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막의 노인

비봉내의 메아리 #4

by 박하
상여막.jpg

북문내, 상여막의 기억

시골 초상은 일종의 두레였다. 당사자에겐 큰 슬픔인데도 동네 사람들이 함께 치렀으니까 말이다.

북문 밖을 나오면 한적한 비탈길, 그 끝에는 으스스한 상여막이 있었다. 상여막은 상여를 보관하는 초막으로, 대개 동구 밖이나 후미진 곳에 있었다.
왜 그랬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평소에는 죽음을 잊고 싶었으니까 그랬으리라. 우리는 생이막이라 불렀다.

상여는 마을의 공동자산, 우리 동네 사람들이ㅡ노환이든 사고사든 간에ㅡ이승을 하직할 때면 으레 타고가는 저승길의 꽃가마였다.
예로부터 저승길만은 차별이 없었다. 앙반도 상놈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누구나 꽃상여를 탈 수 있었다.

해거름 때만 되어도 이곳을 지나려면 오금이 저렸다. 동무랑 갈 때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이라 용기를 내어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상여막은 애당초 문이 없으니, 어둑한 속에 상여틀에 꽂힌 오색 꽃가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심심해서 죽겠다는 듯이......

상여막에는 께름칙한 소문들은 늘 떠돌았다. 일테면 상여 옆에 가끔 지팡이를 쥔 백발노인을 보았다는 사람, 때로는 소복 입고 머리 풀고 선 여자를 보았다는 이도 있었다. 초상 때마다 망자가 바뀌듯 상여막 무대의 주인공, 즉 귀신 배우들도 바꼈으니까..... 하지만 나는 머리끝이 쭈볏거려서 오래 쳐다보지도 못했다. 처녀 귀신이 날 보고 손짓을 할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느 날 동네 노인 한 분이 난데없이 상여막에 들렀다고 한다. 일흔 후반의 정정한 노인이었는데 이곳에 들러 상여를 쓰다듬더라는 게 아닌가. 그 일이 있은 지 사흘 뒤, 그 노인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상여를 따라 갔던 적이 몇차례 있었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초등4학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할머니 장례 때는 상여를 따라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며 무진 고생을 했다.

생이(상여)는 언덕이 아무리 가팔라도 절대 쓰러지는 법이 없다니까!

비지땀을 흘리며 가파른 언덕을 오르던 상두꾼들이 스스로 최면을 걸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지금은 고향에도 번듯한 장례식장이 생겼다. 그래서 예전같은 꽃상여는 좀체 구경하기 어렵게 되었다. 아마도 북문내 상여막도, 꽃상여도 벌써 없어졌겠다.

그리고 보니, 예전에 비해 요즘 귀신들은 마지막 길이 너무 무섭고 쓸쓸할 것만 같다. 물어본 적이 없긴 하지만.......

매거진의 이전글북문내 왕잠자리 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