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찾기

by 유명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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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이는 걱정이 됐다. 분명히 엄마한테, 내일 성당에서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린다고 했는데 엄마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밤 9시가 넘었는데도 도무지 밖에

나가시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시장도 다 닫을 텐데.. 김밥은 안 싸더라도, 과자나 음료수만이라도 사줬으면 좋겠는데..’

무실이는 손에 쥔 사백 원을 꼼지락거렸다. 지금이라도 슈퍼에 가서 뭐든 사려고만 하면 늦진 않았지만, 갖고 있는돈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게 울고 싶었다.


김밥을 싸달라는 무실이의 말에, 엄마는 소풍도 아닌데 무슨 김밥이냐며 짜증을 내시고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서 무실이는 그럼 과자라도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며 안 된다고 했다. 왜 안 되는 건지는 몰라도, 무실이는 더 이상 애기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엄마의 표정이나 태도로봐서 졸라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오늘은 졸라보지도 못했다. 한 번만 더 얘기하면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매를 때릴 거라는 걸 무실이는 잘 알고

있었다. 무실이는 서러웠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일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 것만 같았다. 평소에 용돈을 잘 주시는 삼촌들이나 외할머니가 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10시가 다 돼 가는 시간에삼촌이나 할머니가 오실 리는 없었다. 아빠한테 얘기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아빠한테

말해 봤자, 엄마한테 말하라고 할 게 뻔했다. 무실이는

도무지 심란해서 잠이 오지 않았지만, 내일 아침에라도

엄마의 마음이 바뀌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애써 잠을

청했다.


새벽, 무실이는 오줌이 마려워서 잠을 깼다. 엄마 아빠가 깨지 않게 방바닥을 더듬어서 요강을 찾아 오줌을 누었다.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온 무실이는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나 캄캄한 천정을 바라보며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렸다. 걱정이 도지자 잠이 오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걱정과 불안으로

초조해하던 무실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 내일 아침에 엄마 맘이 바뀌게 해 주세요. 제발 내일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창피당하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김밥이 안 되면 과자나 음료수라도 꼭 가져갈 수있게 해 주세요. 네?’

기도를 마친 무실이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말똥말똥하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튿날 아침, 무실이는 밥상을 보며 자신의 기도가

소용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김밥은 이제 바라지도 않았고 과자랑 음료수도 필요 없으니, 제발 도시락 반찬에 소시지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밥상에 놓인

반찬을 보면 그것마저도 틀린 것 같았다.


무실이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침울한 기분으로 도시락을 챙겼다. 밥통에는 달걀부침 하나 얹혀 있지 않았고,

반찬통엔.. 작은 칸에는 어묵이 조금, 둘로 나눠져 있는

큰 칸에는 김치하고 멸치볶음이 있었는데 멸치볶음엔

멸치보다 고추가 더 많았다. 무실이는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을 아래로 떨구고 엄마에게 등을 보이며 도시락과 물통을 가방에 넣었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옷소매가 젖고 콧물이 흘러내릴 때가 되어서야 무실이는 이러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이르며 애써 눈에 힘을 주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방에선 도시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애들의 꽉 찼을 가방을 생각하면, 무실이는 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크레파스랑 물감이라도 챙기는 건데..’

무실이는 어제 저녁 가방에 넣었다가 도로 뺀

그림 도구들이 아쉬웠다. 짜리몽땅한 크레파스와 다 짜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그나마 몇 색 있지도 않은 물감이

창피해서 아예 가져가지 않고 빌려 쓸 생각으로 챙기지 않았는데.. 그것들이라도 넣었더라면 가방에서 이렇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무실이는

성당으로 가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김밥도 없는 도시락과 창피 당할까 봐 가져오지 못한 그림 도구, 걸을 때마다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무실이는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야속한 엄마를 원망했다. 성당에도 가기 싫었다. 가서 창피

당하느니 차라리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엄마가 성당에 가지 않은 걸 알게 될까봐, 아니 그걸 알게 됐을 때의 엄마의 매가 무서웠다. 형제슈퍼 앞을지나던 무실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 든

사백 원을 만지작거렸다. 과자라도 하나 사고 싶었지만, 아예 안 가져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만 가져가면 오히려 더 창피할 것 같았다. 무실이는 이내 체념하고 다시성당으로 향했다.


그림 그리기 대회는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열렸다.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고, 먹을 것이 잔뜩 들어

있는 뚱뚱한 가방을 메고, 스케치북과 그림 도구들을

양손에 든 채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모두들소풍 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무실이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여 있는 그 자리가 그렇게 환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아울러 초라한 자신의 옷차림과 텅 빈 가방에

생각이 미치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무실이는

가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한 손을

등 뒤로 돌려 가방 바닥을 받치면서 조심스럽게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그리기의 주제는 ‘예수님 얼굴 그리기’였다.

성당에서는 이번 그리기의 주제를 일주일 전에 미리

알려줘서, 아이들이 미리 연습할 수 있도록 했다.

보고 그리는 것에 자신이 있었던 무실이는 이번 대회에서 꼭 상을 타서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생각으로, 어린이 미사 책 뒤에 나와 있는 예수님 얼굴 그림을 열심히연습했다. 네 번째 시도 끝에 아주 근사한 그림이

나왔는데, 그림을 본 엄마 아빠는 아주 잘 그렸다고

감탄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실이는 자기가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 이 정도로만 그리면

상 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은 색 크레파스가 없어서 갈색으로 칠한 예수님 머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학년별로 선생님들의 하루 일정과 주의사항에 대한

말씀이 끝나자, 아이들은 제각기 흩어져 좋은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실이는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외진 곳을

찾았다. 외진 곳에 쪼그려 앉은 무실이는 다른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멍하니 홀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그림 도구들을 안 가져온 걸 후회하기도 했지만,

가져왔어도 집에서처럼 잘 그려지지 않았을 거라는

핑계로 위안을 삼았다. 짜리몽땅한 크레파스와

달그락거리는 가방 소리가 무실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풀숲에 숨어 하늘을 바라보는 무실이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귓가에는 아이들의 스케치북 위를 달리고 있는

크레파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그 순간 무실이는

영원한 외톨이가 된 것만 같았다. 무실이는 두 눈에

가득 찬 눈물을 넘기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눈물은

소리 없이 무실이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편에서 들린 인기척에 놀란 무실이는 얼른

눈가를 소매로 훔치고 눈을 비볐다. 뜻밖에도 바위 뒤에서 모습을 내민 사람은 민경식이었다. 경식이는 무실이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녀석은 줄곧 전교 1등만 해서

선생님과 여자애들의 사랑과 인기를 독차지하는

아이였다. 무실이도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반에서노는 자기와 전교에서 노는, 그것도 1등만 하는

경식이와는 노는 물이 달랐다.

‘성당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 너 유무실이지? 왜 혼자 있어?

- 어? 그냥.. 근데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 이름이 특이해서.

- 근데, 왜 넌 그림 안 그려?

- 관심 없어. 귀찮구. 근데 넌 왜 그림 안 그리고 여기

있어?

- 어? 어.. 크레파스랑 물감을 모르고 안 갖고 왔어.

- 그래? 그럼 내 꺼 빌려줄까?

- 아냐, 아냐. 나도 별로 그리고 싶지 않아. 근데, 너

그림도 안 그릴 건데 여긴 왜 왔어?

- 집에서 가라고 해서, 바람이나 좀 쐬려구.

무실이는 자기가 경식이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게

신기했다. 공부도 제일 잘하고, 집도 부자고, 선생님과

여자애들한테 인기를 독차지하는, 자기가 항상

부러워하던 경식이가 자기와 어울린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이름이 특이해서라고는

해도, 경식이가 자기를 안다는 것조차 의아했다.

늘 부럽게 바라만 보던 녀석이, 자기와는 노는 바닥이 다른그런 녀석이 마치 자신과 말이 통한다는 것처럼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조회 때 늘 시상대 위에

서 있는 경식이의 뒷모습을 부럽게 바라만 보던

무실이로선, 경식이와 얘기하는 지금 마치 자신도

시상대 위에 올라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서, 무실이는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

경식이의 말에 동조하는 말만 하고 있었다. 무실이는

답답함을 느꼈지만 참기로 했다.

‘오늘 이후로 녀석과 다시 얘기할 일도 없을 테니, 오늘만 참자. 그나마 혼자 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 너 김밥 싸왔니?

길을 걷던 중 경식이가 멈춰 서서 물었다.

- 어?.. 아니..

- 잘됐다. 그럼 이따 나랑 같이 먹자, 나도 김밥

안 싸왔는데. 소풍도 아니고 어디 놀러 가는 것처럼

김밥에다 과자 같은 거 싸갖고 다니는 거 웃기지 않냐?

- 어? 응..

- 난 어머니가 싸준다고 그랬는데 싫다고 했어. 너도

그랬냐?

- 어?.. 어, 나도 그랬어.

무실이는 거짓말하는 게 싫었지만, 그래도 경식이의 말에자신감이 생겼다.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실이가 경식이와 어색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서

김밥에, 과자에, 음료수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무실이는 경식이가 옆에 있다는 게 무척 든든했다. 경식이 정도 되는애랑 같이 밥을 먹으면 김밥을 안 싸왔더라도 이상하게

보거나 우습게 생각하는 애들이 없을 것 같았다. 무실이와 경식이는 다른 애들과 좀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도시락을 열었다. 반찬통을 꺼낼 때 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무실이는 애써 걱정을 지우고 태연한 척 반찬통을 열었다. 그러나 마주앉은 경식이의 반찬통을 본 무실이는 순간

목이 메었다. 녀석의 반찬통엔 이름 모를 반찬이 가득

들어 있었고,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여러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고 그 위에 소스가 다소곳이 얹힌

경식이의 반찬통에 비해, 새빨간 김칫국물이 온통 반찬을 뒤덮어버린 무실이의 반찬통은 너무 초라해보였다.

무실이는 눈물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눈에 힘을 주면서

밥 한 덩이를 크게 떠서 메이는 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고개를 숙이고 자기 반찬만 먹었다.

