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Keep your place.

by whocares

〈마스크〉(1994)가 짐 캐리의 영화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영화의 감독은 척 러셀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초록색 가면을 뒤집어쓴 짐 캐리의 모습일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짐 캐리는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마스크〉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였다. 우연히도 집에는 〈마스크〉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는데, 나는 심심할 때면 이 영화를 돌려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 〈마스크〉에 관해서 주로 언급된 것은 짐 캐리의 코믹 연기와 CG에 힘입은 특수효과 정도였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마스크〉는 90년대의 평범한 상업 영화이고, 특별히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서 짧게 언급하려는 이유는 이 영화의 결론에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마스크〉의 스토리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평범한 은행원인 스탠리 입키스(짐 캐리)는 우연히 초인적인 힘이 봉인된 마스크를 줍는다. 마스크를 쓰면 초인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스탠리는 은행을 털어 돈을 마련한 다음 상류층이 출입하는 클럽에 나타나 소동을 일으키고 여가수 티나(카메론 디아즈)를 유혹한다. 한편 지역 갱단의 일원인 도리안은 스탠리에게서 마스크를 빼앗은 다음 보스를 제거하고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려 든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된 스탠리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고 티나의 도움으로 마스크를 되찾은 다음 도리안을 처치한다. 사건이 끝난 뒤 스탠리는 마스크의 힘을 빌리지 않기로 결심하며 그것을 강물에 던져버린다.


스탠리는 초능력을 사용해 행복을 얻기를 포기하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진부하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이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마스크〉가 히어로 무비가 아니며, 이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탠리는 마스크의 힘을 처음 발견했을 때 뒷골목의 불량배들을 혼내준 다음 선언 조로 “세계 평화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덧붙인 다음, 자동차 정비소를 찾아가 자신에게 바가지를 씌운 정비공들에게 복수한다. 이후에도 스탠리는 은행을 터는 등 마스크의 힘을 주로 자신의 필요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용한다. 여기서 마스크를 인간의 감추어진 욕망을 드러내는 도구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마스크를 쓰는 순간 스탠리가 완전히 다른 인격을 갖게 되는 보인다는 점, 또한 마스크가 오직 밤에만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명백히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명시적으로 영화가 의도하는 해석인 동시에 지나치게 일반적이다. 그보다 여기에서는 마스크를 통해 드러나는 스탠리의 욕구나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우선 〈마스크〉의 초반부는 스탠리가 처한 여러 곤경을 보여주는 데 할애된다. 그는 은행의 말단 영업 사원으로 일하는데, 그의 상사는 재수 없는 지점장의 아들이다. 그는 비좁은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집주인의 잔소리에 시달린다. 정비소에서 그는 바가지를 쓰고 고철에 가까운 차를 렌트받으며, 상류층이 출입하는 클럽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물웅덩이에 던져지는 신세가 된다. 이 모든 곤경은 스탠리의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해서 발생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것은 스탠리가 속한 계급이 무엇인지의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스탠리가 마스크의 힘을 어디에 사용하는지를 본다면 이것이 계급의 문제임은 보다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이 스탠리는 마스크의 능력을 알게 된 직후 정비소를 찾아가 정비공들에게 복수를 한다. 정비공들로부터 형편없는 서비스를 제공받았을 때의 스탠리의 처지는 블루 칼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맨 하층 화이트 칼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정비공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블루 칼라에게 위협받은 화이트 칼라로서의 입지를 다시 회복하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도전을 물리친 것이라면, 이제 그는 자신의 위치로는 가질 수 없던 것들 것 얻어나가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자신이 일하는 은행 지점의 금고를 털어 돈을 마련한다. (지점장의 아들은 이미 이 돈을 사적으로 유용해왔음이 나중에 언급된다.) 그런 다음 출입을 거부당했던 클럽에 찾아가서 돈을 뿌리면서 입장하고, 클럽의 가수 티나를 유혹한다. 한편 이 모습을 본 도리안은 마스크의 정체를 추적하고, 마침내 마스크를 빼앗아 그 힘으로 갱단 보스의 자리에 오른다. 영화의 후반부에 스탠리와 도리안은 마스크를 놓고 대결하는데, 이 대결을 전형적인 선악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비록 마스크를 썼을 때 스탠리가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변하고 도리안은 흉측한 파충류의 모습을 하게 되지만 이러한 겉모습의 차이는 오히려 미혹에 가깝다. 애초에 도리안은 은행의 돈을 놓고 스탠리와 경쟁했으며 – 스탠리가 은행을 털 때 도리안도 같은 지점을 털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스탠리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 나중에는 누가 티나를 차지할지를 놓고 경쟁한다. 스탠리가 마스크를 통해 계급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처럼, 도리안 역시 조직 내에서 지위 상승을 노린다. 여기서 어느 한쪽이 상대적으로 더 소박하거나 덜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 두 사람의 욕망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이제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스크를 되찾은 스탠리는 도리안의 계획을 분쇄한 다음 티나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서 스탠리는 마스크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강물에 던져버린 뒤 티나와 키스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결말처럼 보이지만 무언가 꺼림칙함이 남는다. 이상한 점은 이 영화에서 원래의 자리를 벗어나려는 인물의 시도가 모두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스탠리와 도리안이 그랬고, 마스크와 관련된 소동을 해결하여 승진하기를 원했던 캘러웨이 경위의 희망 또한 수포로 돌아간다. 어떤 점에서 〈마스크〉는 이러한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듯하다. 나아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스탠리가 마스크를 포기하는 것을 교훈적인 선택인 것처럼 묘사한다. 여기서 스탠리는 원래 자신의 계급, 즉 화이트 칼라의 맨 아래층으로 순순히 되돌아간다. 물론 그는 티나를 얻었다. 그러나 여기서 티나는 스탠리의 자발적인 포기에 대해서 제공된 일종의 보상처럼 보인다. (덧붙여서 티나가 전리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그녀가 이 영화에서 철저하게 눈요기거리로 활용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다.)


한마디로 〈마스크〉는 〈설국열차〉에서 메이슨이 한 연설의 한 대목, “know your place, keep your place”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영화이다. 사실 이것은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민망하게 여겨질 만큼 단순하고 투박한 태도이다. 그러나 다른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말하도록 하겠다. 이 영화는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뿐, 그 이외의 문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영화를 살펴보면, 배경이 되는 도시가 부패와 무능에 시달리고 있음이 곳곳에서 암시된다. 지역 갱단이 주관하는 클럽의 자선 행사에 시장은 들러리처럼 참석하며, 캘러웨이 경위와 그의 부하는 부패하지는 않았으나 심각하게 무능하다. 그러나 영화는 체제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문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마스크는 오직 체제 내에서의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만 사용되며, 결국에는 그것의 포기가 일종의 교훈으로 제시된다. 이런 보수적인 태도를 영화를 감독한 척 러셀이나 각본가들이 의도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마스크〉는 별다른 정치적 고려 없이 만들어지는 상업 영화가 얼마나 보수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인 듯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체인질링〉 비극을 대하는 영화의 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