자고 사는 거 아니니 ... 그렇게 부스러기라도 감사하게 받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땡큐이지. 물론 이 과정에서 내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밥상을 엎어버리고 나올 수도 있다. "아니 내가 이런 대접 받으려고 예수 믿었나? 저런 사람에게는 저런 복을 주고 나는 겨우 이따위로 만족하라고??" ... 라고 씨부리면서 말이다.
헌데 그건 교만이고 자기 손해다. 남들 자녀 서울대 가서 삼성 취직한게 부럽고 자기 자녀가 대학 또 떨어지고 취직 못하고 있는게 서럽고 창피해서 하나님에게 등돌리고 살겠다고 하면 그건 자기 손해지. 자식이 없거나 , 자녀가 건강하지 못한 부모에게 그런 얘기 해 봐라. '복에 겨워서 밥상 걷어차고 있네' 라는 소리 듣기 딱 좋지 뭐 ...
하나님이 주시는 부스러기 ... 헌데 생각 해 보면 하나님의 부스러기는 사람에게는 꽤 커다란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사람이 먹다 흘린 비스켓 부스러기가 개미 한마리에게는 한달 양식이 될 수도 있는 것 처럼 말이지. 사실 그런 부스러기를 먹고라도 살아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름 멋진 인생 아니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