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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May 04. 2019

LG, 두산의 잠실 동거는 현대 탓도 있다

어린이날 맞수의 시작

잠실야구장 내 구내식당. 점심시간에 이곳은 레드와 네이비 두 공간으로 나뉜다. 한쪽에는 네이비 점퍼를 입은 두산 베어스 직원들이 다른 한쪽에는 레드 점퍼를 입은 LG 트윈스 직원들이 차지하고 있다. 두 색깔이 섞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같이, 또 따로 이들은 점심,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 잠실야구장 1루 쪽에는 두산 베어스 사무실이, 3루 쪽에는 LG 트윈스 사무실이 있어서 그렇다. 이들 가운데는 잠실야구장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사무실이 있다. 이를테면 중립지역이라고 할까. LG, 두산 쪽에서 두 명씩 실무자를 파견하고 2년마다 번갈아 가며 대표직을 수행한다.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 1986년부터 지금껏 잠실야구장을 사이좋게 나눠 쓰고 있는 두 구단은 현재 KBO리그 최고 맞수로 통한다. 두 팀은 1996년부터 5월5일 어린이날이면 맞붙고 있는데 이날만 되면 긴장감이 팽팽하다. 두 팀 간 어린이날 전적은 2018년 기준 13승9패로 두산이 앞선다.


 두 팀이 국내 프로 구단들 중 유일하게 한 야구장을 나눠 쓰고 있는 데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야구는 1905년 질레트가 국내에 야구를 선보인 뒤 77년 만에 태동했지만 출범 초창기에는 야구단을 창설할 기업을 찾는 게 어려웠다. 맨 처음 참여의사를 나타낸 기업은 MBC, 삼성, 롯데 등 3곳밖에 되지 않았다.


 MBC는 독자적으로 프로야구 창단계획을 갖고 있던 터라 1순위로 창설의사를 밝혔고 알짜배기인 서울 지역을 품었다. 롯데는 부산, 삼성은 대구와 짝짓기를 성공 했는데 인천과 대전이 문제였다.


 인천 지역을 맡을 기업으로 맨 처음 접촉한 곳은 현대였다. 하지만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은 88올림픽 유치에 분주해서 프로야구 출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때 즈음 두산이 야구단 창단에 관심을 보였다. 박용곤 회장이 미국 워싱턴대에서 유학했던 경험상 프로야구가 기업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두산(전 OB)의 연고는 자연스럽게 대전 지역으로 정해졌다. “서울은 MBC, 인천은 현대로 확정됐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가 인천 야구팀 창단에 확실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자 상황이 달라졌다. 서울에 미련을 뒀던 두산이 ‘꿩 대신 닭’이라고 대전 대신 현대가 포기한 인천을 연고지로 요구하고 나섰다. 그럴 경우 다시 대전에 새로운 기업을 찾아야 했던 탓에 프로야구 출범 추진 팀은 서울의 선수자원에서 3분의 1(MBC 2, 두산 1의 비율로 신인드래프트)을 나눠주고 3년 뒤 연고지를 서울로 옮겨주겠다고 약속했다. 두산의 3년 뒤 연고지 이동에는 이미 서울을 확보한 MBC의 동의도 있었다. 그리고 1985년, 약속대로 두산은 대전을 떠나 서울로 입성했다. 두산팬들 중에 충청 연고의 팬이 꽤 되는 이유는 대전 3년동안 원년 우승 등 두산이 꽤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서울 두산(당시 OB)의 첫 홈구장은 동대문야구장이었다. 그러나 1986년 대한야구협회가 각종 아마추어 대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동대문야구장을 1년 내내 사용하겠다고 선언하며 두산은 떠돌이 신세로 전락할 위기에 몰렸다. KBO의 중재 아래 서울시, MBC와 함께 잠실구장 공동 사용문제를 협의했으나 MBC는 홈경기의 60%만 쓸 것을 두산에 제안했고 서울시는 잔디보호 차원에서 잠실구장에서 연간 108게임만 치를 수 있다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MBC와 두산이 잠실야구장을 공동 사용하되 1주일에 6게임을 치를 때는 잔디 보호를 위해 경기 시작 10분 전까지는 연습할 수 없다는 서울시의 제안을 수용, ‘한 지붕 두 가족’이 탄생했다. 물론 두 구단은 1주일 6경기를 치를 때마다 잠실야구장 외 홈팀, 원정팀 연습 구장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대한야구협회 발행 <한국야구사> 1237쪽 참고)


 1989년 말 MBC 청룡 야구단이 럭키금성으로 매각되며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LG와 두산(OB)이 맞수관계가 됐다. MBC 청룡 매각에는 진로유통, 한일그룹, 현대, 대우 등 그룹들이 인수 고민을 했는데 1983년부터 프로야구 가입을 강력히 원했던 럭키 금성이 새로운 서울의 주인이 됐다.


 럭키 금성 그룹 최초로 LG라는 이름을 사용한 LG 트윈스는 1990년 프로출범 9년 만에 최초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두산의 경우 프로 원년에 우승했으나 당시 연고지가 비록 임시였지만 대전이었기 때문에 서울 팀 최초 우승 기록은 LG가 갖게 됐다.


 두산과 LG는 전신 MBC 청룡 때부터 신인드래프트에서 신경전을 펼쳤다. 드래프트 지명권은 두산이 서울로 이전하면서 1:1로 바뀌었고 신인 우선 지명권은 맨 처음 동전 던지기(앞면은 OB, 숫자는 LG)에서 주사위 2개를 던져 합한 숫자가 많은 구단이 1차 지명권을 갖는 주사위 던지기로 바뀌었다.


 86년 동전 던지기로 박노준의 지명권을 얻을 때까지는 두산에 행운이 따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두산이 이긴 해는 89년(동전 던지기)과 98년(주사위 던지기) 단 두 번뿐이었다. 두산 구단 프런트가 합숙까지 하며 주사위 던지기를 맹연습해도 별무소용이었다. 주사위는 번번이 LG 편을 들어줬다.


 모기업이 한 번 바뀌기는 했으나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서울 지역을 연고로 했던 LG 트윈스나 창단 때부터 ‘서울’ 연고지를 확약 받고 3년간 타지생활을 했지만 모기업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두산이나 ‘잠실야구장은 우리 꺼’라고 주장할 명분은 충분하다. 최근에는 두산 성적이 LG 성적보다 나아 두산 팬들의 어깨가 더 으쓱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두 팀의 ‘불편한 동거’는 언제쯤 끝이 날까. LG가 90년대 중반 뚝섬에 돔구장을 지을 구상까지 했으나 축구 월드컵 등 여러 일이 겹치면서 유야무야됐다. 잠실야구장 신축이 계획돼 있는 상황에서 LG와 두산 모두 접근성이 좋고 1000만 팬의 잠재력이 있는 서울 연고지를 버릴 생각은 없다. “서울시가 임대료를 높게 책정하면 성남 등으로 연고지를 이전할 것”이라고 말하는 구단도 있으나 글쎄. 시즌 관중 100만명을 모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기 때문에 두 구단의 동거는 앞으로도 계속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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