- 이것 좀 먹어봐.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싸 주신 거야.

무실이는 경식이의 ‘어머니’란 말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무실이는 경식이와 함께 있는 지금보다,

조회 때 상 받는 경식이의 모습을 부럽게 바라볼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자기와 경식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또 경식이의 그 ‘정성스럽게’란 말이

자신과 경식이와의 사이를 더 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무실이는 경식이의 먹어보라는 말에, 실은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마지못해 먹는 척했다.

경식이의 권유로 먹어본 반찬은 그 정성만큼 역시

맛있었다. 무실이는 바로 또 하나를 더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경식이에게 자기 반찬도 먹으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식이는 고맙게도, 무실이가 싸온

어묵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더니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 야, 이거 상했나보다. 맛이 이상해. 우웩!

색깔도 이상한데?

경식이는 입안에 넣었던 어묵을 뱉어내며 말했다.

무실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상한 게 아니라 멸치국물하구 김칫국물이 섞여서 그래.

- 반찬통이 새는구나. 이렇게 해서 어떻게 먹냐?

무실이는 창피함을 숨기면서 궁색한 변명을 했다.

- 어, 이거 반찬통을 엄마가 새로 사 왔는데 잘못

사 왔나 봐. 오늘 처음 갖고 온 건데..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지만,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는 낡은 반찬통과 반찬통 뚜껑 물림대의 색깔 바랜 고무를

보고도 경식이가 그 말을 믿어 줄지.. 무실이는 거짓말한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경식이는 자기 밥을 다먹을 때까지 무실이의 반찬에 두 번 다시 손을 대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은 밥을 다 먹지도 않고 남겼는데,

- 무실아, 이거 남은 반찬 먹을래? 난 다 먹었거든.

버리기 아깝잖아.

- 아냐, 괜찮아. 나두 거의 다 먹었는데 뭐. 반찬도 아직. 있구..

- 그래두 더 먹어. 안 먹을래?

- 어? 아냐, 됐어.

경식이는 밥과 반찬을 산기슭에 쏟아버렸다. 무실이는 그맛있는 반찬을 버린 게 아까웠지만 거절하길 잘했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마지막 밥숟갈에 김치냄새, 멸치냄새에 절어서 색깔도 맛도 이상한 어묵을 얹어 입 안에

집어넣으며, 무실이는 경식이의 그 이름 모를 반찬을

한번 더 맛보지 못하고 버리게 한 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실이가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시는데 경식이가 말했다.

- 야 무슨 물통이 그렇게 촌스럽게 생겼냐? 항아리같이. 생겨서 색깔두 새파래가지구..

- 어, 이거 엄마가 시장 가서 사왔는데 새로 개발된 거래. 그래서 좀 특이해.

무실이도 물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엄마가

얼마 전에 비싸게 주고 사온 거라고, 새로 개발된 바이오 물통인가 뭐라고 한 거라서 자신 있게 꺼낸 건데..

경식이의 말을 듣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 야! 뻥까지마. 우리 엄마가 그거 시장에서 꽁짜루 주는. 거랬어. 우리 엄마두 하나 갖구 왔는데 냄새 나서

못쓰겠다고 버렸어. 그거 뜨거운 물 부으면 이상한

냄새 나. 비싸긴 뭐가 비싸냐? 시장에서 꽁짜루 주는

건데..

마침 지나가던 녀석들 중 하나의 말에 무실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닌데, 분명히 엄마가 비싸게 주고 사온 거라고

그랬는데.. 바이오 물통이라고 그랬는데..’

무실이는 어떻게 된 건지 의아했지만, 불청객 같은 놈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엄마가 왜?..’

무실이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경식이가

모른 척 앞서 걸어가자, 무실이는 그런 경식이에게

창피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물통에 남은 물을

쏟아버렸다. 무실이는 엄마가 미웠다. 김밥 안 싸준 것도, 과자 안 사준 것도 괜찮았다. 그렇지만 물통은..

‘왜 거짓말을 해서..’

무실이는 물통 때문에 당한 창피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옆에서 물통이 싸구려라고 말한 녀석보다 엄마가 더

미웠다. 무실이는 물통을 들고 일어섰다. 으슥한 곳에다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물통을 잃어버렸다고 엄마한테 혼날 생각을 하니.. 한참을 망설이던 무실이는 결국

물통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다. 아니, 엄마가 미워

죽겠다.’


무실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걸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집에 갈 생각이었다. 엄마한테 혼이 나든

말든 집에 가겠다고 생각하고 산 입구로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경식이었다.

- 무실아! 어디가?

- 어? 어, 그냥..

- 같이 얘기나 하자.

- 어? 응..

무실이는 경식이하고 할 얘기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하고는 장난감에 대해서, 야구선수에 대해서,

짬뽕(배트와 글러브 대신 맨손을 써서 하는 야구놀이.

투수가 없다는 것만 빼면 규칙은 거의 비슷함)에 대해서, 친구들에 대해서, TV 프로그램에 대해서 등 얘기할 게

많았지만 경식이와는 딱히 할 얘기가 없었다. 그건

경식이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같이 걸으면서도 저 혼자 중얼거렸다. 애초에 무실이의 대답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경식이는 목이 말랐는지, 노점상 매대의 아이스박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얼음물 속에서 캔 커피 하나를

꺼냈다. 경식이의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가 나왔다. 무실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백 원짜리 네 개를

만지작거리며,

‘얼마지?..’

경식이가 거스름돈을 받을 때, 무실이는 그게 얼마인지 정확히 보지 못했다. 얼핏 오백 원짜리 하나가 보인 것

같았는데, 그것 말고도 돈이 얼마나 더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경식이가 받은 거스름돈에, 오백 원 말고

백 원짜리가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무실이는 커피를

사 먹을 수 있었다.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경식이 앞에서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확신이 없었다. 오백 원 말고 받은 돈이 더 있었다

하더라도, 그게 백 원짜리인지 오십 원짜리인지도 알 수 없었고, 게다가 얼핏 본 것 같은 오백 원짜리마저 백 원짜리를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저 일단 사고 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막상 계산할 때 돈이 모자랄까 걱정이

앞서 가격조차 물어볼 수 없었다.

- 넌 안 먹어?

- 어? 어, 난 목 안 말라.

경식이의 캔 커피 따는 소리가 더없이 시원하게 들렸다.

무실이는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엄마

아빠가 가끔 마시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애들은 먹는 게 아니라고 해서 맛조차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경삼이가

커피를 마신다고 하니, 문득 그 맛이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무실이에겐 무엇 하나 마음 놓고 사 먹을 만 한

돈이 없었다. 사백 원이면 동네 슈퍼에서는 뭐라도 하나

사 마실 수 있으련만, 여기선 일이백 원씩 더 비싸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경식이가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 조금 마셔.

- 아냐, 괜찮아.

- 조금만 마셔.

무실이는 마지못해 마시는 척, 캔이 입술에 닿지 않도록 고개를 젖히고는 혓바닥을 적시는 커피 맛을 느끼기도

전에 경식이에게 돌려주었다. 입안에 조금 머금은

커피 맛은 씁쓸하면서도 달았다.

- 좀 더 마시지 왜?

- 어, 나 원래 커피 별로 안 좋아해.


점심시간이 끝나고 선생님들이 그림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왜 안 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 경식아 넌 왜 그림 안 내니?

무실이 앞에 선 선생님이 경식이에게 물었다.

- 안 그렸어요.

- 왜? 여기까지 와서.. 그림도 안 그리고 뭐했어?

- …….

- 경식이가 그림 그리면 다른 애들은 상 하나도

못 받게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림을 걷고 있던 다른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 아참! 그렇지. 큰일 날 뻔했다. 얘.

‘그래 맞아. 경식이는 그림도 잘 그리지..’

경식이는 얼마 전 전국 학생 그림 그리기 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해서 최우수상을 수상, 조회 때 전교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았었다.

무실이는 이번 대회에서 자기가 1등 할 거라며 엄마

아빠에게 큰소리 쳤던 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동안

자기가 집에서 그렸던 그림들이 형편없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큰일 났네, 나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그런데 선생님은 그림을 다 걷고 나서도, 무실이에겐

왜 그림을 그리지 않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무실이를 앞에 두고 경식이한테만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돌아가셨다. 무실이는 경식이가 선생님들 눈에 띈 덕분에 조용히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서운한마음이 들었다.


- 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그린 그림을 선생님들이

채점하는 동안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보물찾기를 시작할 거예요.

- 와아!~

- 선생님들이 이 산 속에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보물을 숨겨놓았어요. 꼭꼭 숨겨놓았으니까 아마 찾기

힘들 거예요. 그래도 선물이 푸짐하니까 열심히

찾으세요~

- 선생님! 1등하면 뭐 줘요? 장난감 줘요?

- 그럼, 1등은 아주 크고 좋은 장난감이니까 모두 열심히. 찾아보세요~

- 네!~

- 선생님 인형은요?

- 인형도 있고 장난감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찾으면 돼요.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두 시간 동안 열심히찾는 거예요~

- 네!~

옆에 있던 경식이가 무실이에게 말했다.

- 너, 이거 할 거야?

- 어? 음..

- 난 집에 갈 거야. 너도 갈 거면 같이 가자.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멸치라는 별명을 가진 석두

녀석이 무실이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 무실아! 빨리 가자. 1등 하면 장난감 준대잖아?

무실이도 집에 가고 싶었지만, 석두가 이끄는 손을

놓지는 않았다. 경식이랑 함께 있는 게 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석두를 따라간 무실이는 이내

후회했다. 알고 보니 석두는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

무실이는 석두랑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한번도 같은 반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어쩌다 마주치게 돼도 먼저 아는 척을 하는 쪽은 늘 석두였다. 성당에서 볼 때만 친한 척 했었는데,

더군다나 모르는 아이들과 있으려니 어색하고 불편했다. 게다가 석두는 이내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무실이의 존재를 잊은 듯 했고, 무실이는 혼자인 줄 알았던 석두에게속았다는 생각에 배신감을 느꼈다. 무실이는 걸음을

천천히 해서 일부러 뒤로 쳐졌다. 도무지 석두와

그 친구들이랑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학교에서 볼 때는 언제나 내가 더

당당했는데, 여기서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지?

