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내의 메아리 #51
우리 큰고모님은 부산 자갈치 (충무동) 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계셨다. 식당 이름이 충무식당인 이유는 아마도 그 옛날 고모부가 충무호의 선주였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옛날 고모부는 일찌감치 세상 즐거움을 다누리신 뒤, 고모와 두 아들을 내버려두고 비겁하게 혼자 저 세상으로 줄행랑을 치셨다.
내 기억에 큰고모님을 처음 뵌 적은 공진호 타고 부산에 갔을 때, 중학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곳에 머물며 일주일 정도 묵었다. 숙소는 식당 바로 옆의 일본식 가옥으로, 이층의 다다미방이었다. 사촌형 둘과 그곳에서 지내다 보니, 그동안의 의문들이 술술 풀렸다.
큰고모는 그야말로 여장부였다. 당시 연세가 쉰 초반으로 덩치도 큰 데다 목소리도 괄괄했다. 아마도 줄담배 때문인 듯했다. 술도 어지간히 좋아하셔서 딸기코에 늘 불콰한 얼굴이셨다. 평소 모습은 앉아 있는 포대화상(금복주 모델) 같았다. 그 품이 얼마나 넉넉한 지 자식들도, 조카들도 호박넝굴에 호박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고모님이 주인인 충무식당은 뱃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바쁠 때는 시중 드는 아가씨도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시간제 알바 같았다.
벽에 걸린 칠판은 외상 장부에다 구인구직란 이기도 했다.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급구! 공진호 갑판원 1명
월급; 정액 + 보너스
연락처; 502-0000 김선장
곧잘 노름판도 벌어졌다. 연안 화물선이나 고깃배가 부두에서 하역 하는 동안 선주들과 선원들이 충무식당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노르판에 선수가 없을 때는 고모님이 대타로 출전하시기도 했다. 고모님의 고스톱 실력은 상당한 것 같았다. 강호의 고수들과 시도 때도 없이 맞짱을 뜬 덕분이었다.
충우식당에도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에 엎드려 방바닥의 구멍을 통해 보면 아래쪽이 환히 보였다. 다락 아래 공간은 안쪽 반은 마루 깔린 방, 바깥쪽은 테이블 식탁 서너 개가 있는 식당이었다.
아래쪽 마루방에는 노름판이 곧잘 열렸지만, 그 위 다락에서 인기척이 없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고모님은 소문 안난 타짜! 이기도 했다. 따고 잃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실력이었다.
짧은 여름방학 동안, 나는 고모님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ㅡ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절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ㅡ배짱은 남자에게만 있는게 아니고, 여자도 산전수전 겪다보면 커진다는 사실!
어느해 겨울, 충무식당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다음 편에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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