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가 그랬듯이 <노매드랜드> 역시 주인공에게는 생계의 어려움이 기본값으로 설정돼있다. ‘바퀴 달린 집’에 살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고. 주인공들은 세상에 대한 악의가 없으나 세상은 그들에게 무심하게 가혹하다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두 영화는 주인공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함이 최절정에 달하는 순간을 서로 다른 자리에 배치해 놨다. 병원에서 환자 통증 평가를 0(통증 없음)에서 10(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픔)으로 하는데, 그 고통이 10에 이르는 순간이 <미나리>에서는 영화 가장 뒷부분에 등장하고, <노매드랜드>는 이야기 가장 처음에 등장한다. 두 영화 속 ‘고난’의 위치가 달라지니 이야기의 결도 달라졌다.
(스포일러->)
1. 비슷한 고통이라도 위치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나리> 주인공 가족들이 온갖 수난 끝에 어떻게든 버텨 수확해 출하를 앞둔 농작물 창고, 그러니까 가족들에게 남은 전 재산인 그 창고가 할머니의 실수로 활활 불타버리는 사고는 영화 종료 직전에 벌어지는 극도로 절망적인 사건이다. 러닝타임이 97%쯤 흐른 지점에서 최악의 고난을 주인공에서 선사하는 이 영화는 남은 3%의 장면에서 ‘그런데도 불구하고’ 살아낼 용기를 상징하는 ‘미나리’가 씩씩하게 자란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 사랑스러운 가족들의 앞날이 여전히 불행할지 모른다는 예감을 완전히 날려버릴 수는 없는 끝장면이었다.
그런데 <노매드랜드> 속 가장 절망적인 사건은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고 본편 첫 컷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벌어져있다. 2008년 경제대공황 직격탄을 맞아 평생직장이었던 석고 공장은 문을 닫고, 사람들이 떠난 마을은 폐허가 됐고, 남편마저 병으로 떠나보낸 후, 집도 없이 홀로 남겨진 주인공이 밴을 타고 유랑을 막 떠나려는 상태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나는 <미나리>를 보고 나서 <노매드랜드>를 봤기 때문에, 이 두 영화가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나리>의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서 <노매드 랜드>가 주인공을 바꿔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 러닝타임 내내 불길하고 불안하고 비극에 가까웠던 <미나리>가 이야기를 끝낸 지점에서 <노매드랜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불길하고 불안하고 비극에 가까운 설정에도 불구하고 <노매드랜드> 주인공은 희망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2.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넘어진 자와 그에게서 바통을 받은 자의 이어달리기
그리고 한 편으로, 이 두 영화 속에서 다른 것은 ‘10점짜리 고통’의 위치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강하고 풍족한 미국’을 구호로 내걸었던 1980년대의 미국을 살아가는 <미나리>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의 미국을 묘사하는 <노매드랜드>는 그 ‘시차’ 때문에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이야기 속 고통이 놓여있는 위치가 다르고 그 배경이 되는 시간의 차이 때문에,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미나리>가 최악의 고통을 향해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면, <노매드랜드>는 최악의 고통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관객으로서의 불안감(주인공이 더 고통받게 되면 어쩌나 하는)이 오히려 훨씬 덜 하다고 해야 하나. <미나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그 꿈에서 금방 깨버릴까봐 불안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노매드랜드>는 그 꿈에서 이미 깨버린 사람이 맞닥뜨린 아메리카의 이야기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넘어진 자와 그에게서 바통을 받은 자가 가쁜 숨을 내쉬며 견뎌내는 이어달리기다.
3. 불타는 집과 바퀴 달린 집
<미나리>는 가족들이 바퀴 달린 집으로 이사 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퀴 없는 집을 갖기 위해 바퀴 달린 집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데서 이미 주인공 부부는 갈등하기 시작할 정도로, 바퀴 달린 집은 이들에게 바퀴 없는 집에 대한 열망이자 결핍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첫 번째 ‘바퀴 없는 집’을 만든다. 그게 바로 농작물 보관 창고인데, 영화는 그 집마저 산산이 불태워버리면서 희망의 싹을 무참히 밟아버린다.
<노매드랜드>는 대출금을 갚지 못해 바퀴 없는 집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집을 되찾기 위해 애쓰기보단 차라리 바퀴 달린 집을 선택한다. 동네 마트에서 만난 아이가 ‘홈리스 된 거 아녜요?’라고 묻자 주인공이 하는 대답은 바퀴 달린 집이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분명한 선택’ 임을 재확인한다. “I’m not homeless. I’m just houseless”
불타는 집(창고)을 무참히 바라보고도 아마 <미나리> 속 가족들은 다시 집을 짓기 위해 애썼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노매드랜드> 주인공은 바퀴 없는 집에서 살자는 가족과 지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찬바람 불면 이빨 부딪힐 정도로 추운 밴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라며 이야기를 마친다.
4. 불안의 영화
서로 다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미나리>와 <노매드랜드>를 보는 동안 '불안'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헤집고 다녔던 것은 내가 '잃을 게 많고' '무언갈 얻기란 너무 힘들다'는 걸 알아버린 나이가 됐고 가족을 꾸렸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노매드랜드>는 바퀴 달린 집에서의 삶이 그토록 위태롭고 외롭고 쓸쓸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최대한 성실히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이 두 영화를 보는 내내 함께 영화 <테이크 쉘터>가 떠올랐다. 아내와 아이와 평온하게 살고 있던 주인공의 꿈에 매번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의 폭풍이 찾아오고, 꿈인 줄은 알지만 너무 선연한 탓에 끝내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 뒷마당에 방공호를 짓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 남자가 <미나리>를 봤다면 그건 너무 성경적이라 할 것 같고(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로 유명한 욥기의 욥처럼 <미나리> 가족들은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고난을 겪고 있으니), <노매드랜드>를 봤다면 그건 너무 낭만적이라 할 것 같다.
다시 <테이크 쉘터>로 돌아오면, 남자는 결국 방공호를 짓지만 폭풍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건 이 세계가 그대로 유지될 거라는 희망이자 동시에 내가 세계를 해석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정해야하는 절망을뜻하는데 정말 뜻 밖에도, 이 뒤섞인 희망과 절망으로 허망해진 남자가 가족과 함께 회복 여행을 떠난 바닷가에서 남자는 꿈속에서 보았던 세계 멸망 폭풍의 전조를 직접 체험하고 여기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부동산과 주식과 코인에 발 담그지 않아/못해 '벼락 거지'가 된 우리가 반농반진으로 내뱉는 '차라리 대공황 한 번 왔으면 좋겠다', 이런 자멸적인 희망이 <테이크 쉘터>에서 성취되는데 내가 자꾸 요즘 이 영화를 떠올린다는 건 그만큼 불안하다는 뜻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