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쿵한시 절절한시 #56
鑿氷行 / 金昌協
한겨울 한강이 꽁꽁 얼어붙자
천사람 만사람 강 위로 몰려 나오네
꽝꽝 도끼로 어지러이 찍어대고
잉잉 (톱질) 소리 용궁까지 들쑤시듯
떼어낸 얼음장들 설산처럼 쌓이네
싸늘한 냉기, 뼛속까지 스미는데
날만 새면 등짐져 강둑(빙고)으로 나르고
밤마다 얼음뜨기 강 가운데로 모여드네
해 짧은 겨울날에 밤늦도록 일하며
주고받는 노래소리 모래톱에 구성지네
홑옷에다 맨발 짚신, 얼음판에 얼어 붙고
강바람 삭풍에 손가락도 끊어지려 하네
고대광실 여름날 푹푹 찌는 무더위에
미인의 고운 손이 찬 얼음을 내어오네
난도*로 얼음 깨어, 방안 두루 나눠주니
백주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왁자지껄 나으리들 더위를 모르는데
얼음 뜨는 그 고생을 뉘라서 알아주리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한여름) 한길가 더위 먹고 죽어 널부러진 저 백성들
지난 겨울 강위에서 얼음 뜨던 자들인 걸
季冬江漢氷始壯
계동강한빙시장
千人萬人出江上
천인만인출강상
丁丁斧斤亂相鑿
정정부근난상착
隱隱下侵馮夷*國
은은하침빙이국
鑿出層氷似雪山
착출층빙사설산
積陰凜凜逼人寒
적음품품핍인한
朝朝背負入凌陰
조조배부입릉음
夜夜椎鑿集江心
야야추착집강심
晝短夜長夜未休
주단야장야말휴
勞歌相應在中洲
노가상응재중주
短衣至骭足無屝
단의지간족무비
江上嚴風欲墮指
강상엄풍욕타지
高堂六月盛炎蒸
고당육월엉염증
美人素手傳淸氷
미인소수전청빙
鸞刀擊碎四座徧
연도격쇄사좌편
空裏白日流素霰
공리백일류소무
滿堂歡樂不知暑
만당환락불지서
誰言鑿氷此勞苦
수언착빙차노고
君不見
군불견
道傍暍死民
도방갈사민
多是江中鑿氷人
다시강중착빙인
*馮夷; 물의 신 河伯의 이름 (氷夷)
*난도(鸞刀); 제례용의 칼, 이 칼에는 칼날의 끝과 등에 작은 방울이 달려 있는데, 그 소리가 난새의 소리와 비슷하기 때문에 난도라 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단락을 나누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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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는 한겨울마다 한강에서 얼음을 떼어다 빙고氷庫에 저장했다. 동빙고, 서빙고 이름도 그 얼음창고에서 유래했다. 물론 한강에서만 얼음을 떠 빙고에 저장했던 것은 아니다. 지방마다 빙고가 있었고, 지금도 경주, 안동, 창녕, 청도,현풍 등에 남아있는데, 대체로 18세기 중반에 조성한 것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목빙고에서 석빙고로 중수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빙고의 얼음은 어떻게 쓰였을까? 한여름철 내내 궁궐 수라간용, 사신 접대용, 고관층 배급용, 드물게는 장독(杖毒) 치료용으로도 썼다고 하는데 글쎄다. 삼국유사에도 빙고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얼음 채취는 아주 오래된 풍속임에는 틀림없다.
한편 얼음은 나라가 독점 관리하는 물품 중 하나였는데, 지체 높은 양반가에서 법을 무시하고 종종 사빙고를 설치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왕조실록에 보면 심심찮게 사(私)빙고 혁파 기사가 나오는 게 바로 그 증거이다.
얼음은 그 두께가 3치(9cm) 이상일 때 채취를 했다고 한다. 날씨가 춥지 않으면 얼음이 얇기에 관 주도로 기한제 祈寒祭 까지 지냈다고 한다.
얼음떼기 작업도 가장 추운 때인 절기상 대한 무렵부터 한다. 단기간에 떼어낼 얼음량이 많기에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처음 빙질이 좋은 곳을 골라 도끼로 찍어 두께를 확인한 다음, 2인1조로 마주 앉아 탕개톱으로 통나무 켜듯 얼음을 썰었다. 얼핏보면, 마치 흥부 부부가 박을 타는 정경 같이 흥겨워 보이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살을 에는 추위 아래 얼음판 위에서 한밤중까지 죽도록 고된 노동이라니....... 길다란 널판지 떼어낸 얼음판은 지게 또는 두 사람이 목도하여 소달구지에 실은 다음, 석빙고로 옮겼다.
빙부(氷夫)들이 얼마나 고된 노동에 시달렸는지, 빙고에 보관했던 그 얼음은 누가 먹었는지..... 위 詩를 보면 그 극단의 대비를 십분 짐작할 수 있다.
여름 한철, 고관대작들의 사치스런 피서를 위해 엄동설한에 민초들을 빙판으로 내몰았던 그들은 누구인가?
이 詩를 지었던 1600년대 말, 그 때로부터 불과 100년 전에 임진왜란, 50년 전에 병자호란을 당했다. 이 같은 국가적 난국을 초래했던 그 위정자들과 얼음떼기를 강요했던 그들과는 과연 어떤 변화, 어떤 차이가 있었나, 또한 지금의 정치인들과는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석빙고, 한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게 한 지혜의 산물? 맞긴 맞다!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만약 농한기의 그 노동력을 동원하여 갯벌 간척을 했더라면, 아니면 이들로 하여금 천수답 지역에다 대형 저수지를 새로 만들었다면, 아니 방방곡곡 기존 저수지들마다 바닥을 준설했더라면, 그 파급효과가 어떠했을까? 그런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여전히 빙부氷夫들의 그 고초를 외면(?)한 채 석빙고가 조상들의 빛나는 유산으로만 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무지랭이 빙부氷夫들의 고초를 詩로 고발한 농암, 두보의 詩 '석호리 (石壕吏)'만 알고, 이 시를 모른대서야 어디 될 말인가?ㅡ박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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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金昌協, 1651~ 1708)조선후기 문신, 학자. 호는 농암(農巖), 삼주(三洲)이며, 본관은 (신) 안동(安東)이다. 증조부는 좌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운수거사 김광찬(金光燦), 아버지는 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이다.
현종 때 진사에 급제, 숙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 대사성과 청풍 부사에 이르렀다.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죽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에 들어가서 살았다. 아버지의 누명이 풀리자,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등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노론 가문이었지만 이황의 사상에 심취 평생 연구하였다. 《농암집》, 《사단칠정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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