내가 석두보다 공부도 더 잘하고 운동도 더 잘하는데..’

하지만 석두 친구 중의 하나가 무실이에게 빨리

따라오라며 재촉하는 바람에, 무실이는 엉겁결에 다시

석두 무리에 합류하고 말았다. 사실 무실이는 며칠 전부터 보물찾기를 기다렸다. 그림 그리기에서 1등 하는 건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관심은 보물찾기에

있었다. 보물찾기에서 1등을 하면, 늘 학교 앞 문방구

유리창으로 바라만 보던 장난감을 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사실 보물찾기 1등 상품이 무엇인지는 선생님들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무실이는 이번 보물찾기에서 1등을하면, 어쩐지 그 1등 상품은 꼭 자기가 갖고 싶어 하던

장난감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번은 그림 그리기

대회와 보물찾기에서 모두 1등을 하는, 그래서 갖고 싶어 했던 장난감을 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막

보물찾기를 시작하는 무실이에겐 그 어떤 기대도 없었다. 김밥, 짜리몽땅한 크레파스, 구토를 유발하는 냄새 나는 물통, 뒤늦게 깨달은 경식이의 그림 솜씨.. 무실이를

위축시킨 개개의 요소들은, 무실이로 하여금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어떠한 기대나 희망도 갖게 하지

않았다. 김칫국부터 마셨던 1등의 환상.. 무실이는 그동안 자기가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고, 그리고 이제서야 그

착각에서 깨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그림 그리던 장소에서 조금 올라가서 이제 정말 보물이 숨겨져 있을 만한 데가 나오자, 석두랑 친구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무실이는 아무런 의욕 없이

그저 석두가 먼저 간 길을 따라 올라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와! 찾았다. 야, 나 하나 찾았다~

‘벌써?’

- 와! 나두 찾았다.

- 야, 나두! 어? 아~이씨 꽝이네.

제일 먼저 보물을 찾은 아이 쪽으로 가면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찾았다'는 소리에 의아해하던 무실이는

그 보물이란 것의 정체를 알고는 크게 실망했다. 당연히

땅속에 묻혀 있었을 거란 생각과는 달리, 금방 친구들의

눈에 띈 보물의 정체는 여러가지 색깔의 색종이였다.

무실이의 생각과 달리 보물은 땅속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숲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 무실아, 너 뭐해? 너도 빨리 찾아. 많이 찾는 사람이

1등 하는 거야.

석두의 말에, 비로소 무실이는 이 보물찾기가 진짜로

땅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뿌려져 있는 색종이를 많이 줍는 거란 사실을 알았다.

무실이는 보물찾기가 겨우 색종이를 찾는 거란 사실에

실망하면서, 그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민망함과 황당함을 동시에 느꼈다. 아울러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 나, 이거 유치원 때 해서 1등 했었는데..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던 무실이는 석두 친구 중의 하나가한 말을 듣고서야, 왜 자신만 보물의 실체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울러 땅 속에 묻혀 있는 보물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다소 막연하다고 생각했던 무실이는 그 막연함 속엔 흥분과 호기심, 미지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는 걸 보물의 실체에 실망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무실이는 여기저기서 보물을 찾는 애들이 많이 나타나자, 아무 기대 없이 올라왔던 방금 전과는 달리, 1등은 못해도 뭐라도 하나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조금은

의욕이 생겼다. 조금 더 올라가니 노란색 색종이가 눈에

띄었다. 조심스럽게 색종이를 펼쳐보니, 거기엔 악필로

쓰여진 ‘꽝’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석두가,

- 무실아 나 세 개 찾았다. 넌 몇 개 찾았냐?

- 나 아직 하나도 못 찾았어.

무실이는 역시 행운은 자기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석두가 세 개를 찾았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맥이 풀려서 더 이상 찾아봐야 헛고생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뭘 줄지 모르지만 남들 다 받는 거 하나 정도는

받고 싶어서,

- 멸치야, 나 하나만 줘라.

- 싫어.

- 넌 세 개나 있잖아. 또 찾으면 되고..

- 싫다니까! 야, 1등 하려면 아직 멀었어. 저기엔 다섯 개

찾은 애도 있는데!..

무실이는 구걸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상했지만,

뭐든 상관없이 상품을 꼭 받고 싶었다. 보물찾기에서마저 아무것도 받지 못하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 멸치야, 나 하나만 줘라. 응? 내가 찾으면 두 개 줄께.

응?

- 야! 멸치야, 하나 줘라. 불쌍하다.

무실이는 석두 친구의 불쌍하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상품을 하나라도 꼭 받고 싶었다. 석두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무실이는 혹시라도 석두가 멸치라는 별명 대신 이름을 불러주면 마음이

바뀔까 싶어, 스스로 비굴하다고 느끼면서도 멸치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불렀다.

- 석두야, 하나만 줘라. 응?

- 싫어.

석두는 끝까지 주지 않았고, 무실이는 비굴하게 굴었던 걸 후회했다.

‘학교에서는 나보다 잘하는 거 아무 것도 없는 새끼가..’

엄마 아빠는 학교에서만 잘하면 다른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석두는 무실이보다 공부도 운동도 못했지만 늘 당당했고, 무실이는 석두가 자기처럼 초라했던 적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괜스레 분했다. 그때,

- 야, 불쌍해서 내가 하나 준다. 대신 너 찾으면, 나한테. 꼭 두 개 줘야 돼~

- 어, 알았어!

무실이는 ‘불쌍해서’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 더 큰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색종이를 받았다.

무실이는 자기에게 연두색 보물을 주고 간 친구가 다시

석두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는 걸 보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무실이는 불행이 뭔지

정확하게 그 뜻도 몰랐다. 그냥 어쩌다 어른들 보는

연속극에서 몇 번 들어 봤을 뿐이었고, 굳이 안다고 하면

그저 좋은 의미는 아니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그 불행이란 것이 늘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자, 불현듯 무실이는 하느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멸치는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는데, 김밥도 싸오고 보물도 찾는데.. 나는 김밥도 못 싸오고 보물도

못 찾고, 창피해서 그림 도구도 못 갖고 오고, 먹고 싶은

과자도 못 먹고, 목이 말라도 음료수도 못 사먹고, 물통

때문에 자랑했다가 창피만 당하고..’

무실이는 서럽고 억울하고 분했다. 자기도 모르게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실이는 자꾸만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누가 볼까봐, 목적도 없이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산을

오르며 중얼거렸다.

- 하느님, 제발.. 제발, 보물 많이 찾게 해주세요.

꼭 1등 하게 해주세요, 네?~ 안 그럼, 너무 억울해요.

하느님 미워할 거예요!


2


무실이는 아이들이 앞서간 방향을 피해 계속 앞을 향해 걸었다. 보물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아이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등으로 자꾸 문질러서 눈가와 코밑이 쓰라렸지만

그래도 눈물은 계속 흘러 내렸고, 설움에 북받쳐 올라오는 울컥거림은 가뜩이나 갈증으로 타는 무실이의 목구멍을 더욱 숨막히게 틀어막았다. 그럴 때마다 무실이는

밭은기침을 토하며 한숨을 크게 쉬었지만, 연이어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무실이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만들 뿐이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무실이는 문득 자기가 혼자라는 걸

깨달았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아이들과 떨어지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어느새 너무 높이 올라온 것 같았다.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물통엔 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쏟아버린 물이 아쉬웠던 건 아니었다.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아무리 시원한 물을 마셔도

자신이 흘린 눈물만큼의 갈증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실이는 자기가 올라온 길을

돌아보며 주저앉아서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참았던 눈물이 또 다시 터져 나와 눈가가 쓰라렸다.

무실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제 무실이는 보물이니 뭐니 찾는다는 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이 자기처럼 불행한 아이한테 보물을 찾게 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뭇잎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저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무실이와는 먼, 기대로 가득 찬 아이들의 들뜬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바로 밑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들이 무실이에겐 그토록 멀리 있는 아련한 것이었다.


무실이는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아이들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아직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걸로 봐서 꽤 가까이 와 있는 게 분명했다.

무실이는 일어서긴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했다. 엉거주춤 서서 아이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무실이는 모든 게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그냥

주저앉으려는데, 소리가 나는 쪽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던 무실이는 가까이 와 있는 아이들로부터 자신을 가려주고 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주황색 색종이를 발견했다.

보물이었다. 무실이는 얼른 뛰어가서 색종이를 펴 보았다.꽝이었다. ‘꽝’이라는 글자는 마치 무실이를 조롱하는 듯 우스꽝스럽게 씌어져 있었다. 무실이는 ‘그럼 그렇지..’

라고 푸념하며, 색종이를 구겨서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발길을 돌리는데, 방금 구겨서 던진색종이가 떨어진 곳 바로 옆에 또 다른 색종이가 있었다. 무실이는 어차피 또 꽝일 거란 생각에 그냥 가려다가, 혹시또 모른다는 생각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색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색종이를 펴보는데.. 거기엔, 웃는

아이들이 그려진 동그란 원 안에 ‘참 잘했어요’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라색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의외의 수확에 무실이는 기뻤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이제 겨우 하나를 찾은 무실이는 이미

몇 개씩 찾은 아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무실이는 하나를 더 찾더라도, 새로 찾은 두 개를 모두 석두 친구에게 주어야만 했다. 못 찾았다고

거짓말할까 생각하다 무실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선물 받을 때 다 들통날 텐데 뭘..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나 더 찾아서 멸치 친구한테 약속이나 지키자.’

무실이는 많이 못 찾아도 좋으니까 하나만 더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주변을 살폈다. 운 좋게 금방 색종이

두 개를 발견했는데, 둘 다 꽝이 아니었다. 일단 석두

친구에게 갚을 두 개를 찾았고, 그러고도 하나가 남았다. 무실이는 남은 한 장보다, 석두 친구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게 더 기뻤다.

‘이제 그만 내려갈까?..’

