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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쟁 Jan 07. 2020

판 깨지는 소리

사재기로 얼룩진 가요 시장을 보며



내 손, 길거리, 차트. 어디에나 있는 가요를 오랜 시간 동안 아껴 온 사람 중 하나로서 비뚤어진 음악 산업의 현 상황을 어느 시점부터 한번 찬찬히 들여다 보고자 한다. 사격은 좋아하지만 저격은 즐기지 않으므로 실명은 자제하고.






1990년대

나에게 의미 있던 '가요'의 첫 시작은 90년대 초반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 시장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직후. 당시에는 TV로 방영되는 가요 프로그램이나 여타 TV 프로그램이 끝난 후 나오는 뮤직비디오 정도가 대중이 가요를 접할 수 있는 주요 창구였다. 카세트테이프와 CD가 음악 앨범 발매의 기준이었고, 음악 앨범 발매일이면 동네 레코드점에 줄을 서서 현장 구매를 해야 하는 시기였다. 초등학생이던 난 좋아하는 가수의 카세트테이프를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90년대 중반쯤 되자 가요 시장은 이전보다 장이 넓어졌다. 보다 많은 가수가 등장했고 장르도 다양해졌다. 나는 '마이마이'로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다니며 가요를 듣기 시작했다. 회전판에 걸어 소리를 내는 동그란 물건은 '음반'이라는 말로 여전히 유효했다. CD는 음반 판매량의 기준이었다. 카세트테이프만 사던 난 그게 음반 판매량에 집계되지 않는다는 얘길 듣고 다짐했다. CD를 사서 내 가수의 음반 판매량을 늘려줘야겠다고. 그렇게 용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의 3집을 CD로 샀다. 내 인생의 첫 CD라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CD는 귀한 것이었다. 값이 카세트테이프보다 비싸서 그렇기도 하지만, 손을 잘못 대서 상처가 나면 쉽게 망가지는 물건이었다. CD 케이스에서 꺼내 플레이어에 넣기까지 얼마나 조심했는지 모른다. CD 플레이어로 노랠 듣다 살짝이라도 튕기면 CD가 망가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오래된 컴퓨터의 CD-ROM이 세차게 CD를 돌리거나 트레이가 나올 때 덜컥거리면 내 심장도 같이 쿵했었다. 애지중지해야 했던 물건 덕분이었을까? 그 안에 담겨 있던 가요도 그만큼 소중했다.


90년대 후반, 비로소 한국 가요의 르네상스 시기가 왔다. 여전히 TV와 라디오 등의 기존 매체 중심이었지만 누구나 노랠 들었다. 최근 한국 가요가 K-POP이라는 큰 장르로 묶이는 것과는 달리 발라드, 락, 힙합, 댄스, 트로트 등 여러 장르가 무대 위에서 인기를 얻었다. 걸그룹이나 보이그룹뿐 아니라 혼성그룹, 솔로, 대규모 그룹 등 팀 구성도 다채로웠다. 그들이 연말 시상식에서 비슷한 비중으로 무대 구성을 했음은 물론이다. 



