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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문PD Jan 21. 2016

대니 보일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번역한다면

영화 <스티브 잡스>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처음 한 일은 태명을 짓는 것이었다. 평소 내가 아내를 부르던 별명을 조금 더 귀엽게 손을 봤다. 나와 아내 둘 다 너무 좋아하는 특이한 태명이 나왔고, 태어난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은 지금도 딸은 여전히 태명으로 불린다. 물론 공식 이름도 자주 불러주고 있지만.


진짜 이름을 짓는 일은 태명을 짓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시간은 고민의 흔적이라 치고, 돈은? 이른바 '좋은 아기 이름 짓기'를 안내한다는 각종 책들을 구입한 비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명리학적 지식이 없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었으므로, 결국 이름 짓는 집에 문의한 비용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에 오른 이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내가 생각하고 내가 동의한 이름을 짓기까지 돈이 들긴 들었다. 돈 주고 산 이름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이름 짓기엔 이래저래 돈이 든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중요하다.  

그리고 영화 <스티브 잡스>는 바로 그 '이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후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의 이름과 딸의 이름

배경은 1984년, 매킨토시를 세상에 처음 소개하는 발표장 뒤편 대기실.

유전자 검사 결과 친자일 확률 94.1%라는 말은 미국인 28%가 이 아이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므로 나는 이 아이를 내 딸이라 부를 수 없다는 잡스. 이 아이는 너의 딸이고 나와 너의 딸은 먹고 살 돈이 없으므로 돈을 달라는 전 여자친구 브레넌. 그 둘의 거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마케팅 임원 조안나는 이 살풍경을 더 이상 다섯 살 리사(Lisa)가 보게 해선  안 되겠다 생각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선다.  그때,


리사가 묻는다. 컴퓨터의 이름이 리사(Lisa)인데 내 이름도 리사(Lisa)니까, 내 이름을 따서 컴퓨터 이름을 지은 거냐고. 기대에 찬 예쁜 얼굴로, '맞아'라는 대답이 '나는 너의 아빠야'라는 의미라는 걸 어렴풋이 아는 듯한 눈빛으로.


이어지는 스티브 잡스의 대답.

아니. 그건 Local Integrated System Architecture의 줄임말인데.


거기에 충격을 받은 듯한 리사의 말.

그럼 내 이름은 컴퓨터 이름을 딴 거야?


크리선 브레넌과 리사, 1978( c Amazon)
Apple이 1983년 발표한 Lisa



호명되는 것과 호명되지 않는 것

영화는 세 번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 직전 상황을 각각 40분씩 할애해 보여준다. 매킨토시, 넥스트, 아이맥을 공개하는 세 번의 프레젠테이션 자체가 본격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유튜브에는 잡스의 발표 영상이 있고, 영화가 그것을 충실히 재현하는 데 공력을 들일 필요는 없으니 아쉽지 않다. (물론 마이클 패스빈더는 스티브 잡스와 너무 비슷하다)

대신 영화는 리사에게 역할을 맡긴다. 리사는 학교를 빼먹고 이 발표장에 와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잡스는 (처음에 부인했던) 자신의 어린 딸이 학교에 결석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듯이 리사를  찾아다니거나, 홍보담당인 조안나에게 리사가 어디 있냐고 자꾸 묻는다. 리사의 이름을 부인하던 잡스가 자꾸 리사를 호명하는 장면에 이 영화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워즈니악은 잡스의 발표장에 찾아와 그에게 애플2 팀원들의 이름을 호명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지금의 애플을 만든 주인공들이니까 세상에 그들의 이름을 들려줘야 한다고. 하지만 잡스는 워즈니악의 부탁을 매번 거절한다. 여긴 신제품 발표장이고 애플2의 시대는 갔으며 그 팀원들은 탑티어가 아니니까.

컴퓨터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게 공헌한 팀원들은 호명하지 않고, 자신을 스캔들로 밀어 넣을지도 모르는 전 여자친구의 딸 이름은 호명하는 잡스.



아론 소킨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번안한다면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에게 <스티브 잡스>는 아버지 되기에 대한 영화다. 각본을 쓴 아론 소킨은 잡스의 딸 리사를 인터뷰하면서 스티브 잡스의 공식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잡스가 자신의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그래서 아론 소킨은 잡스에게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한다. "왜 컴퓨터 리사의 이름을 딸 이름 따서 지은 거라고 얘기 안 했어요?"


영화는 1984년, 1988년, 1998년의 프레젠테이션을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이는 잡스의 실패와 재기와 혁명적 성공이라는 드라마를 표현하기 위한 당연한 배치이겠지만 또 한 편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시간을 쌓는 일'이라는 걸 역설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분명한 혈연이지만, 잡스의 해석에 의하면 자신이 아버지가 아닐 확률이 72%에 달하는 여자 아이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 과정의 변수는 1984년에서 1998년에 이르는 15년간의 시간.


아론 소킨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번안한다면 이 영화 <스티브 잡스>가 될 것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만들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촬영과 각종 영화제 참석을 위해 오래 집을 비웠다 돌아왔을 때 자신을 낯설어하는 딸을 보며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됐다는 것.


“내가 집에서 나갈 때, 딸이 손님한테 하듯이 ‘또 오세요’라고 하는 순간, 핏줄이 연결돼 있다는 것만으론 아버지가 될 수 없구나 라는 걸 느꼈다. 핏줄이냐 시간이냐, 두 가지 중에 어떤 게 부모와 자식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대니 보일과 아론 소킨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니 보일의 영화

  

아론 소킨의 대본이 대니 보일의 촬영과 편집을 압도하는 듯한 작품이지만, 이건 분명히 대니 보일의 영화다. 그의 영화에는 부감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부감샷은 인도 빈민가를 표현하는 하나의 정석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 대니 보일의 인장 같은 부감샷이 <스티브 잡스>에도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 잡스와 리사가 건물 옥상 주차장에서 대화하는 장면. 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화면 한 쪽에 서 있는 샷. 그림 자체로는 생각보다 밋밋한 부감샷이다. 문제는 편집. 

두 사람의 감정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격적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그 순간, 타이트한 샷들 다음에 붙는 아주 루즈한 롱풀샷을 마주하는 순간 관객은 큰 정서적 낙차를 경험한다. 이는 이어지는 마지막 씬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관객을 자리에 붙잡아 놓는다. 부감샷을 최적의 타이밍에 활용한 것만으로도 대니 보일은 자신의 이름을 영화에 새기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이제 마지막 씬.

아론 소킨의 촘촘한 대사가 다 소진된 자리. 감독의 디렉션만 남은 자리. 오직 배우의 표정과 몸짓, 빛과 색채와 음악과 편집만 남은 자리에서 대니 보일은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듯이 씬을 마무리한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에 버금가는 저릿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관객은 한 동안 자리에 앉아 크레딧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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