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양희 Oct 15. 2020

144일의 승부, 감독들은 피가 마른다

[야구가 뭐라고] 스트레스에 쓰러지는 감독들

승부가 끝났다. 온갖 작전을 폈지만, 오늘도 졌다. 연패가 꽤 길어진다. 고개를 푹 숙이고 더그아웃을 빠져나왔다. 불면의 밤이 깊어간다. 경기를 복기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 밥은 모래알 같다. 목 안으로 넘어가지를 않는다. 그리고, 24시간도 채 지나기 전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왔다. 휑한 눈으로 줄담배를 피우면서 이길 방법을 짜냈지만 도통 경기가 풀리지 않는다. 1승을 갈구하던 염경엽(52) SK 와이번스 감독은 그렇게 쓰러졌다. 지난 6월25일 경기 도중 벌어진 일이다. SK는 당시 7연패 중이었다. 


염 감독은 두 달여간 몸을 추스르고 9월1일 핼쑥해진 얼굴로 팀에 복귀했다. 65일 만이었다. 하지만 5일 뒤 다시 응급실로 갔다. SK는 8월28일부터 연패에 빠져 있었고 염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은 뒤에도 연패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SK의 연패는 염 감독이 잔여 시즌 지휘봉을 박경완 수석코치에게 넘기고 창단 첫해(2000년) 기록한 구단 최다 연패 타이기록(11연패)을 세울 때까지 이어졌다. 


지난 시즌 압도적인 1위를 질주하다가 막판에 삐걱대면서 정규리그 마지막 날 두산 베어스에 1위 자리를 내준 충격파가 올 시즌 내내 염 감독이나 SK 팀 모두 수렁에 빠뜨렸다. 선발 원투펀치였던 김광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앙헬 산체스(요미우리 자이언츠) 등의 물리적인 이탈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인 패배감이 시즌 내내 팀을 잠식했다.  


염경엽 감독은 휴대폰 문자를 통해 “지도자 생활 20년 동안 열심히 해서 얻은 것들이 허무하게도 1년 만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라면서 “몸 상태가 최악이어서 일단 추스르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마음을 전했다. “이겨내려고 해도 지금은 너무 많이 힘들다”라며 아픈 속내도 함께 털어놨다.


 후배에게 밀려 현역 은퇴 뒤 캐나다 이민까지 생각했으나 마음을 다잡고 들어선 지도자의 길. 국내외 야구 관련 서적은 손수 번역을 맡기더라도 전부 다 읽고 새벽까지 야구장에 남아 전략, 전술을 고민하던 그였다. 현대 유니콘스 스카우트, LG 트윈스 운영팀장,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 감독, SK 단장 등 그동안 거칠 것 없던 행보였다. 지도자 데뷔 이후 자신도 믿기 힘든 최악의 시즌을 겪으며 받은 스트레스는 그의 영혼을, 그의 몸을 갉아먹었고 종국에는 그를 야구장에서 무릎 꿇렸다.  


염경엽 감독의 경우처럼 프로야구 사령탑만큼 스트레스가 극심한 직업도 없다. 여타 프로 스포츠 감독과 비교해도 그렇다.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등은 보통 1주일에 1~2경기만 치른다. 패배 뒤에도 팀을 추스를 시간이 있다. 하지만 야구는 아니다. 1주일에 6번, 144일 동안 144경기를 치르다 보니 매일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낸다. 한 번 삐끗하면 연패의 수렁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경기시간이라도 짧으면 모를까. 평균 3시간9분(2020시즌 9월14일 기준·연장전 포함)동안 투수의 투구 하나, 야수의 타석 하나에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하다 보면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은 기본이다. 긴장된 순간마다 입을 꽉 다물고 있다 보니 이 또한 성할 리 없다. 1995년, 2001년 두산 베어스 우승,  2009 세계야구클래식(WBC) 준우승 등을 일궈냈던 김인식 전 감독은 그래서 일찍부터 틀니를 사용했다. 2004년 말에는 뇌경색 증세로 쓰러지기도 했다.


불면증이나 만성 소화불량, 위경련 같은 고통은 약과다. 김경문 현 국가대표 감독은 NC 다이노스 사령탑 시절인 2017년 7월 구토와 함께 어지럼증 증세로 병원을 찾았다가 뇌하수체 양성 종양 진단을 받았다. 김기태 전 KIA 타이거즈 감독은 시즌 때면 항상 눈 실핏줄이 터져 선글라스로 이를 가리고는 했다. 고 김명성 롯데 자이언츠 감독처럼 급성 심근경색으로 유명을 달리(2001년 7월24일)한 경우도 있었으니 성적 스트레스가 상상 그 이상이다.


 1, 2군 90여 명의 선수단을 통솔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1군만 해도 엔트리에 든 28명 선수들(확대 엔트리 때는 33명)의 몸 상태와 심리를 일일이 파악해야 하고 적시 적소에 이들을 기용할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가뜩이나 수억대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요즘에는 선수단과의 소통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곧바로 성적으로 티가 난다. 


 선수단뿐만 아니라 구단 수뇌부와도 암암리에 신경전이 계속된다. 성적이 좋을 때는 그나마 낫지만, 성적이 나쁠 때는 원인을 다투느라 삐걱댈 수밖에 없는 것이 감독과 단장, 사장 관계다. 여기에 코칭스태프와의 내부갈등까지 불거지면 감독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진다. 성적이 나지 않을수록 구단 내 암투는 심해지고 감독은 고립된다.


 매일의 전투를 치르면서 녹초가 된 몸과 마음을 술 한 잔으로 푸는 것도 이젠 옛말이다. 요즘은 보는 눈이 많아져서 바깥에서 술자리를 갖는 것이 꺼려진다. 대패한 날은 숙소 근처 음식점에 가는 것마저 주위 눈치가 보인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온라인 커뮤니티의 반응이나 댓글도 허투루 넘길 수가 없다. 팬들 사이에서 한껏 명장으로 추켜세워지다가 하루아침에 졸장 대우를 받기 일쑤기 때문이다. 심할 때는 가족에 대한 위협이나 협박성 발언이 날아오기도 한다. 팀 성적이 좋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이지만 팀 성적이 나쁠 때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직업이 바로 프로야구 감독직인 셈이다. 


 원로 감독들은 “패배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충고하지만 사실 감독들에게 내일은 없다시피 하다. 순위, 승패에 더 민감해진 요즘에는 여론에 떠밀린 사령탑 중도 사퇴가 일상화됐다. 양상문 전 롯데 감독만 봐도 그렇다. 그는 지난해 부임 뒤 단 한 시즌도 못 채우고 반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다년 계약을 했더라도 두 발 제대로 뻗고 잘 수 없는 게 프로야구 감독들의 숙명이 됐다. 


 비단 KBO리그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감독들도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염소의 저주'를 푸는데 일조한 테리 프랑코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이다. 그는 올해 위장질환 때문에 더그아웃을 자주 비웠고 최근에는 관련 시술까지 받았다. 2017년에도 부정맥 때문에 카테터 절제술을 받아 한동안 경기장 밖에서 휴식을 취한 적이 있다. 


 매 경기, 매 순간 선택에 내몰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물을 곧바로 받게 되는 프로야구 감독들. 칭찬과 비난의 갈림길에서 그들은 수면제를 먹고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며 야구장으로 간다. 그들에게 야구는 '그깟 공놀이'가 아니다. 


**이 글은 지난 9월 <시사저널>에도 실렸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카르페 디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