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질링〉
비극을 대하는 영화의 윤리

by whocares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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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은 1928년 LA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실종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는 범죄물이라기보다는 수난극에 가깝다. 사건의 발단은 월터 콜린스라는 소년의 실종이다. 어머니 크리스틴이 경찰에 도움을 청하지만,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엉뚱한 아이를 데려와 그 아이가 월터라고 우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부인하는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킨다. 크리스틴은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서 풀려나지만, 그녀에게는 더 나쁜 소식이 전해진다. 근처 양계장에서 20여 명의 아이들이 살해되었고, 월터 또한 그곳으로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범인이 체포되고, 그에게는 사형이 구형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이 월터를 살해했는지를 자백하지 않는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아들이 살아있으리라는 믿음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물론 이것은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이지만, 이 영화의 윤리적 함축은 다소 평범하다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정의와 불의의 선명한 대립으로 읽힐 수 있다. 20여 명의 무고한 아이들을 살해한 노스콧은 논외로 치도록 하자. 경찰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서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존스 반장과 이에 협력하는 정신병원의 원장은 명백히 불의의 편에 속한다. 반면에 LA경찰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브리그랩 목사나 변호사는 정의의 편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구도는 이 영화가 비극을 윤리적으로 다루는지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많은 경우들이 보여주듯이, 영화가 어떤 윤리적 사실을 다루는지는 그 영화가 윤리적임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의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체인질링〉이 이 수난극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떤 점에서 윤리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우선 영화의 중반까지 벌어진 사건들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크리스틴은 경찰이 데려온 아이가 월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LA경찰의 존스 반장은 이를 묵살하면서 그녀를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이후 살인마 노스콧의 범죄가 발각되었을 때, 경찰은 역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 시점에서 경찰청장은 월터가 노스컷에게 살해되었음을 기정사실로 만들려 한다. 그에게는 사건을 질질 끄는 것보다 월터가 살해되었음을 공식화하고 사건을 종결하는 것이 더 유리했던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경찰의 처사는 잘못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사태를 재구성하려 한다. 먼저 각각의 인물이 주도하는 서사에 관해 생각해보자. 만일 월터의 실종이 하나의 서사라면, 그 서사의 종결은 월터의 구출이거나 구출의 실패,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존스 반장은 가짜 월터를 데려옴으로써 구출의 서사를 완성하려 한다. 존스 반장의 시도가 실패했을 때, 경찰청장은 월터의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서사를 종결시키려 한다. 반면에 크리스틴은 일관되게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다는 믿음을 견지한다. 월터가 살해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크리스틴은 아들이 살아있으며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존스 반장이나 경찰청장이 서사를 종결시키려 한다면, 크리스틴은 그 종결을 거부하는 것으로 대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이 대립을 언급하는 이유는, 〈체인질링〉에서 이것이 정의와 불의의 대립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후반부에서 정의의 편이라 할 수 있는 브리그랩 목사와 변호사는 서사의 종결을 받아들이는 편에 선다. 브리그랩 목사는 크리스틴에게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변호사는 공청회장에서 존스 반장을 맹렬히 공격하여 그의 파면을 이끌어내지만, 그 공격은 월터가 노스콧에게 살해되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물론 이들의 행위는 선의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들이 서사의 종결을 수용하는 방식 또한 존스 반장이나 경찰청장의 폭력적인 그것과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이 차이를 다소 약화시키는 두 장면이 존재한다. 변호사가 처음으로 크리스틴을 방문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그는 소아마비로 사망한 자신의 딸을 언급하며 크리스틴을 위로하려 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존스 반장이 보낸 사이비 아동 전문가가 크리스틴을 방문했던 장면을 닮아있다. 여기서 월터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는 변호사의 태도는, 경찰이 데려온 아이가 월터라고 단정하던 아동 전문가의 태도를 곧바로 연상시킨다.


