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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TA Mar 02. 2018

나를 좀 더 소중하게 아껴줄 걸

#일상後일담 / Me_Too

"아, 이렇게 말하는 것도 성희롱인가? 이러다 인사팀에서 연락 오는 거 아니야? 허허허"


말은 너무 가볍다. 너무 갑작스레 나타나, 금세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그때 가해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심지어 피해자도 가벼운 일상적 대화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 분위기였다. 주변 사람이었거나 피해자였을 내 기억 속에도 이젠 뚜렷이 남아있지 않다.


내가 회사를 다닐 때, 실제 어떤 부장이 성희롱 사건으로 권고사직을 당한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 그 정도 처벌이었다면 성희롱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야기가 회사에 돌자 모든 사람들이 그 부장과 피해자의 사진을 인트라넷에서 검색하며 가십 소재로 삼았고, "야, 나도 이러다 신고당하는 거 아니야? 너도 신고할 거냐?"하는 중년 남자들의 묘한 농담만 늘어갔다. 성희롱, 성폭력, 성폭행... 그렇게나 가벼운 이슈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아주 가볍게 다뤄지고 있겠지.


박민규 소설, <카스테라> 중에서



최근 일어나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온 나의 20대를 '무겁게' 되돌아보게 됐다. 처음 이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이 문제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실제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뉴스를 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모든 건 권력으로부터 시작됐다. 대학 때는 학과선배, 동아리선배였고, 입사해서는 과장님, 부장님, 팀장님, 기자님이었다. 특히 술을 먹으면 모든 게 쉬워졌다. 불쾌한 발언도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도 당연한 것처럼 행동했다. 대학 땐 뿌리치고 도망친 적도 있었지만, 회사 조직 내에서는 더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점점 나도 무뎌졌던 것 같다. 정말 무지했다. 아니, 무지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학과선배가 기자님, 팀장님이 되는 거고, 동아리 선배가 과장님, 부장님이 되는 거다. 20대 초반 학과선배, 동아리선배라는 그 작은 권력으로도 그런 '나쁜 짓'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황당하고, 동시에 사회생활에서 더 큰 권력을 갖게 된 이들은 얼마나 더 '나쁜 짓'을 쉽게 할 수 있었을지 짐작하게 된다. 지금 예술계에서 터져 나오는 얘기들은 가히 충격적이지만, 알고 보면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모두가 모른 척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뿐이다.


나도 모른 척했었다.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건 잘못된 거라고 내 옆에 있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조직생활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지만, 왠지 그 때의 나를 생각하니 억울하고 또 한편으론 반성하게 된다. '권력'에게 허용해주었던 성희롱 발언이라던가 나의 손이라던가 머리카락이라던가 허벅지라던가... 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그땐 도움이 될 것도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나에게 1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고, 1도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나를 좀 더 소중하게 아껴줄 걸 그랬다.  




마스다 미리,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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