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를 바라보며

제주 유배길의 선비

by 박하

기획의 변


조선조의 선비들은 거의 다 시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다들 풍류문사였다는 말입니다. 어디 선비들뿐입니까?기생들은 물론이고 양반가의 규수들 중에도 시인들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시는 호사스런 취미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컨대, 벗을 사귀고, 사랑을 표현하고, 자신의 소신을 에둘러 말하고, 나아가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에도 시는 고품격 외교언어 기능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우선 옛날 선비들을 지금에 비긴다면 공무원과 학자들이 되겠지요. 공무원은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 정부재투자기관 등에 근무하는 사람들이고, 학자는 초중고대 교육기관과 연구단체 소속의 사람들, 즉 교사, 교수, 연구원 등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시(詩)를 얼마나 즐기고 있을까요? 언뜻 생각해도 공무원, 교사, 교수, 연구원들과 시인은 전혀 오버랩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사회가 오늘날처럼 각박하게 변한 이유는 뭘까요?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시를 멀리하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의 전통은 우리 한시(漢詩)에도 있습니다. 설령 운(韻)자를 따지는 형식은 몰라도 그 뜻은 얼마든지 취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글전용 세대에게 한시는 영어로 된 책보다 더 낯설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우리 선조들의 정서를 외면하고 지내는 거나 진배없다는 뜻입니다.

절절 한시(漢詩)는 지금 읽어도 심장을 쿵 울리는 시들을 소개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주옥 같은 한시 시편들 중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한시들을 골라 그 이면에 얽힌 일화들을 쉽게 소개하려 합니다.

혹시라도 ‘박하 시인이 무슨 재주로 한시 해설?' 하실까봐 한 말씀 드립니다. 물론 저는 한문학자도 아니고 국문학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집을 네 권 낸 시인으로 우리 한시를 좋아한지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2001년부터 2017년 지금까지, 부산교대 평생교육원 고전강독반(연붕서당)에 다니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카페 '古典의 메아리'에서 중국한시를 중심으로 '개운漢詩'를 100회까지 연재한 적도 있답니다. 그러니 한번 한번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절절漢詩 #1- 소나무를 바라보며


路傍松 /金淨

바닷바람 불어오니

소나무도 소리내어 우네

산 위에 뜬 달 아래

여윈 그림자 성글구나

그래도 곧은 뿌리, 땅 속 깊이 뻗어 있어

눈서리도 그 기개 다 없애지 못하리

노방송-김정.jpg

海風吹去悲聲壯 해풍취거비성장

山月孤來瘦影疎 산월고래수영소

賴有直根泉下到 뇌유직근천하도

雪霜標格未全除 설상표격미전제

ㅡ출처;『大東詩選』

해풍을 맞고 서있는 소나무를 본 적이 있는지요? 그 나무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요?

이 시는 저자(김정)가 제주도로 유배가는 중에 지었다고 한다. 저자는 기묘사화로 인해 졸지에 죄인 신세가 되었고, 유배 길 도중에 당도한 해남의 어느 바닷가, 한 그루 노송 앞에서 자신의 심경을 읊었던 것이다.

거센 해풍에도 꿋꿋한 노송, 곧은 뜻 품은 죄로 시련을 당하는 저 선비, 노송과 유뱃길의 저자가 절절하게 겹쳐진다.

지금도 볼 수 있을까요? 저런 꿋꿋한 노송의 모습,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을까요?

제주도 오현단에 가면 김정의 한시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오현단은 제주에 유배 왔던 다섯 분의 선비를 모신 사당이다. 다시 말해 제주에 유배 와서 후진 양성 등 큰 영향을 끼쳤던 다섯 분의 선비들의 공덕을 기리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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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淨; 1486(성종 17)∼1521(중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 출신. 김호(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처용(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판관(判官) 허윤공(許允恭)의 딸이다.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고, 또 제주로 이배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