물론 브리그랩 목사와 변호사는 크리스틴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베푸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월터가 살아있으리라는 크리스틴의 믿음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 국면에서도 크리스틴은 유일하게 서사의 종결을 거부하는 편에 속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에서 크리스틴과 브리그랩 목사 사이의 간격을 암시하는 장면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월터가 실종된 다음날 결찰이 크리스틴의 집으로 찾아오는 장면은 곧바로 브리그랩 목사의 설교 장면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월터의 실종이라는 개별적 사건과 LA경찰의 부패라는 일반론으로 시작되는 브리그랩 목사의 열변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있다. 브리그랩 목사는 정신병원에 감금된 크리스틴을 꺼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정작 크리스틴이 동일한 쇼트 내에서 자신보다 한발 먼저 병원을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브리그랩 목사는 길에서 실신할 뻔한 크리스틴을 붙잡아주지만, 이 짧은 스쳐 지나감은 결코 사소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브리그랩 목사가 정신병원에서 자행되는 부당한 처사를 바로잡는데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순간에, 크리스틴이 이미 그 계획의 외부로 빠져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번 더 강조하자면, 이 간격은 브리그랩 목사와 크리스틴이 서사 내에서 서로 갈등하거나 대립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이들의 관계는 시종일관 우호적인 것으로 유지되고 있다. 서사의 종결에 저항한다는 것은, 크리스틴이라는 인물의 내적 속성이라기보다는 이 인물이 영화의 서사 내에서 상대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나타내는 편에 가깝다. 그러니까 크리스틴은 이 영화에서 완결된 서사들의 사이, 혹은 외부에 존재한다. 앞에서 말했던 존스 반장이나 경찰청장의 서사뿐만이 아니라 브리그랩 목사의 서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브리그랩 목사는 LA경찰의 부패를 폭로하고 척결하려는 완결된 서사를 이미 가지고 있다. 그가 가진 선한 의지와는 별개로, 그의 서사는 완결되지 않는, 혹은 완결되어서는 안 되는 월터의 실종 사건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그러면 크리스틴은 월터의 구출의 성공이라는 완결된 서사의 주인이 될 수 없는가. 사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체인질링〉이 실화에 기초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언급했듯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1928년에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이다. 약간의 각색을 거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사건들은 실화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실존 인물인 크리스틴은 끝내 아들을 되찾지 못했다. 영화가 세부적인 수정을 가할 수는 있지만, 이 결말을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체인질링〉은 처음부터 딜레마를 안고 시작한 영화이다. 영화 전체의 서사를 본다면, 서사의 종결점은 월터의 구출이 실패하는 지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종결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월터를 기다리는 크리스틴의 간절함에 영화가 응답하는 것은 서로 상충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영화는 후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즉 영화는 크리스틴을 완결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들의 외부에 위치시키는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의 결과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크리스틴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월터의 실종 사건일 것이다. 그 외의 사건들, 예를 들어 크리스틴의 정신병원 탈출이나 LA경찰의 부패 척결은 이보다는 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체인질링〉이 월터의 실종 사건을 다른 사건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이 다른 사건들이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을 살펴보자. 〈체인질링〉에서 대부분의 사건들은 긴장과 이완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에 크리스틴이 가짜 월터를 만나는 장면에서 촉발되는 긴장은, 후반부에 가짜 월터가 진짜 엄마를 만나는 장면으로 해소된다. 물론 이 ‘진짜’ 엄마가 정말로 아더의 엄마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적어도 이 두 장면은 긴장과 이완의 형식을 구축하고 있다. 또한 경찰서에서 존스 반장이 크리스틴을 위압적으로 몰아붙이는 장면은, 나중에 그가 공청회장에서 변호사의 심문을 받고 파면되는 장면으로 되돌려진다.


크리스틴이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풀려나는 일련의 장면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정신병원에서 자행되는 폭력의 상황은 법원의 명령으로 환자들이 모두 석방되는 것으로 종결된다. 혹은 이 장면이 서사적인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장면들은 〈체인질링〉 내부에서도 두드러지게 일목요연한 서사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크리스틴은 이곳에서 새로운 조력자(캐롤)를 만나고, 치료를 빙자한 전기고문을 받을 위기에 처하며, 때마침 나타난 브리그랩 목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정신병원에서 풀려난다. 이것은 각색의 과정에서 극적인 요소가 가장 많이 더해진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체인질링〉은 월터의 실종 사건을 방금 언급한 사건들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건에 관한 한 서사적 완결성을 보여주는 형식을 발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이 월터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월터를 찾기 위해 크리스틴이 집 안을 돌아다닐 때, 영화는 이상하게도 이들 모자가 평온했던 날들의 음악을 들려준다. 카메라는 상황의 급박함을 강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완만한 움직임으로 크리스틴의 뒤를 따른다. 한마디로 〈체인질링〉은 이 상황에 어울릴 법할 긴장을 영화에 도입하지 않는다. 영화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이것은 언젠가 해소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실화이고, 영화는 크리스틴이 아들을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는 여기에서 긴장을 도입하는 대신에 이 장면을 슬픔의 정서로 채우고 있다. 혹은 이 지점에서 영화가 이미 크리스틴을 위로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체인질링〉은 월터의 실종 사건에 관한 한 서사화를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영화이다. 서사의 완결성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리한 선택이었을 테지만, 영화는 이 불리함을 감수해나간다.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주로 앞에서 말한 정신병원의 탈출극과 같은 부수적인 사건들에 의해서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크리스틴에게 있어서 월터의 실종 사건은 진행된다기보다는 제자리를 맴도는 편에 가깝다. 영화의 후반부는 크리스틴의 일상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같은 전화국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아들의 행방을 찾는다. 굳이 표현한다면 크리스틴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는 시간이다. 영화는 월터를 되찾으려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크리스틴의 시간을 서사로 전개하여 직선으로 펼치기를 삼간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크리스틴을 완결된 서사의 외부에 위치시킨 것과 정합적인 선택일 것이다. 이것은 비극을 대하는 영화로서의 〈체인질링〉이 보여준 하나의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경찰서를 나서는 크리스틴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나는데, 그 위로는 사건의 경과에 관한 자막이 떠오르고 있다. 실화에 기초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점까지 밝혀진 사실들을 관객에게 전달하곤 한다. 그러나 2008년에 발표된 이 영화는 크리스틴이 아들을 만나지 못한 채 1964년에 세상을 떠났음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의 자막은 다만 “크리스틴 콜린스는 아들을 찾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라고 언급할 뿐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도 사건을 완결된 것으로 다루는 대신에, 이 기다림이 지속되는 시간을 존중하는 편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글을 마치기에는 해결해되지 않은 장면이 남아있다. 물론 그것은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노스콧의 사형이 집행되는 장면이다. 만일 이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 말한다면, 이 장면을 외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먼저 장면을 생각해보자. 집행장에 끌려온 노스콧이 사형대의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간다. 패닉 상태에 빠진 채 헛소리를 하는 노스콧의 머리에 두건이 씌워지고 목에는 밧줄이 걸린다. 마지막 순간에 노스콧은 캐롤을 부르지만, 노래가 끝나기 전에 그의 몸은 허공에 매달리고, 그의 몸부림이 멈추었을 때 의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크리스틴을 비롯한 피해자의 유족들은 이 모든 과정을 그 자리에서 지켜본다.


