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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Nov 05. 2018

베테랑의 가을은 누구보다 붉다

박정권이 사는 법

첫째 아이의 태명은 ‘홈런’이었다. 부부 사이에 이견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홈런’이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그의 홈런 수도 늘어났다. 그게 9년 전의 일이다. 아이는 이제 9살이 됐다. 그 또한

20대 팔팔한 나이였다.


 박정권(37). 왕조시대를 기억하는 SK 와이번스 팬들에게는 아련한 이름이다. 2018시즌 동안 잠시 잊힌 이름이기도 했다. 6월 잠깐 1군에 동행했던 그는 10월 시즌 마무리에 다시 1군에 모습을 보였다. 1군 경기 출장 수는 겨우 14차례. 타율은 0.172(29타수 5안타)에 불과했고 홈런도 2개뿐이었다.


 팀도, 팬도 그의 은퇴를 머릿속에 그렸다. 10월의 부름은 그의 마지막을 위한 배려라고도 생각이 됐다. 그 또한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군에서 기약 없이 20대 초반 후배들과 함께하면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그였다. 오죽하면 넥센 히어로즈와 치른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경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뒤 “시즌을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으니까 스스로 ‘쓰담쓰담’ 해주려고 했다”고 말했을까. 그는 시즌 중반에 그의 응원가에서 이름을 착안해 송도에 음식점(천하무적)을 내기도 했다. 은퇴 뒤를 위한 준비였다.  



 사실 박정권에게 포스트시즌 엔트리 문턱은 높아 보였다. 시즌 2할대 이하의 타율을 가진 선수를 가을야구에 기용한다는 것은 자못 모험일 수 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 엔트리가 지난해부터 30명(경기 출전은 28명)으로 늘어난 게 컸다. 경기 출전 여부와 상관없이 팀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선수를 포함시킬 수 있게 여유가 생긴 것이다. 만약 엔트리가 28명이었다면? 아마 박정권은 이 가을을 즐길 수 없었을지 모른다.  


 트레이 힐만 SK 감독은 그의 포스트시즌 49경기 출전 경험을 높게 샀다. 가을야구는 전력, 체력과 더불어 정신력 싸움이고 SK 왕조를 경험했던 산 증인이기도 한 박정권이 김강민과 더불어 더그아웃 리더로 어린 선수들을 다독여주길 기대했다.


 그리고, 그는 플레이오프 1차전(10월27일) 8-8인 상황에서 9회말 2사 후 끝내기 투런 홈런을, 한국시리즈 1차전(11월4일) 6회초 1사2루서 결승 투런 홈런을 터뜨렸다. 2009년, 2010년의 가을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의미 있는 ‘한 방’이었다. 그의 몸짓은 ‘나는 아직 여기 그라운드 위에 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가을야구에서 꼬인 경기 매듭을 풀어줄 베테랑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주는 홈런이기도 했다.


 정규리그 통산타율(0.274)보다 포스트시즌 타율(0.319)이 더 높은 그는 말한다. “가을야구가 재미있다”고. “정규시즌처럼 다음이 있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즐기려고 한다”고. “야구장에 나와 있는 것 자체가 좋다”고...젊은 선수들과 달리 이 가을 다음의 야구는 기약할 수 없기에 그는 지금 이 순간에 온 마음, 온 체력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홈런이 아빠’의 홈런에 SK 팬들이 더 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누군가에게는 처음인,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일 수도 있는 가을야구 무대. 베테랑의 의미를 되물으면서 늦가을의 그라운드가 점점 붉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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