생각해보니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고, 더 찾아봐야 1등은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실이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방금 보물을 찾은 곳에서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막다른 비탈이라는 걸 깨닫고, 마지막으로

그곳까지만 훑고 내려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비탈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나무줄기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내려다 본 비탈엔 온갖 색깔의

색종이가 무더기로 널려있었다. 무실이는 뛰는 가슴을

달래며 조심스럽게 내려가서 색종이를 주웠다. 몇 장인지 세지도 않고, 급한 마음에 쫓기는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눈앞에 떨어져 있는 색종이를 다

줍고 나서도 무실이는 혹시 못 보고 지나친 게 있나 다시 한번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래서 놓치고 지나칠 뻔한

보물을 몇 개 더 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보물이 보이지

않자, 그때서야 무실이는 색종이를 펼쳐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물은 모두 스물두 장이었다. 스물두 장 중에서 두 장만 꽝이었다. 무실이는 꽝이 적힌 두 장을

구겨서 버리고 다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 주운 스무장과 앞서 가지고 있던 세 장을 합치면 스물세 장. 그 중에서 두 장을 석두 친구에게 돌려줘도 스물한 장이 남았다. 무실이는 너무 기뻤다. 이게 정말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재수가 없었는데, 나같이 불행한 아이한테

이게 정말 진짤까?’

그렇지만 그건 정말 진짜였다. 무실이는 오늘 하루,

창피하고 불행했던 일들에 대해 하느님이 선물을 주신

거라고 생각했다. 무실이는 다 헤아린 색종이를 주머니에 넣은 후,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고맙습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하느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 부쩍 가깝게 느껴지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순간 무실이는 땅에 떨어뜨린

보물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피고, 양쪽 바지 주머니 위로 삐져나온 색종이가 없는지도 확인했다. 아이들은

아무래도 무실이가 있는 이 위로 올라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때서야 무실이는 지금 자기가 있는 곳이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작은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이 위쪽까지 오지

않고 밑에서만 보물을 찾고 있었다는 걸……. 아마도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이렇게 높은 곳까지는 많이

올라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밑에는 보물을 간간이

뿌려 놓고 이곳에 왕창 뿌려 놓은 것 같았다.

또 선생님들은 아래쪽과 이곳의 경계가 되는 나무들

사이엔 보물을 뿌려 놓지 않아서, 아이들은 경계가 되는

나무들 사이를 굳이 뚫고 올라오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 몇이 올라오고 있었다.

밑에서는 더 찾을 게 없었던지,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이제는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의 옷 색깔도

보이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실이는 자기가

있는 곳에 아직 찾지 못한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이곳까지 올라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실이는 아이들이 올라오는 쪽을 향해 내려갔다.

- 어! 무실이네. 야, 여기 보물 있냐?

- 어? 아니. 야, 여기 아무것도 없더라. 그래서 나도 지금. 내려가려고. 근데 저기 아래쪽에서 애들이 보물 많이. 찾았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나두 지금 거기로 가는

중이야.

- 그래? 얘들아, 가자!

무실이는 거짓말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실이는 꼭 일등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는 일등상을 타도 될 만큼 충분히

불행했다고 생각했다. 하느님도 용서하실 거라고 믿었다. 무실이는 자기가 손으로 가리킨 오른쪽 아랫길로

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거긴 자기가 아까 올라왔던 길이었고, 보물이 없다는 걸 알기에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내려가던 녀석들 중 하나가 무실이에게,

- 야! 넌 안가?

- 어? 어, 나 힘들어서 조금 쉬었다 가려고. 니네 먼저 가.

무실이는 갑작스런 물음에 엉겁결에 대답하고 나서,

아무 의심 없이 다시 내려가는 녀석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실이는 또 다른 아이들이 올라오기 전에 얼른 남은 보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눈을 부릅뜨고 다시 보물을 찾기 시작했다.


무실이는 이제 슬슬 내려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멸치 친구에게 줄 두 장을 뒷주머니에 따로 넣어두고,

양쪽 주머니에 불룩하게 넣어둔 보물은 모두

서른네 장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찾았을지 몰라도,일등은 맡아 놓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무실이는

내려가면서 보물을 몇 장 더 찾았는데,

‘분명 아까도 지나간 길이었는데, 왜 아까는 보물을 찾지 못했지? 울면서 올라가느라 그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무실이는 또 설움이 북받쳤다. 이렇게 많이 찾을 것을, 아까는 왜 그렇게 하나도

못 찾게 해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무실이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금방 또 눈시울이 뜨거워지자,

무실이는 이제 밑에 거의 다 왔기에 울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미워해서도 안 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왜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실이는

넘치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억지로 웃어보았다.

아이들에게 운 흔적을 보여선 안 되었다. 이제 다 왔다는 생각으로, 서른네 장 이후로 찾은 보물의 장수를 생각해

내려는데, 정확히 몇 장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려오면서 딴 생각을 해서인지 정확한 수량을 알 수

없었지만, 무실이는 일단 내려가기로 했다. 장수야 어차피선생님께 검사 맡을 때 확인하면 되는 거고, 서른네 장만 갖고도 1등 하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대회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이제 그만

내려오라는 선생님의 음성이 들렸고, 무실이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3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이 모이고 선생님들은 학년별로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시 모인 아이들은 서로

보물을 몇 장 찾았냐고 묻기도 하고 또 몇 장 찾았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무실이는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며,

‘니들이 암만 많이 찾았어도 나한테는 안 될 걸? 일등은 내꺼야!’

때마침, 석두와 석두 친구가 나타났다.

- 무실아, 너 몇 개 찾았어? 하나도 못 찾은 건 아니지?

- 어, 되게 많이 찾았어. 너는?

- 어, 나는 열한 개. 너는 몇 갠데?

무실이는 석두의 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석두의 친구에게 뒷주머니에 있던 두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 자, 두 장. 약속 지켰다~

석두 친구는 자기가 찾은 보물 일곱 개에 무실이가 준

두 장까지 더해서 총 아홉 장이 됐다며 좋아했다. 석두는 무실이의 여유 있는 태도에 궁금증이 더 커졌는지,

- 야, 무실아 너 몇 개 찾았는데? 어?

- 서른네 개.

- 와!~ 진짜야? 야, 나 몇 개만 줘라. 응?

- 싫어.

- 야~ 좀 줘라, 어? 어차피 네가 1등 할 거 같은데, 나

몇 개만 줘라∼ 어? 네가 나 몇 개만 주면 내가 2등 할

수도 있잖아∼ 응?

- 싫어, 새꺄! 너도 아까 내가 달라고 했을 때 싫다고

했잖아!

석두는 미안하다며 제발 몇 개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무실이는 녀석의 그런 비굴함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던 순간의 거만함보다 더 혐오스러웠다. 녀석의 얼굴에

침이라고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무실이는 석두

친구가 가진 보물이 아홉 개, 석두가 열한 개라는 걸

떠올리고는 침을 뱉는 대신 다른 보복을 실행했다.

- 야, 너 아까 나한테 줬으니까 내가 세 개 더 줄께.

- 와? 정말?

세 개를 더 받은 석두 친구는 이제 열두 개라며, 자기가 석두보다 하나 더 많다며, 잘하면 2등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좋아했다. 옆에 있던 석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실이에게 욕을 하고 돌아섰다.

- 넌 친구도 아냐! 씨팔놈!

무실이는 욕을 듣는 것 자체는 기분이 나빴지만, 석두의 입에서 그런 욕이 나올 만큼 녀석이 화가 났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없는 쾌감을 느꼈다. 녀석은 한번의 욕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른 곳으로 가면서도 연신 욕을

구시렁거리며 몇 번씩 고개를 돌려 무실이의 얼굴을 보고 뭐라고 지껄여댔다. 무실이는 그런 녀석의 표정이 오히려 즐거울 뿐이었고, 녀석의 욕 따윈 애초에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보다 더한 복수의 방법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무실이는 중지를 올리고 자기를 향해

욕을 지껄이는 석두를 보고 중얼거렸다.

- 난 너 같은 친구 둔 적 없어.


결과는 생각보다 싱거웠다. 뚜껑을 열어보니, 보물을

많이 찾은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예 하나도 못

찾은 아이들도 꽤 됐다. 승부란 근소한 차이로 이겨야 더 짜릿한 법인데, 그래야 2등한 녀석의 아쉬움이나

억울함이 더 큰 법인데, 무실이와 2등의 차이는 그 격차가 너무 커서 재미가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선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무실이는 자기가 1등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상품으로 장난감만 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유치부 아이들과 저학년 아이들

중에는 보물을 하나도 못 찾아서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모습이 무실이는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무실이는 여전히 뭔가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1등을 해서 장난감을 타면, 애들이 다 부러워할

거야.’

무실이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투정부리는

아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과자 봉지와 음료수 캔에 또 다시설움이 북받쳤다. 무실이는 더 이상 울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 침을 삼켰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정렬시키면서 누가 1등이고,

2등인지 그리고 얼마나 찾았는지를 파악하는 동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보물을 한 장도 찾지 못한유치부 아이들과 저학년 아이들이 징징대며

칭얼거리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떼를 쓰고 우는

것이었다. 무실이는 저학년 아이들의 그런 투정이

욕지기가 일만큼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억지로 쥐어짜서 울고 있는 녀석들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갈기고, 면상을 발로 밟아서 으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학년별로 모여 서서 선생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그 울음소리로 인해 다시 금방 흐트러지자,

선생님들은 일단 아이들이 흩어지지 못하게 주의를

주고는 뭔가를 상의하셨다. 무실이가 빨리 시상식이

끝나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잠시 후 새로운 지시가 내려졌다. 보물찾기 시간을 30분 더 준다는

것이었다. 무실이는 의아했다.

‘왜 그러지?..’

시간을 더 주면 자신한테 불리할 것 같다는 생각에,

무실이는 더럭 짜증이 나는 동시에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별일 없을 거야! 어차피 내가 일등인데 뭐..’