이 장면은 영화의 윤리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되었던 하나의 주제를 곧바로 소환하고 있다. 그것은 재현의 윤리이다. 노스콧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인이지만, 영화가 한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즉, 이 장면은 재현의 윤리를 정면으로 거스른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영화가 그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더라면 이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형 집행의 현장에서 그의 죽음을 세부적으로 화면에 담는 편을 택하였다.


나는 〈체인질링〉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라는 사실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이 장면이 설명되거나 납득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종종 자경단 서사로 분류되는데, 여기에는 공권력의 부재를 대신하여 사적인 복수를 수행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체인질링〉에서 노스콧의 죽음은 공권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일 영화가 그의 죽음을 그저 언급했더라면 그렇게 읽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면이 담고 있는 그 과정의 세세함이나, 이 장면으로부터 우리가 받게 되는 불편함의 정도는 단순한 공권력의 집행을 초과한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노스콧의 죽음에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 장면을 지배하는 영화의 시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이 장면의 시간은 형이 집행되는 사건의 시간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다. 마지막 순간에 집행관들은 시계를 확인하며 눈짓을 주고받은 다음 가차 없이 레버를 당긴다. 노스콧은 캐롤을 부름으로써 자신의 시간을 연장하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노스콧을 죽이는 영화의 수단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영화가 크리스틴에게 순환하는 시간을 부여했다면, 여기에서는 반대로 노스콧에게 직선의 시간을 부여하여 그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 즉, 이 장면에서 영화는 부분적으로나마 노스콧에게 사적인 복수를 수행하는 주체이다.


그러면 영화는 재현의 윤리에 관한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재현의 윤리에 둔감했으리라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자경단 서사에 등장하는 복수자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복수자는 정의를 수행하는 주체이지만, 그 행위의 과정에서 도덕적인 우위를 점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복수는 살인에 관한 규율의 위반일 수밖에 없으며,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복수자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의 영화에서 이것은 복수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만일 〈체인질링〉이 노스콧에 대한 복수를 수행하는 주체라면, 영화는 재현의 윤리를 어기는 것을 감내해야 했을지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가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누군가는 영화의 이러한 선택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복수를 수행하려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금 더 예를 들어보겠다. 노스콧에 사형대에 올라갔을 무렵, 영화는 그의 시점 쇼트로 그가 죽게 될 자리를 바라본다. 여기서 노스콧의 시점 쇼트가 사용된 이유가,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데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영화를 오해한 것이다. 이 시점 쇼트는 노스콧이 그 자리에서 교수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서 시점 쇼트는 노스콧을 사형대의 자리에 결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방금 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글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체인질링〉은 노스콧에 대한 복수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영화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아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다른 안전하거나 편리한 방법은 없었다고 답할지 모르겠다. 앞에서 말했던 크리스틴의 서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서사로 담아내어서는 안 되는 지점을 지켜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화가 크리스틴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낸 최선의 방식일 수 있다. 이 복수나 위로가 영화 속의 어떤 인물에 의해 수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체인질링〉은 영화가 이를 어떻게 대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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