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벗을 찾아가다

눈 위에 쓴 글

by 박하



By박하.Mar 30. 2017

눈 오는 날, 벗을 찾아갔다가 / 이규보

雪中訪友人不遇 / 李奎報

눈오는 날 벗을 찾아가다.jpg

눈빛이 종이보다 더 희기에

채찍 들어 내 이름 적었네

바람아, 땅바닥 쓸지 마라

주인 돌아올 때까지 부디 기다려주렴



雪色白於紙 설색백어지

擧鞭書姓字 거편서성자

莫敎風掃地 막교풍소지

好待主人至 호대주인지


흰눈이 내리는 날, 술꾼들은 술생각을 먼저 떠올린다.

고려말의 풍류문사, 이규보(1168~1241)도 눈이 내리자 술 생각이 났고, 이내 친구를 찾아 나섰다.

이규보가 누구인가? 호는 백운白雲居士 이지만, 자칭 별호가 삼혹호선생 三酷好先生이 아니던가. 거문고琴와 술酒과 시詩에 취해 사는 사람이다.

친구집은 조금 멀다. 도중에 작은 시내도 건너야 한다. 그래서 서둘러 자가용을 타고 갔으리라. 그의 자가용은 가마도 준마도 아닌, 비쩍마른 나귀이다.

어렵사리 고개 넘고 시내 건너 눈길을 뚫고 왔건만 웬걸 친구가 집에 없는 게 아닌가.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대다가 날도 춥고 술도 고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먼길을 왔는데 왔다간 표시는 해야겠고.....

마침 종이보다 더 흰 눈에 눈길이 갔던 것. 들고있던 나귀 채찍을 붓자루 삼아 눈 위에 쓱쓱 제 이름을 적는다.

백운 왔다가네!


이름을 적고 돌아서려니 못내 찜찜하다. 눈은 이제 막 그쳤지만 슬슬 부는 바람이 신경 쓰인다. 하마 바람이 싸리 빗자루로 변해 얇게 깔린 눈을 쓸어버리지나 않을까.....


근데 이름자만 썼을까?

틀림없이 이 정도 후렴이 붙었을 것 같다.

'동구 밖 주막에서 기다리겠네.'

어떻습니까? 오언절구, 단 네줄이지만, 정경이 비디오 보듯 환하게 떠오르지 않습니까?

일기예보에도 기다리는 눈 소식은 없지만, 이맘 때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절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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