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내의 메아리 #16
까치밥은 감나무에 남겨둔 감이다. 하지만 내 어릴 적에는 찔레 열매도 까치밥이라 불렀다. 크기는 콩알만해도 새빨간 색깔이라, 서리가 허옇게 내린 들녘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까치밥으로 대체 산토끼를 어떻게 잡을까? 우선 까치밥을 잔 가지가 붙은 채로 열 개 정도 꺾는다. 사냥꾼 택동이형은 그 열매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반을 갈랐다. 마치 아주 작은 냄비의 뚜껑을 여는 것 같았다. 그 속에 노란 씨앗을 꺼낸 뒤, 그 안에다 깨알같은 알약 ㅡ청산가리ㅡ을 끼우고 반쪽을 다시 덮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린 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작업을 끝낸 뒤, 택동형이 말했다.
으~으은호야, 오늘은 내 혼자 갈란다! 니~니는 안 따라와도 개안타!
서운했다. 동업자(?)인 줄 알았더니 졸지에 하수인 취급을 당한 느낌이랄까.
택동형이 건너편 언덕으로 사라졌을 때, 마침 이종사촌 재봉형이 나타났다. 재봉형은 나보다 두 살 위였는데, 내가 까치밥 얘기를 꺼냈더니, 얼른 뒤쫓아가 보자는 게 아닌가.
부리나케 둘이서 건너편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옛날 천연 성벽이던 곳, 성털밭에 납작 엎드려 골짜기 너머 먼당밭 쪽을 바라보니, 택동형이 희미하게 보였다. 누구네 밭인지는 몰라도 솔밭 근처 보리밭에다 까치밥을 놓고 있었다. 그것은 산토끼를 잡는 미끼이자 극약이었다.
택동형이 미끼 살포(?)를 마치고 샛길인 통새미골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 즉시 우리 둘이 먼당밭으로 출동했다. 좀전에 먼 발치에서 보았던 곳, 까치밥을 찾기 위해서였다.
간신히 3개 정도를 찾았다. 더 많이 찾을 수도 있지만 나중 들통 날 것도 두려웠다. 고백컨대, 나는 전혀 죄책감이 없었다. 이유인즉 나도 사전 작업을 거들었으니 당연히 내 지분(?)을 챙기겠다는 심보였다.
까치밥을 들고, 산비탈 근처 우리 보리밭으로 갔다. 파릇한 보리 이삭이 가지런히 허리가 잘려 있는 곳,
바로 이곳이 까치밥을 놓아야 한다던 말이 기억났다. 이유인즉, 산토끼는 달밤에 보리밭으로 나와 어제까지 뜯어 먹은 곳에서 다시 뜯어먹기 때문이란다.
뒷날 새벽, 먼동이 트자마자 재봉형과 둘이서 먼당밭으로 갔다. 산쪽으로 갔더니, 푸른 보리밭 속에 회색빛 산토끼 한 마리가 떡하니 누워있는 게 아닌가.
순간 잡았다!하고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혹시라도 택동형에게 들키면 안되니까.....
산토끼가 웬만한 강아지보다 컸다. 만져보니 아직도 따뜻했다. 좀전까지 살아있었던 것이다. 산토끼가 두 손으로 안기에는 너무 무거워 번갈아 어깨에 메고 집으로 왔다.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더니, 깜짝 놀라셨다. 나무라기는 커녕, 대견하다는 듯이 씨익 웃으셨다. 금방 내장을 꺼내지 않으면 독이 퍼져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하시며 곧장 부엌칼을 가져오라 하셨다.
아버지께서 날렵하게 산토끼를 해체하셨다.
그날 아침, 쫄깃한 산토끼 고기로 재봉형이랑 온 식구가 포식을 했다. 물론 택동형에게는 죽을 때까지 비밀로 삼았다.
한편 아버지는 야전에서 살아남는 법을 잘 알고 계셨다. 연유인즉, 20대 초반에 일본군에 징병을 갔다가 사할린 전투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는 바람에, 시베리아에서 3년 동안 유형생활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생쥐부터 온갖 산새 사냥도 하셨다고 한다.
까치밥, 그 열매로 산토끼를 잡았던 일, 유년시절의 가슴 떨리는 모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