200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 음반 판매량은 연이어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밀리언셀러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카세트테이프도 여전히 함께 팔렸으나, 많이 재생하면 늘어나버리는 특성 때문에 슬슬 내 주변에서 보이지 않게 됐다. 음악 앨범은 주로 CD로 구입, CD 플레이어로 재생했다. 컴퓨터로 MP3를 추출해 '윈엠프'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하루 종일 가요를 듣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이 되어 MP3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가요 시장은 더욱 활황기가 되었다. 앨범 형식으로 노래가 발표되던 음반 시장은 개별 곡들이 인기를 끄는 음원 시장으로 변모했다. 이전에도 CD에서 추출한 파일을 MP3로 만들 순 있었다. 다만, 그래 봤자 들을 수 있는 기기는 컴퓨터로 제한이 되었다. 정 이동하면서 듣고 싶다면 공 CD에 갖고 있던 파일들을 '구워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야 했다. 귀찮기도 하고 CD를 굽는(writing) 기기가 아주 보편적이지도 않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MP3는 일반인들에게 기술 해방이었다. 클릭 몇 번만 하면 MP3 플레이어에 수십 곡을 담을 수 있었고 무겁지 않게 들고 다니며 들을 수도 있었다. MP3 플레이어 회사들은 요즘의 휴대폰처럼 보다 더 큰 용량으로 MP3 플레이어를 만들어 타 업체들과 경쟁했다. MP3 플레이어는 내 손 안에서 여러 가수의 곡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신세계였다. 게다가 MP3는 CD처럼 깨질 염려도 없었고, 소비자는 이제 귀찮게 파일을 모아 CD에 굽지 않아도 됐다. 실수로 파일을 삭제해도 음원사이트에서 다시 다운로드를 하면 그만이었다. 비용은 다시 지불해야 했지만. 가요는 그렇게 잃어도 딱히 아깝지 않은 하나의 파일이 되었다. 이렇게 노래 듣기가 쉬워지니 수요도 급증했다. 이때부터 대중교통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지 않은 사람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난 본격적으로 노래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내 컴퓨터를 MP3로만 10기가바이트를 채운 적도 있었다. 책을 모으듯 MP3도 모으는 게 유행이었다. 노래를 '소유'함으로써 향유한 것이다. 그러나 MP3 파일은 여타 컴퓨터 파일들처럼 복제가 쉬웠다. 이는 음반 판매량이 뚝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P2P 사이트에서 MP3 파일이 공유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소비자들은 점점 노래를 구입하지 않았다. P2P 사이트의 규모가 작았을 땐 그것이 일부 홍보 기능을 하기도 했으나 사이트 규모가 커지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가수들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지도를 높여 앨범을 판매해 수익을 얻던 구조가 파괴되었다. 생산자의 수익은 뚝 떨어졌다. 그렇게 가요 시장은 암흑기를 맞이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음반 판매량은 밀리언 셀러는커녕, 10만 장만 팔려도 대박으로 치기에 이르렀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노래를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창작자들은 콘서트나 행사 등으로 눈을 돌렸고 더 이상 TV 가요 프로그램의 순위도 예전과 같은 무게를 갖지 못했다. TV 가요 프로그램은 더 이상 가요 시장 전체를 대변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TV에 비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노래가 존재한다는 걸, 대중은 뉴미디어를 통해 깨달았다. TV 가요 프로그램 차트의 권위도 자연히 떨어졌다. 가수의 절대적인 숫자가 급증해 TV 안에 전부를 담을 수 없었던 것도 한 이유이겠으나, 대중이 점차 TV와 멀어지는 현상과도 맞물린 탓이었다. 그 과정에서 TV 가요 프로그램들이 순위 매김 방식에서 다 함께 즐기는 무대 형식으로 속성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별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시대가 변했다.



2010년대

2010년대 소비자들은 여전히 좋은 음악을 원했고, 확장된 가요 시장에서의 진짜 1위를 궁금해했다. 차트는 음원을 기준으로 음악 플랫폼에서 재편되었다. 스트리밍 횟수, MP3 다운로드 횟수 등으로 1위가 정해졌다. 멜론 차트 100위 안에 든다는 것은 인기가 있다는 방증이었다. 멜론 차트 1위는 잠깐이라 하더라도 20세기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방송 출연을 하지 못해도 사람들이 많이 듣는 곡을 낸 가수라면 누구라도 1위를 할 수 있었다. 재발견된 노래는 역주행의 영광도 맛보았다. 이 시스템은 기존의 매체보다 공정해 보였다. 


그러나 소비자가 소규모 공연만 하거나, 크라우드 펀딩으로 앨범을 발표하거나, 매체 출연의 기회를 얻지 못한 가수의 명곡을 일일이 찾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찾아보기에 대중의 삶은 너무 바빴다. 이때, 알아서 '인정받은, 가치 있는, 인기 있는' 노래를 인기 차트라는 이름으로 세팅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예전 TV 가요 프로그램이 가졌던 권력을 거의 완전히, 음악 플랫폼이 넘겨받았다.


안타깝게도 안정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TV에 비해 기회의 장인 줄 알았던 인터넷에서 오히려 더 좁은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가요는 대중을 만나는 게 더 어려워졌다. 대중도 가요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매 시간마다 갱신되는 100곡 리스트 외에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곡은 많지 않았다. 음원 사이트에서 지정하는 신규 앨범 추천, 해외 인기곡 순위, 장르별 순위, 세대별 순위 정도. 검색은 가능하지만 모르는 노래를 검색할 수가 있던가. 가수와 가요는 30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양적 성장을 이루었는데 결과적으로 대중이 들을 수 있는 가요는 그만큼 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주객은 전도되고 말았다. 멜론 차트 100위 안에 들지 못하면 실패였다. 1위를 하지 못하면 성공이 아니었다.


