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한 상태를 좋아한다. 온전히 무언가에 집중했을 때 누가 말을 걸면 잘 못 듣기도 한다. 작년만큼 덥지는 않았던 덕분인지, 지난 8월간 드라마 정주행을 두 번이나 해냈다. 각각 16부작과 20부작이니 최소 36시간을 달렸다. '많이 보는' 사람이 아니라서, 몰입되지 않았다면 나로서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두 드라마 모두 2016년에 방영됐다. 한두 편 보고 흐름을 끊어버리기 싫은 기대작들이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고 싶어서 여태 감상을 미뤄왔었다. 마침 시간이 생겨 결단을 내렸고, 며칠 만에 몰아서 다 봤다. 간단히 먼저 말하자면,
몰입할 수 있어 즐거웠다.
※ 스포일러가 좀 있습니다.
시간을 넘어 낯선 고려로
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 (2016)>
· 좋은 점: 사랑해요 이지은, 사랑해요 이준기, 매력적인 황자들, 풍부한 캐릭터, 적절한 각색, 아름다운 화면.
· 아쉬운 점: 아이유의 OST가 없음, 8황자와의 질긴 러브라인, 너무 슬픈 해수, 숨겨진 이야기들.
#내가고려라니!
초반부 해수는 5분에 한 번씩 입틀막을 한다. '이제는 받아들일 만도 한데' 싶을 때까지 자신이 고려 시대로 타임슬립을 했다는 사실에 토끼 눈을 하며 힉! 하고놀란다. 평소 아이유를 그리 활달하지 않은 캐릭터로 알고 있어서 연기를 정말 열심히 했구나 싶었다. 놀라는 리액션에서 중국 사극 드라마 특유의 향이 묻어나는 것 같았지만, '고려'라는 생소한 시대를 체험할 시청자들의 분신으로 여기기로 했다.
#유사장금
중반부부터 해수는 슬퍼진다. 발랄함을 잃어버린 해수를 안타까워하는 8황자의 마음이 내 마음 같았다. 캐릭터에 완벽 적응한 이지은이 세상 슬픔을 다 짊어졌기 때문. 그러자 장금이가 떠올랐다. 드라마 <대장금>은 이제 교과서에 시나리오 대본으로 실리는 오래 전 작품이다. 온갖 고난을 겪고 자란 수라간 나인이 최고 의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장금이를 생각한 건 비단 해수가 고초를 겪다 다미원 최고 상궁에 오른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정선이 비슷해서였다. 발랄한 민폐 캐릭터로 시작해서 시련을 겪으며 성숙해지는 점. 좀 달랐던 건, 해수는 너무 슬펐다는 거. 정주행을 마치고도 한참을 아련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황자부자
좋았던 점을 또 꼽자면 황자가 엄청 많은데 각자의 매력이 다 살았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정윤으로 태어나 짐에 눌려버린 자, 끝없이 버림받은 자, 가문을 끌어 가야만 했던 자, 어미의 수단이었던 자, 사랑과 충심을 다할 수 없었던 자, 세상 물정을 몰라 세상에 당한 자, 지키기 위해 칼을 썼던 자. 그 외에 두 황후나 연화, 박수경, 오상궁, 채령, 우희까지도 캐릭터가 다양해서 맘에 들었다.
전개 상 중간중간 건너뛰는 장면들이 있어서 감정선이 아쉽기는 했다. 방대한 이야기를 줄인 탓이려니 싶지만, 한 황자는 평생 마음에 품었던 사람이 죽어서인생 끝난 것처럼 슬퍼하더니 새 인물과 금세 마음 깊이 사랑한다. 표현 방식이 어설프진 않았다. 장면을 적절히 잘 숨겼다. 숨은 이야기를 충분히 다 풀어 내려면 30부작쯤은 되었어야 했다. 다만 중간 과정을 더 보지 못한 게 아주 조금 아쉽다. 원작 소설에는 전체 이야기가 다 표현돼 있으려나.
#고려사극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가 소설 <보보경심>을 원작으로 뒀을지 드라마 <보보경심 려>를 원작으로 뒀을지, 둘 다였을지 둘 다 아니었을지는 모르겠다. 유명한 날개씬(?)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나 부제를 붙인 것을 보면 아마도 드라마 쪽이 더 가깝겠다 싶다. 어느 쪽이든 중국 이야기를 고려 실정에 맞게 각색을 잘했다. 특히 광종이라는 존재를 둘러싼 정치싸움, 화장과 목욕을 즐겼던 고려 사회를 표현해 낸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 안에 녹아들 수 있도록 현대에서 온 화장전문가(?) 고하진을 고려 여인 해수로 설정해 4황자의 흉터를 가리게 한 것도 탁월했다.
