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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Nov 13. 2018

SK 우승 길은 뜨거운 이별 길이었다

비룡 군단이 떠나는 힐만 감독에게 안긴 마지막 선물

한국시리즈 2차전 패배 뒤 남편은 무릎까지 오는 긴 검은 패딩을 차 안에 처박아 뒀다. 11월 야간경기는 추울 텐데도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유는 “경기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없던 징크스도 만드는 포스트시즌이다.


 4차전에서 역전패를 당한 뒤에는 모 음식점으로 호출됐다.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졌을 때와 똑같았다. 하긴 시즌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경기에 패해서 다음날 반드시 이겨야 한다면 늘 찾아가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플레이오프 5차전도, 한국시리즈 5차전도 승리했다. 한국시리즈 5차전이 끝난 뒤 남편이 카카오톡으로 보내온 사진은 그 음식점 전경이었다. ‘승리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온 우주의 기를 모아 우승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SK로서는 이번 포스트시즌이 ‘이별여행’과 다름없었다. 트레이 힐만 감독은 시즌이 끝나기 전 이미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라고 선언했다. 계모가 치매에 걸렸고 계모를 돌보느라 부친 또한 몸이 썩 좋지 않았다. 가정적인 힐만 감독이 미국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4 시즌 동안 SK 선발 로테이션을 든든히 지킨 외국인 투수 메릴 켈리와도 포스트시즌 뒤 작별할 가능성이 다. 지난해부터 켈리는 메이저리그 진출 꿈을 품어왔다. 실제 켈리가 등판할 때마다 여러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경기장을 찾아 그를 지켜봤다.  


 어쩌면 모든 순간이 이별의 과정이었다.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9-4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넥센 히어로즈 박병호에게 9회초 극적인 동점 홈런을 맞았을 때 SK의 기는 꺾이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보통의 팀이라면 허탈감에 와르르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SK는 10회초 1점을 먼저 내주고도 10회말 김강민-한동민 백투백 홈런으로 플레이오프를 끝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간절함이 경기를 뒤집었다. 그대로 끝났다면 플레이오프 5차전이 힐만 감독의 마지막 한국 무대 경기가 됐던 터였다.


 한국시리즈만 해도 그렇다. 플레이오프 끝장 승부로 김광현, 켈리를 한국시리즈 1,2차전에 낼 수 없어 SK의 우승은 한낱 신기루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두산은 린드블럼-후랭코프 원투펀치가 건재했다. 하지만 SK는 잠실에서 1승1패 균형을 이루더니 홈구장에서 2승1패로 시리즈를 앞서 나갔다.


 그리고, 다시 잠실로 돌아와 9회초 2아웃 이후 시리즈 내내 1안타(15타수)만 기록했던 최정이 ‘홈런공장 공장장’ 위용을 뽐내면서 동점의 균형을 만들어냈다. 가까스로 끝내기 패 위기를 벗어난 13회초에는 한동민이 큼지막한 타구를 잠실 외야석 상단에 꽂았다. 플레이오프를 끝내는 홈런을 쳐냈던 주인공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홈런을 터뜨린 것. ‘야구의 신’ 말고 누가 이런 드라마를 쓸 수 있겠는가.

 우승으로 가는 길이 이별의 온도를 결정짓는 길이기도 했기에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온 우주의 기를 끌어 모아 승리를 바랐던 SK였다. 김강민 박정권 등 ‘SK 왕조’를 일궜던 베테랑들이 시즌 때의 부진을 씻고 가을야구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워 더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또한 작별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기에 더 악착같이 휘두르고 뛰었다. 수술 뒤 작년 시즌 통째로 쉬었던 에이스(김광현)는 올해 건재함을 알렸고 한국시리즈 6차전 13회말에 구원 등판해 최고 시속 154km 속구를 꽂아넣으며 화려한 귀환에 마침표를 찍었다. 비룡의 심장은 그렇게 뛰었다.

 실책 많고 잔루 또한 많던 포스트시즌 경기였다. 야구의 하향평준화를 보여준 것도 맞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의 명언을 상기시키며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내 간절함이 승부의 물줄기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 가을야구였다. 이별을 예고한 외국인 감독의 국내 마지막 경기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짓는 경기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전율이었으니까.  SK 선수단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이별 선물이었다. 이보다 ‘뜨거운 안녕’이 있겠는가.


 “포스트시즌 내내 미친 경기가 많았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마다 우리는 이겨내고 극복했다. 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야구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2년은 환상적이었다. 필드에 나간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축복이었다.”(힐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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