이내 선생님들은 또 다른 주의를 주었다.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무실이는 그 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 보물은 거의 다 산 위쪽에 있었는데 위쪽까지 가지말라면, 밑에서 찾아 봐야 얼마 못 찾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위쪽도 이미 샅샅이 뒤졌기

때문에, 행여 자기를 제치고 1등을 하는 녀석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위쪽까지 올라가지 말라면서 뭐 하러 시간을 더 준다는 거지?’

무실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무가 그늘진 곳으로 자리를옮겨 앉았다. 무실이는 더 찾지 않고 그냥 쉬기로 했다.

30분 더 줘 봤자 자기를 이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급하게 뛰면서 무실이의 옆을 지나던

석두가 무실이를 향해 큰소리로 내뱉었다.

- 야, 유무실! 너 새꺄, 내가 보물 더 많이 찾아서 너 대신 1등 할 거다!

무실이는 석두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얼마든지 찾아봐라. 병신새끼..’


무실이가 나무 그늘에 앉아서 여기 저기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지루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여자

선생님 한 분이 자기 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그냥

지나치는 길이겠거니 생각하고 땅바닥에 손가락 그림을 그리는데, 어느새 무실이가 그린 손가락 그림 앞에

선생님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실이는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든 무실이의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 너 이름이 뭐니?

- 무실이요.

- 음.. 무실이구나. 무실이는 보물 찾으러 안 가?

무실이는 선생님이 왜 자기한테 와서 그런 걸 묻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선생님이 아까

경식이와 자기가 같이 있을 때 경식이에게만 말을 걸었던 선생님이란 것이었다.

- 무실이 너, 보물 많이 찾았다면서?

- ?..

- 있잖아, 유치부 애들하고 1·2학년 애들 중에서 보물을 하나도 못 찾은 애들이 많거든.. 무실이는 많이 있으니까 못 찾은 애들한테 좀 나눠줄래?

‘이거였어. 그래 이거였어. 이 말을 하기 위해 나한테

오신 거였어.’

무실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더 환하게 웃으며, 무실이의 마음을 바꾸려고 무실이를

칭찬하며 부추겼다. 아무리 달래고 타일러도 자기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무실이는 선생님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딱히 적당한 방법이 없었다. 선생님의 계속되는 회유 공세에 무실이는 그저 고개를 흔들며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 왜 안 되는데?..

- 그건.. 나는 열심히 찾았단 말예요. 쟤네들은 저기

위에까지 올라가지도 않고, 그냥.. 그냥 많이

찾아보지도 않고..

- 무실아, 유치부 애들도 열심히 찾았어. 근데 못 찾은

거야. 쟤네들은 어리잖아. 그래서 길 잃어버릴까 봐

선생님들이 멀리 못 가게 했어. 그래서 못 찾은 거야.

- 그런 게 어딨어요! 난 열심히 노력했단 말이에요.

쟤네들은 그냥 근처에서만 놀았잖아요!

무실이는 자기가 왜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지, 도대체

지금의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온갖 설움

속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찾은 걸, 왜 아무런 대가 없이 뺏으려고 하는지 분하고 억울했다. 선생님은 더 할 말이

없었던지,

- 무실이 네가 형이고 오빠잖아.. 쟤네들보다 더

어른이잖아.

‘그게 뭐 어쨌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 왜 안 되는데? 무실이가 1등이잖아. 그거 나눠줘도

무실이가 1등이야. 선생님이 약속할께.

- …….

- 그럼 왜 안 되는지, 확실한 이유를 말해 봐.

무실이는 선생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왜 자기가그런 이유까지 말해야 하는지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왜 자기가 이럴 수밖에 없는지 말하고 싶었고

확인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아니,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흘렸던 눈물들.. 도시락,김밥, 물통, 크레파스, 물감 등에 얽힌 그 참담한 슬픔의

여정을 선생님의 ‘왜?’라는 물음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무실이는 목이 메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요지부동인 무실이가 괘씸했는지, 온유하게 웃으며 말하던 얼굴을

일순간 짜증으로 일그러뜨리며 경멸이 담긴 눈초리로

차갑게 쏴대고는 가버렸다.

- 너 못된 아이구나! 너 그렇게 선생님 말 안 듣고 욕심

부리면 하느님이 미워한다. 하느님한테 벌 받어!

‘내가 못된 아이라고?..’

무실이는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런 선생님의 화(火)를,

그리고 자기가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취급 받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선생님은 화를 내고

가버리셨고 무실이는 못된 아이, 욕심 많고 심술궂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무실이는 생각했다. 자기가 정말

못된 아이인지, 정말 나쁜 짓을 한 건지……. 무실이는

선생님이 오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었다. 자기는 떳떳했고 충분히 그만큼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니라고 했다.

‘내가 정말 못된 아이인가?..’

무실이는 아무 잘못도 없는 자기가 그런 생각까지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분하고 황당했지만, 화를 내고 가는

선생님 뒤에 불편한 마음으로 남아 있으려니 자기가 정말 나쁜 아이인 것만 같았다.

‘내가 못된 아이라고?..’

무실이의 눈에서 글썽거리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몇 개 주면 돼요?..

무실이는 고개를 숙인 채 선생님 앞에 섰다. 앉아 있던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무실이를 쳐다보았다.

무실이는 그 눈빛을 피하려고 발끝으로 땅을 차면서 몸을 흔들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 무실이 너, 잘못했지?

‘내가 잘못했다고?’

- 무실이 너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형이 돼서 동생들한테. 그런 것도 못 해주니?

- …….

- 무실이.. 잘못했지?

무실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한테 보물을 다 준 무실이는 아이들이 드문 곳으로가서 앉았다. 무실이는 도무지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무실이는 선생님한테 보물을 주면, 선생님이 그냥형식적으로라도 ‘야, 우리 무실이 착하구나!’.. 뭐 대충

이렇게 토닥거리고 상황을 정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잘못을 인정하라며 확인사살까지 했다. 그것도 억울하고 분해 죽겠는데, 무실이는 정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고개까지 끄덕이고 말았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무실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선생님들은 무실이에게 받은 보물을 유치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더 이상 억지 눈물을 쥐어짜지 않았다.


시상식은 그림 그리기 대회부터 먼저 시작됐다. 각각

1, 2, 3등을 뽑아서 상품을 주었는데, 유치부 상품은

손잡이가 달린 48색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등이었고,

초등부 상품은 물감과 팔레트 세트, 붓 세트, 포스터 칼라 물감 등이었다. 누가 1등을 하고 뭘 받았는지 무실이는

관심 없었다. 빨리 보물찾기 시상식이 시작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상대 위엔 장난감이나

인형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무실이는 상품이 뒤쪽

어딘가에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자~ 예수님 얼굴 그리기 대회 시상식은 끝났고, 이제

보물찾기 시상식을 할 거예요. 자~ 자기가 찾은 보물을

가지고 유치부부터 한 명씩 선생님 앞으로 나오세요~

보물찾기 시상식은 예수님 얼굴 그리기처럼 시상대에서 하지 않고, 줄을 서서 한 명씩 나오라고 했다. 무실이는

기왕이면 시상대에서 박수 받으면서 선물을 받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치부 아이들부터 자기가 찾은 보물을 들고 한 명씩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앞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아이들의 손에는

모두 똑같은 공책과 연필이 들려 있었다. 무실이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초등학생부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유치부 애들은 많이 찾지 못해서 그런 걸 거야.’

유치부 아이들의 순서가 다 끝나갈 때쯤, 앞줄에서

소리가 들렸다.

- 야! 보물을 다섯 개 이상 찾았으면 연필하고 공책 주고,. 다섯 개 밑에는 연필만 준대.

‘뭐?’

무실이는 방금 들은 말을 의심했다.

‘겨우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라고? 설마?..’

무실이는 그건 유치부 아이들이라 그런 걸 거라고

자위했다. 초등부는 다를 거라고, 유치부 애들은 보물을 많이 못 찾았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그렇지만

무실이의 그런 바람은 채 1분도 안 돼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유치부 아이들의 순서가 끝나고

초등부 순서가 시작되었지만 상품은 변한 게 없었다.

무실이의 순서였다. 무실이의 손에는 보물이 하나도

없었다. 무실이는 혹시나 하는 기대로 상품을 나눠주는

남자 선생님에게 말했다.

- 저.. 제가 보물 제일 많이 찾았는데요.

- 어? 근데 왜 한 장도 없지?

- 아까 유치부 여자 선생님한테 다 드렸는데요.

- 어~, 네가 보물 제일 많이 찾은 애구나. 알았어,

자 1등이니까 두 개씩!

무실이의 손에 공책 두 권과 연필 두 자루가 놓여졌다.

무실이는 아무 말 없이 공책과 연필을 받아들고 뒤로

빠졌다. 무실이는 다시 아이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와서 공책과 연필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탈하게

앉아 있었다.

- 쌤통이다! 이 새꺄!

석두였다.

- 혼자서 욕심 부리더니 잘 됐다, 이 새꺄! 약오르지?

무실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무실이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을 둘러보다, 동료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아까 그 여자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무실이의 눈길을 외면하고 고개를 돌린 채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무실이는 억울함을 호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몇몇 아이들이 왜 장난감이나 인형은 없냐고 따지듯 묻는 게 들렸지만,

선생님들의 둘러대는 말과 끝나가는 분위기 속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처음부터 보물 따윈 없었다. 보물찾기는 그냥그림그리기대회에 붙은 곁가지 이벤트일 뿐이었다.

무실이 역시 기대했던 행운이 자신의 불행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이벤트일 뿐이었다고 체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들이나 선생님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다 끝날

테지만, 무실이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던 무실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양손에 쥐고 있던 공책과 연필을 보았다.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공책과 연필을 보던 무실이는 공책을 바닥에

던지고 쥐고 있던 연필을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부러진

연필을 던져버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공책에 침을 뱉고 발로 짓이겼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을 향해 걸어가던무실이는 이내 다시 돌아와서는 공책을 집어 들었다.

공책을 집어 든 무실이는 잠시 선생님과 아이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는지 아이들이

하나둘씩 내려오고 있었다. 무실이는 공책을 북북 찢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 선생님 씨발년! 하느님 씹팔새끼! 다 죽여 버릴 거야..