2016년 TV 방영 당시만 해도 '사극=조선'의 공식이 무난했고 다른 시대를 다루는 건 여전히 도전이었다. 낯설지만 매력적인 고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전에도 드라마 <신의>가 있었지만, 이후로 부쩍 고려가 비중있게 언급되는 느낌이다. 드라마 <도깨비>나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 등. 시청자들이 또 다른 고려 이야기를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길을 잘 터준 듯하다. 물론 스토리뿐 아니라 영상미도 완성도를 높이는 데 몫을 더했다고 본다. 고려의 새로운 이야기가 궁금하다.
공간을 넘어 맥락을 만들다
드라마 <W (2016)>
· 좋은 점: 이종석에 다시 몰입, 송재정 작가에 다시 팬심, 예측 불가한 전개, 눈이 즐거운 CG.
· 아쉬운 점: 다소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 다소 불편한 직장 내 괴롭힘, 간혹 발견되는 설정의 허점들.
#공간초월
송재정 작가를 널리 알린 드라마 <나인>에서 등장인물들이 시간을 넘나들었다면, 드라마 <W>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공간을 넘나든다. 그 콘셉트를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엄청나다. 만화 주인공이 사람이 된다니 맙소사. 그러자 그 인물을 이야기 속에서조차 쉽게 죽일 수 없어진다. 웹툰에서 인간의 존엄까지 다룬 송재정 당신은 도덕책..!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여태껏 '저 캐릭터는 죽어야 하네 어쩌네' 해왔던 내 입이 방자했다.
#인간초월
이 부분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각성해 자아가 생긴 이야기, 영화 <공각기동대>를 처음 봤을 때 느낀 신선함에 비할 만했다. 영화 <공각기동대>처럼 더 깊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철학적으로 들어가지 않은 점이 드라마로서는 옳았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취향 면에서는 굉장히 아쉬웠다. 그래서 그랬는지 오연주가 강철을 사랑하는 게 잘 와닿지 않았다. 인간에 관한 고찰이나 고뇌 없이 이미 강철을 인간으로 확신한 점이 인간미 없어서.
#맥락
그럼에도 대사나 상황 설정에서 웹툰의 특성이 드라마 스토리와 잘 섞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로 인한 손발 오그라들음은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강철에게 딱 한 대 얻어맞은 사람이 만화스럽게 '우당탕!' 하고 굴러서 넘어지고, 과감한 강철 때문에 부끄러운 연주가 손가락을 판판하게 다 펴서 눈을 '어맛☆' 하고 가린다. 키스신이 맥락 없다는 걸 등장인물도 시청자도 아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맥락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W 세계를 초반에는 웹툰 속 세상으로 다루다 후반으로 갈수록 현실과의 평행세계로 규정한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두 세계의 규칙을 발견해 나가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안에서 규칙은 깨야 제맛이고 벽은 무너져야 제맛이다. 그래서 더 눈을 뗄 수 없다.
악당의 정체성도 흥미로웠다. 한동안 사연 깊은 악당들을 좋아했는데 '악당이어서 악하다', '악당은 악해야 산다'라니. 이렇게 단순하고도 설득력 있는 설정이 있단 말인가. 이런 몇몇 요소들 덕분에, 이야기라는 것이 결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편씩 클리어 할 때마다 엔딩이 굉장히 궁금했다.
#송재정작가
TV에서 이 드라마가 한창 방영중일 때 20부 대본을 송재정 작가가 직접 공개했었다. 받아놓고만 있어서 드라마도 20부작인 줄 알고 있었다. 그 정도의 호흡을 기대하고 정주행을 했는데 16화에서 갑자기 마지막회라고 해서 당황했다. 어쩐지 자꾸 예상보다 빠르게 결판이 나려고 하더라. 원래 이야기가 어떤 식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한데 16부작으로도 충분히 알차고 좋았다. 대본은 좀 더 나중에 읽어볼 생각.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먼저 본 것이 나에겐 득이었다. 드라마 <W>는 엔딩까지 괜찮아서 차기작을 향한 기대감이 다시 올랐다. 송재정 작가가 한창 가상현실에 꽂혀 있다는 인터뷰를 봤는데, 그분이 펼칠 다음 세계를 몇 년이고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