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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Jan 13. 2019

우등생도 편견에 희생된다

20세기 우등생에 대한 소회

조카가 수능시험을 봤다. 단 4개만 틀렸다고 했다. 국어 문제가 어려웠다고 하던데 조카 또한 국어의 난제를 넘지 못하고 국어 과목에서만 3개나 틀렸다. 그래도 4개만 틀리다니. 대단하기는 하다. 내가 다시 수능시험을 본다면 어떤 점수를 받게 될까. 하지만 그때나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 21세기 아이들은 20세기 아이들보다 더 똑똑해졌다.


학창 시절 나 또한 우등생이었다. 그래 봐야 4개 반 있는 시골 학교에서 1등 하는 수준이었지만 우등생 대우는 받았다. 잘한 일은 과대포장 됐고 못한 일은 축소됐다. 우등생 우대...같은 게 있던 것도 같다.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었고.


중학교 2학년 때였을까. 나는 역사 과목을 많이 좋아했다. 시험도 3번 연속 100점을 받았다. 그런데 4번째 시험이 문제였다.  시험을 마치고 혼자 하는 가채점으로 난 당연히 100점을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덜렁대다가 주관식 문제에서 관세동맹을 관세 조약으로 잘못 표기했다. 관세 조약이나 관세동맹이나 비슷하기는 하지만 세밀한 차이는 있다.


 그때 역사 선생님이 비수를 꽂았다. 어쩌면 하지 말았어야 할 말씀이었다.


"다른 학생이라면 맞았다고 했을 텐데 너라서 틀린 것으로 했다."


그의 말인즉슨, 우등생인 나는 정답 표기를 정확히 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콕 집어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역차별을 당한 듯해서 당시에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조약과 동맹의 차이로, 아니 우등생과 비우등생의 차이로 나는 96점을 받았고 그 이후로는 역사 공부를 대충 했다. 꽤 상처를 받았다. 요즘까지도 관세동맹이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상처가 꽤 컸던 듯하다.


우등생이기 때문에 봐줬던 편의가 독이 된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느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교단 앞으로 나를 불렀다. 논술 공책에 새빨갛게 표기된 부분을 가리키며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찾다'에 받침을 계속 'ㅊ'으로 쓰네."


나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찾다'를 "찿다"로 쓰는 줄 알았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아무도 나에게 '찿다'가 '찾다'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것이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때까지 거짓말 조금 보태 교내외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이란 상은 거의 받았던 나인데 어떤 누구도 받침이 틀린 사실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글 잘 쓰는 우등생이었으니 그저 한 두 번 실수를 한 것이라고 눈감아 줬던 것이다. 도대체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편의를 봐줬던 것인지. 아이는 받침 하나 제대로 못 쓰는데. 지금도 난 '찾다'라는 단어를 쓸 때면 괜히 예민해진다.


20세기 우등생의 삶은 편했다. 작은 실수는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이 눈 감아줬다. 어쩌면 우등생이기에 다시는 하지 않을 실수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또한 우등생에 대한 편견일 수 있는데 말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역사 선생님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우등생에게는 더 철저하고 엄격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우등생에 대한 편견과 예외적인 편의가 어쩌면 우등생을 더 망칠 수도 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엘리트들을 보면 더 그런 것도 같다. 누군가는 계속 'ㅈ' 받침 자리에 'ㅊ'을 쓰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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