무실이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4


무실이는 집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엄마한테 울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무실이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손등으로 자꾸 문질러서 쓰라린 눈가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 밑으론 눈물이 흐른 자국에 먼지와 땀이 뒤범벅이 돼 아주 지저분한 상태였다. 무실이는 고개를 잔뜩

숙이고 대문 앞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2층의 현관문이 열려져 있었지만 다행히 마당엔 아무도 없었다. 무실이는 얼른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고 세수를 했다. 얼굴의 땟자국은 지워졌지만, 열이 올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퉁퉁 부어버린 눈은 아무래도 엄마한테 들킬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올라가던 무실이는 엄마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 다 끝났어?

- 응, 다녀왔습니다.

- 안에 들어가서 씻지, 왜 밖에서 씻고 그래. 수건도 없이.

- 더워서..

- 너 울었어?

- !.. 응.

- 왜? 왜 울었는데?

- 산에서 넘어져서..

- 사내새끼가 고깟 넘어진 것 갖고 우냐? 칠칠치 못하게..

- 아팠어. 많이..

엄마는 무실이가 넘어진 것 때문에 운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 엄마 대영이네 갔다 온다.

엄마가 나가고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무실이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온 무실이는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였다. 바닥에 몸이 닿는 순간 머리 위로 열이 올라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무실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베개를 적셨다.

무실이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무실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엄마는 아직 대영이네서 돌아오지 않았다. 집 안엔 아무도 없었고 창문 밖으로 해가지고 있었다. 무실이는 머리가 아팠다. 머리가 막 쑤시고 몸이 으스스 추웠다. 무실이는 힘없이 마루에 주저앉아

창밖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유난히 붉게 타는 노을은 창문을 지나 마룻바닥까지 붉게 물들였다. 무실이는 자신을 둘러싼 어두운 기운의 붉은

빛에 끌려 한동안 멍하니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온 우주의 한가운데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온갖 설움과 가슴속에 맺힌 모든

것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초점을 잃었던 무실이의 눈에

뜨겁게 차올랐다. 힘없이 옆으로 몸을 누이는 무실이를

따라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무실이를 둘러싸던 붉은 빛도 이내 어둠 속으로 스러져버렸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도 무실이의 몸은 개운치 않았다.이불까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머릿속은 쇳덩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몸이 축 늘어져서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눈두덩은 열이 올라 뜨거웠다. 손바닥을 이마에 가져가 봤지만, 손까지 뜨거워서 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실이는 책가방을 싸면서

크레파스, 물감, 팔레트, 물통 등을 챙기다가 그만두었다. 많이 쓰는 색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남은 색이라야

어둡고 칙칙한 색깔들만 있는 크레파스와 물감은 가져가봐야 칠할 색깔이 없었다. 그냥 가서 애들한테 빌려 쓸

생각이었다. 깜빡했다고 하고 선생님한테 잔소리 몇 마디 들으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스케치북은 가져갈까 하다가 스케치북만 가져가면 더 이상할 것 같아서 그것도

그만두었다. 무실이는 가방을 챙기고 방을 나서려다가,

‘그래도 실기평가인데..’

무실이는 잠시 동안 바닥에 있는 그림 도구들을 바라보다그냥 방을 나섰다. 좀 찜찜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

앞에서 창피당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무실이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묵직한

뭔가가 흔들리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드문드문 종이

쇼핑백을 들고 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뻔했다. 그 쇼핑백 안에는 스케치북, 물감, 크레파스, 물통, 팔레트, 붓같은 그림 도구들이 들어 있을 터였다. 쇼핑백을 들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무실이는 내심

불안했지만, 이제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아이들의 쇼핑백을

세면서 걷다 보니, 무실이는 어느새 학교 정문 앞에 도착해있었다.


드디어 미술 시간이었다. 무실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선생님이 오시는 걸 기다렸다. 선생님이 들어오고, 반장이

인사를 하고.. 선생님은 평소와 다르게, 인사를 받자마자 준비물 안 가져온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보통은

준비물 안 가져온 사람은 옆 사람 거 빌려 쓰고, 가져온

사람은 안 가져온 사람 빌려주라고 하셨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 준비물 안 가져온 사람은 뒤에 가서 손들고 있어.

선생님이 분명히 말했지? 오늘은 실기평가라고. 준비물

안 챙겨온 것도 여러분들 책임이에요. 깜빡했든,

잊어버렸든.. 그건 여러분들이 마음자세가 안 돼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준비물 안 갖고 온 사람은 오늘

실기점수에서 무조건 2점씩 깎을 거예요.

선생님은 평소와 다르게 완강했다.

‘실기평가..’

무실이는 교실 뒤로 나가면서 아침부터 찜찜했던 기분이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체념했다. 준비물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그 짜리몽땅한 크레파스와 색깔도 얼마 없는 물감으로는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물감 좀 빌려줄래?’, ‘크레파스 좀 빌려주라.’.. 이런 비굴한동냥을, 그것도 몇 번씩이나 친구들에게 해야 했다.

무실이는 차라리 벌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2점씩이나 점수가 깎인다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10점 만점에 2점이면 무실이가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려도 8점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시험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수’보다는 ‘우’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무실이는 공부를 꽤 잘했기 때문에, 벌 받는

것과는 별도로 점수에 대해서는 예민한 편이었다.

준비물을 안 갖고 온 애들도 보통 때보다 확 줄어 있었다.

‘실기평가라서 그런가?..’

무실이는 깎인 점수가 마음에 걸렸지만, 한편으론 마음이편했다. 보통 때 급우들은 크레파스나 물감을 몇 번씩

부탁해도 빌려주지 않다가, 시간이 다 끝나갈 때야

빌려줘서 무실이의 가슴을 졸이게 하곤 했다. 그래서

급하게 마무리하는 바람에, 밑그림을 잘 그려 놓고도

그림을 망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비굴한 동냥을 안 해도 되니, 점수는 깎였어도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무실이는 손을 들고 벌을 서면서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걸 구경했다. 옆에 서 있던 아이들 중 몇몇은 벌 받는

중에도 장난치고 떠들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

무실이는 팔이 좀 아팠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실기평가 주제는 정물화였다. 선생님은 교탁 위에 쟁반과 주전자, 컵 따위를 올려놓으시고는 똑같이 그리라고

말씀하셨다. 스케치를 하느라 한동안 조용했던 교실은

시간이 좀 지나자 이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물통에 물을 뜨러 가는 아이들,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면서 자기 그림을 제쳐두고 남의 그림을 힐끔거리는 아이들, 잘 그린

아이들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자기가 그린 그림에

실망하는 아이들,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림은 그리다 만 채로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들..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선생님은 조용히 하라고 하시고는

주번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켜서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다. 주번이 떠다 놓은 주전자에서 물을 받아 가면서, 무실이처럼 뒤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

쌤통이라는 듯 혀를 쑥 내밀며 장난을 거는 여자애도

있었는데.. 무실이는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함께 서 있는 녀석들 중에는 ‘너 죽을래?’라며 을러대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애는 혓바닥을

내밀고 순식간에 고개를 돌리고 얄밉게 제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녀석의 을러대는 시늉은 겉으론 화난

것처럼 보여도 실은 벌 받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옆의 아이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무실이는 크레파스나 물감을 빌려 달라고 하는 아이들과, 싫다고 하는 아이들의 실랑이를 보고 있었다. 사실

무실이도 뭘 잘 빌려주는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실이의 경우는 입장이 달랐다. 무실이는 아껴 써야 했기 때문에, 새것이 있으면 빨리 닳을까 봐 안 빌려줘서 욕을

먹었지만.. 크레파스, 물감이 몇 개씩 있어도 꼭 그렇게

없는 아이들을 비굴하게 만들고 나서야 빌려주는 거만한 아이들이 있었다. 그것도 거의 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

빌려줘서, 빌린 아이들 마음을 졸이게 하고 때론 그리다 만그림을 내게 하는.. 무실이는 지금 또 그렇게 벌어지고

있는 비굴한 동냥과 치사한 거절의 실랑이를 보고 있었다. 만약 무실이가 준비물을 가지고 왔다면, 지금 보고 있는 그비굴한 동냥을 자신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무실이는 그

거만하고 밉상스런 아이들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침을 뱉고 발로 짓이겨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언제나 생각일 뿐이었다. 실상 무실이 자신이 그 동냥의 위치에 있었을 때.. 무실이는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와 시간이 다 돼 간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가슴을 졸이며, 그 거만한 아이들에게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최대한 애원하는 모습을 연기해야만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건

선생님의 태도였다. 선생님은 언제나.. 무실이처럼

애원하는 눈을 가진 아이들의 편이기보다, 그 거만하고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얼굴을 가진 아이들의 편이었다. 말로는 친구들에게 빌려주지 않는 친구는 나쁜 친구라고 해 놓고 막상 그런 일로 선생님에게 이르고 하는 일이

벌어지면, 선생님은 한결같이 ‘그러게 왜 준비물을 챙겨 오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오히려 친구를 이르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며 무안을 주곤 했다. 그럴 때의 무안은

선생님에 대한 배신감과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극도의 자기혐오까지 포함된 치욕이며 상처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챙겨오지 않은 게 아니라, 챙겨왔는데

없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실랑이

혹은 싸움이 벌어지면, 선생님은 있는 아이들에게 같이

나눠 쓰라고 이야기는 하셨지만 그 결과까지 확인하진

않으셨다. 어쩌다 그런 일로 다투고 우는 아이들이 생길

때면, 우는 아이들은 늘 ‘가지고 왔는데 없는’

아이들이었다. 무실이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득 수업시간이 다 끝나간다는 것을 깨닫고는,

‘우린 언제 그림을 그리지? 게다가 정물화인데, 저 앞에 있는 주전자랑 컵을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똑같이 그리지?..’

그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자, 오늘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다음 시간에도

계속해서 그릴 거예요~ 오늘 준비물 안 갖고 온 사람은. 다음 시간에 그리고, 오늘 다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다음 시간까지 완성하면 돼요. 다 그린 사람은 다음

시간에 더 잘 마무리하고,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그려도 좋아요. 그리고 자신 있는 사람은 지금

내도 돼요.