몇 년 전, 개인적으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던 어느 가수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아 있다. 아무리 좋은 음악을 만들어도 사람들 귀에 들려주기까지가 너무 힘이 든다고. 나는 그 사람을 만나보기 전부터 그의 음악을 즐겨 듣고 있었다. 오래 활동해주기 바랐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2020년, 그 이후

2020년, 내가 만났던 어느 가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 때문에 가요 시장은 지금 굉장히 시끄럽다. 기존 매체에 비해 공정함을 무기로 힘을 얻었던 음원차트가 힘을 잃어버렸다. 1위가 1위가 아니고, 99위가 99위가 아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차트에 없으면 사람들이 찾아 듣지를 않으니 사재기를 해서라도, 혹은 마케팅을 가장한 교묘한 수법을 이용해서라도 차트인을 우선시했던 결과다. 화나고 안타깝다. 지난해 말 차트 조작과 관련해 여러 이슈가 터졌는데 잘잘못을 명확하게 가를 수 없는 상황일까 봐 그게 더 걱정된다. 무서운 건 이게 단순히 가요 시장에 그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중요한 만큼 그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좋을지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다. 주요 음악 플랫폼들은 현 문제에 관한 대책을 발표했다. 그들의 영업장에서 일어난 일이니 그들도 대책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스트리밍에 관해 좀 더 검증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내놓은 대책은 좀 허무하다. 너무 당연한 대처법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현 시스템이 유지되는 이상 그 안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난 현재의 스트리밍을 대체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판의 문제다. 어차피 소유의 시대가 가고 접속과 이용의 시대가 왔다면, 구독 경제의 시스템을 따르면 좋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음악 플랫폼을 소비자가 월정액권으로 구독하는 형태이기는 하다. 그것과는 좀 다른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가수가 직접 자기 채널을 운영하면서 콘텐츠 발표를 하되, 음악 플랫폼은 소비자가 모든 채널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실 유튜브 형식이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 속에 또 어떤 식으로 거래가 오갈지는 모르는 일이나, 적어도 모든 목록을 공개한다는 조건이라면 창작자의 가능성을 아예 닫는 방법은 아니다. 검증이 강화된다는 전제 하에 개인 맞춤형 추천 리스트나 인기 차트 순위는 유지해도 좋다. 소비자도 편리하고 궁금하니까. 다만 생산자의 기회를 늘리고 소비자의 선택권 영역을 넓혀 줬으면 하는 것이다.


음악의 매력은 듣는 데에 그치진 않는다. 다른 콘텐츠와 접목될 때 더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다. 그 가치에 주목해 몇몇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 음악을 제공하고 있다. 나도 영상에 사용할 무료 음원을 찾아보다가 그런 채널을 여럿 발견했다. 출처(저작자, 제목, 링크) 표기만 하면 상업적으로 음원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쓰여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처음 발견한 곳은 외국 채널이었다. 내가 영어 해석을 잘못한 건가? 공짜로 쓰라고 음악 다운로드하는 링크를 떡하니 올려놓다니? 난 불법 다운로드는 근절되어야 하고 음악이란 오로지 '듣기'만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기를 지나온 소비자였다. 


무료 음악을 제공하는 채널들은 '널리 사용해 달라'라고 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고퀄리티의 음악은 일단 감사히 잘 쓰고 나서 그 채널을 여기저기 좀 둘러봤다. 작곡가들은 주기적으로 작곡을 해 업로드를 한다. 그 음악을 사용하기 위해 찾아 듣는 사람들이 영상으로 된 음악 콘텐츠를 감사한 마음으로 재생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호의적인 댓글을 단다. 무료 음악은 또 다른 창작자의 콘텐츠에 사용되고, 그 채널을 구독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음악이 마음에 든 사람들이 링크를 타고 원작자의 채널로 유입된다. 그렇게 선순환이 반복된다. 


작곡가들은 그럼 뭘로 돈을 버나? 당연히 일단은 유튜브 광고 수익일 것이다. 채널에서 적정선으로 정산만 잘 해준다면 노래가 널리 알려질수록, 재생수가 늘어날수록 수익은 늘어난다. 그러다 특정 작곡가의 음악 스타일이 마음에 든 소비자는 그 사람을 검색해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선순환의 파이가 커지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중간 유통의 단계를 거치지만 창작자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당연히 이 구조를 모든 음악에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드러나지 않은 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창작자가 주축이 돼 지속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발상의 전환 사례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생태계를 해친 자들에 대중이 크게 분노한 건, 내가 지불한 양심적 비용이 엉뚱한 데에 쓰였기 때문이다. 요즘 소비자들은 자신이 윤리적 소비자이기를 원한다. 또, 좋은 콘텐츠를 만든 생산자가 정당한 수익을 얻어 다음 콘텐츠를 만들 동력을 얻길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판(板)을 깨버린 자들을 걸러내는 것, 그 이상으로 새로운 판이 필요하다. 수익구조를 좀 더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음 가요 시장의 주축은 이 지점을 해결할 존재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다만, 아직은 그 존재의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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