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싶더니, 불쑥 한 녀석이

선생님께 그림을 내밀었다. 녀석은 평소 까불기만 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녀석이었다. 역시나

선생님은 녀석의 그림을 보시고 나서 다음 시간까지 더

그리라고 말씀하셨다. 멀찍이서 살짝 보였던 녀석의

그림은 역시나 형편없었다.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나가시자 무실이는 팔을 내리고 화장실에 가면서

생각했다.

‘다음 시간에 그리면, 오늘 그린 정물화를 어떻게 똑같이 그리지? 쟁반과 주전자, 컵의 위치를 어떻게 똑같이

기억하지? 또, 다음에 놓는 정물의 위치는 아무래도 오늘 거랑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 텐데.. 그러면 오늘 그린

아이들하고 다음에 그린 아이들하고 똑같은 그림이

안 나올 텐데..’

게다가 다음엔 한 시간 동안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오늘은 스케치만 한

아이들이 많이 유리할 것 같았다. 다음 시간엔 차분하게

색칠만 해도 되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선생님이

두 시간으로 나눠서 그린다는 말씀을 안 하신 거였다.

만약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두 시간 동안 그린 아이들과 한 시간 동안 그린 아이들의 그림은 많은 차이가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지 아까 수업이 끝날 때, 한 시간 동안 그리는 줄 알았던 아이들의 입에선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케치만 할 걸..’이라든가, ‘괜히 빨리 그렸네.’ 등등의.

오줌을 누면서도 무실이는 다음 미술 시간을 걱정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없는 크레파스와 물감이 새로 생길

턱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무실이는 미술 실기평가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무실이는 책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엄마에게 새 크레파스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엄마는

다짜고짜 조르는 무실이에게 ‘크레파스가 있는데, 왜 또 새 걸 사냐’고 하시면서도 무실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생각하셨는지, 그동안 썼던 크레파스를

가져와 보라고 하셨다. 무실이는 오래 돼서 색깔이

바래지고, 크레파스똥이 여기저기 묻은 크레파스

케이스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크레파스 케이스의 단추를 열고 안을 보았다. 스물네 가지 색 중에서 겉종이로싸여진 크레파스는 거의 쓰지 않는 어두운 계통의 세 가지 색뿐이었고, 나머지는 다 써서 겉 종이가 벗겨진

짜리몽땅한 크레파스들뿐이었다. 거기다가 검정, 노랑,

파랑색 등의 자주 쓰는 색깔의 크레파스는 아예 없었다.

무실이는 간절한 눈길로 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는 잠시 동안 말이 없으시더니,

- 아직 안 쓴 게 이렇게 많은데, 왜 또 새걸 사!

- 색깔 없는 게 많잖아? 다 부러지고..

- 없는 건 빌려 쓰면 되잖아.

- 애들이 안 빌려 준단 말이야.

- 왜 안 빌려줘? 네가 멍청하게 구니까 그렇지. 그냥 써!

무실이는 이미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매달렸다. 그건 미련이었다. 엄마한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간에 쫓겨서 크레파스를 빌릴 때의 그 가슴 졸임과 눈

한번 거들떠보지 않는 아이들에게 매달려서 동정을 구할 때의 그 굴욕감을……. 엄마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무실이는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엄마는 시끄럽다고,

그만 하라면서 ‘한번 안 된다면 안 된다고 했지?’ 하시며 짜증나는 얼굴로 언성을 높이셨다. 이때쯤이면 무실이는 단념해야 했다. 더 매달렸다가는 사정없이 두들겨 맞을 게 뻔했다. 하지만 무실이는 그만해야 할 때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졸라댔다. 조금만 더 조르면 엄마의 손이

빗자루를 잡는다는 걸 알면서도 무실이는 그 쓸데없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무실이의 입술이 계속해서

‘엄마 한번만~ 응?’, ‘엄마 한번만요~, 네?’를 반복하고

있는 동안에도 무실이의 머릿속에선 어제부터 오늘까지의일들이 차례로 스쳐가고 있었다. 성당에서의 그림 그리기대회부터 경식이, 보물찾기, 미술시간, 실기평가,

크레파스를 빌릴 때의 그 굴욕적인 비굴함 등이…….

마음속엔 이미 엄마한테 맞는다는 불안감을 넘어선 보다 큰 설움이 밀려들고 있었다. 무실이에게 새 크레파스는

맞는다 해도 조를 수밖에 없는 절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역시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빗자루를 들었다.

- 그만 하랬지! 어? 그만 하라고 몇 번을 말했어! 어?

라는 말과 함께 날아오는 나무 빗자루 손잡이에 무실이는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지만, 맞으면서도 무실이는 울면서 엄마에게 매달렸다.

- 엄마 한번만요~ 네?

평소 같았으면 엄마가 빗자루를 드는 동시에,

‘잘못했어요’라는 말이 나왔을 테지만 오늘 무실이의

애원은 그토록 처절한 것이었다. 엄마는 무실이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자, 그런 무실이의 태도가 더

괘씸하게 생각됐는지, 때리면 안 되는 곳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무실이가 맞는 매의 강도는 점점 더세졌고, 맞는 시간도 그만큼 더 길어졌다. 평소보다

두세 배를 더 맞고 나서야 무실이는 잘못했다고 빌었다.

무실이의 눈에선 엄마가 모르는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보기 싫었던지, 엄마는 울긴 왜

우냐고, 뭘 잘했다고 우냐고 또 매를 때리셨다. 무실이는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눈물을 참아야 했지만, 눈물은 쉽게 그쳐지지 않았다. 연신 침을 삼키며 눈에 힘을

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무실이의 애쓰는

모양을 엄마도 아셨는지, 엄마는 빗자루를 던지며

- 이거 갖고 꺼져! 아주 꼴도 보기 싫어!

무실이는 낡은 크레파스를 가슴에 안고 자기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꺼억꺼억 울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무실이는 터져 나오는 설움을 그냥 삼켜야 했다. 소리가 새어나가면 엄마는

아직도 우냐고, 뭘 잘했다고 꺽꺽거리냐고, 아직 덜

맞았냐고 빗자루를 들고 달려올 게 뻔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크레파스를 보는 무실이의 뺨 위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 어휴~, 애새끼라구..

무실이는 마냥 흘러내리는 눈물을 내버려두다, 마루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잔뜩 긴장해서 얼른 눈물을

훔치고 침을 삼켰다. 놀라서 그랬는지 눈물은 뚝

그쳤지만, 자꾸 목에서 새어나오는 진정되지 않은 설움은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기에

무실이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쩌다 엄마한테 맞고 방에서 또 울다가 걸리는 때가

있으면, 엄마는 사내새끼가 궁상떨고 있다며 ‘나가 죽어! 나가 죽어, 이 새끼야!’ 하면서 빗자루를 들 필요도 없이

주먹으로 머리랑 얼굴을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무실이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동안 다행히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마루를 지나는 발 소리, 신발 끄는 소리,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엄마는 무실이를 때려

놓고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지 밖에 나가시는 모양이었다. 무실이는 억지로 참고 있던, 저 가슴속 깊이로부터 입 안 가득 꽉 막혀 있던 신음을 토해냈다. 참았던 신음을

토해내자 딸꾹질 같은 소리가 나면서 어깨가 들썩거렸다. 무실이는 한동안 그렇게 몸으로 흐느끼며 울었다.


눈에서 눈물이 멈추고 딸꾹질이 가라앉았을 때..

무실이는 멍하니 크레파스를 보고 있었다. 졸린 것처럼

눈앞이 흐려지자, 무실이가 크레파스를 치우려고

일어서는데.. 일어선 무실이의 눈앞에 웃고 있는 예수님의얼굴이 들어왔다. 무실이가 그렸던 예수님 얼굴이었다.

무실이는 한동안 웃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벽에 붙여진 예수님 얼굴을 떼어들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 들어선 무실이가 부엌칼을 집어 드는데, 그 옆의 더예리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실이는 이미 들었던

부엌칼을 내려놓고 날카로운 과도를 집어 들었다. 과도를 집어 든 무실이는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그 예리한 칼날을 눈앞에 들이대고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무실이의 오른손이 순식간에 왼손에 들려진 도화지를 꿰뚫었다.

-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무실이의 손에 들려진 과도가 도화지 속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에 사정없이 꽂혔다.


5


무실이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도화지랑 과도는 바닥에떨어져 있었고, 뭔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무실이는 왼쪽 손가락 중 하나가 따끔하다는 걸 느꼈다. 동시에 손끝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느낌..

무실이는 정신을 차리고 왼손을 움켜쥔 채 부엌의 불을

켰다. 바닥에 핏방울이 흩어져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시뻘겋게 빛나는 핏방울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손을

살펴보니, 왼쪽 네 번째 손가락 끝이 안쪽으로 깊게 베어져있었다. 무실이는 다친 손가락을 입에 대고 피를 빨았다. 그리고 싱크대 물을 틀어 과도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원래 있던 자리에 두었다. 밖으로 나온 무실이는 휴지를 들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우선 다친 손가락을 휴지로 대충 싸고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닦았다. 바닥을 닦던

무실이는 흠칫 놀라서 뒤로 자빠졌는데, 사정없이

꿰뚫어진 도화지 속 예수님의 한쪽 눈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도화지를 들어 올리는 순간, 핏방울은

그대로 예수님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무실이는 섬뜩했다.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마치 살아 있는

예수님이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무실이는 얼른

도화지를 접고 또 접어서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무실이는 바닥의 핏방울이 다 닦였는지 확인하고,

싱크대에도 남아 있는 핏자국이 없는지 한번 더 살폈다.

부엌에서 나와 불을 끄고 나서야, 무실이는 비로소 자기가 한 짓을 깨달았다.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실이는 밴드를 찾아서 손가락에 감고 밖으로 나갔다. 예수님 그림을 버리기 위해서였다. 집안에 버렸다가

엄마가 보는 날엔 끝장이었다. 무엇보다 피 흘리던 예수님 얼굴을 집안에 둔다는 게 꺼림칙했다. 아무리 잘게 찢어서 버려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고, 엄마한테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밖으로 나온 무실이는 그림 버릴 곳을 찾았다. ‘남의 집 쓰레기통?’.. 엄마가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초조하게 버릴 곳을 찾고 있는 무실이의 눈에 맨홀구멍이 들어왔다. ‘옳지!’ 무실이가 마음을 정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맨홀이 너무 길 한가운데 있어서

사람들이 볼 것 같았다. 무실이는 좀 더 구석진 곳에 있는 맨홀을 찾았다. 맨홀 앞에 쪼그리고 앉은 무실이는 접었던 도화지를 꺼냈다. 그런데 맨홀 구멍이 생각보다 작아서

둘둘 말려 두꺼워진 도화지가 구멍에 잘 들어가질 앉았다. 도화지를 잘게 찢어서 넣으면 잘 들어갈 테지만, 누가 볼까마음이 급했던 무실이는 도화지 뭉치를 한꺼번에

넣으려고 애썼다. 억지로 밀어 넣어서 둘둘 말린 도화지

끝이 겨우 구멍에 들어갔지만, 손으로 아무리 눌러도 맨홀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가지 앉았다. 무실이는 마음이

급했다.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넣고 갔으면 좋으련만 뜻대로되질 앉았다. 이 구멍, 저 구멍.. 다 같은 크기의

구멍인데도 무실이는 자꾸만 이리 넣었다 저리 넣었다를 반복했다. 결국 무실이는 도화지를 꺼내서 꾹꾹 눌러 만

후에 다시 맨홀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구멍에 쏙

들어가진 않았다. 도화지 뭉치 끝을 맨홀 구멍에 맞추고

손으로 아무리 밀어 넣어도 완전히 들어가지 않자,

무실이는 도화지 뭉치를 발로 힘껏 밟았다. 힘을 줘서

밟았더니, 조금은 더 들어간 것 같았다. 무실이는 다시

한번 도화지 뭉치를 있는 힘껏 밟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맨홀 구멍 안으로 사라진 도화지에 마음이 놓인 무실이는

갑자기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집에 있는 내내 무실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손 다친

거야 대충 얼버무리면 그만이지만, 혹시라도 엄마가

예수님 그림을 찾을 경우엔 대답할 게 난감했다.

‘엄마가 갑자기 그 그림을 찾을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찾게 되면?..’

엄마가 집에 돌아오고 아빠가 퇴근하신 후에도 문제는

터지지 않았지만, 무실이는 시한폭탄처럼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고 나서야 무실이는 마음을 놓았다. 내일이라고 해서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오늘밤은 자면 그만이었다.

무실이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밤새 무실이는 악몽에 시달렸다. 피눈물을 흘리는

예수님이 손을 뻗으며 자꾸 무실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무실이는 도망쳤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가왔다.

- 아~악!

꿈에서 지른 비명인지, 잠을 깨면서 지른 비명인지

악몽에서 깨어나 불을 켰을 때 무실이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불도 축축했다. 잠꼬대 소리를 듣고 엄마가 방으로 오시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이

엄마는 오시지 않았다. 무실이는 새벽 내내 뒤척이며 끙끙 앓았다.


아침에 일어난 무실이는 몸이 영 개운치 않았다. 새벽

내내 끙끙 앓아서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이마에도

식은땀이 서늘하게 배어 있었다. 미술 실기평가가 있는

날인데, 이런 몸으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림 도구들도 형편없는데다, 시간도 부족할 걸 생각하니.. 무실이는 학교로 향하는 걸음 걸음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미술 수업시간이었다. 시간이 부족한 무실이는 모든 걸 빨리 진행했다. 마음이 급해선지, 몸이 안 좋아선지

손바닥에 자꾸 땀이 났다. 손에서 나는 땀이 도화지까지

적시는 바람에, 무실이는 밑그림을 그리는 데 꽤 애를

먹었다. 쉽지 않았던 스케치가 끝났을 때, 그림은 땀이

번진 탓에 좀 지저분하긴 했지만 색깔을 칠하고 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문제는 부족한 색깔의 크레파스와

물감이었다. 무실이는 주위를 둘러보다 뒷자리에 앉은

우성이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 우성아, 나 크레파스 좀 빌려줄래?..

- 써.

무실이는 조금 놀랐다. 평소에는 ‘네꺼 써!’라며 귀찮다는표정으로 무실이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녀석이 오늘은

무실이가 비굴한 애원의 눈길을 보내기도 전에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성이는 눈을 내리깐 채로 무실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했지만, 무실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아마 자기 그림 그리는 데 신경 쓰느라, 그런 걸로 실랑이하는 게 귀찮았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무실이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필요한 크레파스를 빌려서 색깔을 칠했다. 크레파스를 다 칠하고 나니, 이번엔

물감이 문제였다. 그냥 가지고 있는 색깔로 칠할지, 또

빌려서 칠할지를 망설이다가 무실이는 그냥 가지고 있는 물감을 짰다. 그런데 물감이 들어 있는 튜브에선 ‘퐁!’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만 나오고 물감은 나오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또 빌려 쓰는 수밖엔……. 이번엔

우성이한테 빌리기가 좀 뭣해서 짝꿍인 수옥이에게

빌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언젠가 한번 얘기를 꺼냈다가 무안을 당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자애한테 당하는 무안은 더 굴욕적이었고 수치스러웠다. 무실이는 열심히 물감을 칠하고 있는 수옥이의 물감통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옆 분단 준호한테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준호는 팔로 물감통을 막으면서,

- 싫어! 네꺼 써라~

무실이는 ‘또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돼나?’ 생각하니

눈앞이 흐려졌다.

- 내꺼 써.

무실이는 뒤를 돌아봤지만, 이번에도 우성이는 무실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무실이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우성이가 뭔가를 빌려주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실이는 의아해하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우성이의

물감을 몇 개를 가져다 썼다. 물감을 칠하면서 무실이는

오늘은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물감이랑 크레파스가 좀 묻긴 했지만, 무실이의 손에선 더 이상 땀이 흐르지

않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무실이가 온 신경을

집중해서 그림을 끝마쳤을 때, 시간은 6분이나 남아

있었다. 이제 물감이 마르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무실이는 물감이 빨리 마르라고 입으로 후후 불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완전히 마르진 않더라도, 도화지가

서로 겹쳐졌을 때 달라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실이는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걸 느꼈다. 그러다 문득, 시간에

쫓긴 탓에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자신의 그림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급하게 그리느라 세세하게 신경 쓰진

못했지만 주어진 시간과 조건에 비하면 만족스러웠다.

태도 점수에서 2점 깎인 걸 감안해도 10점 만점에

7~8점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저번 시간부터 그렸다고해도 이보다 더 잘 그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전 시간에 그린 그림을 무시하고 그림을 새로 다시 그렸다는 것도 큰 위안이

되었다.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저번 시간

정물하고 똑같은 물건들이었지만, 그때 놓였던 위치랑

완전히 똑같은 것 같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그런 걸 어떻게 구분해서 채점하지?’

때마침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그림을 걷어가자, ‘이제

끝났구나!’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홀가분해진 무실이는

한숨(과 함께 마음에 걸렸던 정물의 위치 또한 무실이의 머릿속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렸다)을 크게 내쉬었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던 수업시간 전과는 달리,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누가 왔지?’

현관을 있는 낯선 신발을 보고 무실이가 마루에

올라서는데, 수박이 든 상을 들고 엄마가 부엌에서

나오셨다.

-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마루에서 몇 발자국 떼었을 때, 안방에서

삼촌이 고개를 내미셨다.

‘무실이 왔니?’

셋째 외삼촌이었다. 무실이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삼촌이 온 것도 반가웠지만, 삼촌은 집에 오실 때 꼭

어린이 종합 선물 세트(여러가지 과자가 들어 있는

제과 선물 세트)를 사 오셨기 때문이었다.

- 삼촌 오셨어요?

무실이는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하고, 삼촌과 함께 마루에 앉아 수박을 먹었다. 수박은 방금 사와서 그런지 그다지

시원하진 않았지만 맛은 아주 달았다. 무실이는 수박을

정신없이 맛있게 먹고 웬만큼 배가 부르자 손을 씻고 와서 다시 앉았다. 무실이는 마루에 보여야 할 종합선물세트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엄마가 부엌에

감춰둔 모양이었다. 삼촌은 무실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공부는 잘하는지, 운동도 잘하는지,여자 친구가 있는지, 싸움은 몇 등 하는지 등등. 그런

질문에 때론 자신 있게, 때론 우물쭈물, 때론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고 있는데,

- 무실아, 너 예수님 그린 그림 좀 갖고 와 봐.

삼촌 좀 보여주게..

- !

무실이는 당황했다. 일단 그림을 가져온다고 방에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어떻게 하지?’

별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다. 방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엄마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거짓말?..’

무실이는 엄마가 부르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단 방문을 열었다.

- 엄마, 그림이 없는데?

무실이는 태연한 척 거짓말을 했다.

- 없어? 그게 왜 없어, 방에 붙여 놓은 게..

어디 떨어졌는지 다시 찾아 봐.

무실이는 난감했다. 엄마는 그 그림을 꼭 삼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벽에 붙여 놓은 그림이 없다는 게이상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랬다. 멀쩡하게 붙어 있던

그림이 없다는 건 어디 떨어졌든가, 누가 떼어갔든가 둘 중하나일 테니. 무실이는 다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일부러 책 따위를 어지럽히고 쓰러뜨리는 소리를 내면서 뭔가 찾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렇게 대충 찾는 척을

하다가 나와서는,

- 엄마, 없어. 책상 뒤쪽에 떨어졌나봐.

무실이는 벽과 책상 사이의 공책 한 권 들어갈까 말까하는 비좁은 틈을 핑계로 말을 얼버무렸다. 엄마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중에 다시 찾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무실이는 일단 안심했지만,

삼촌이 했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잘 그렸나 보지? 하긴 무실이는 집중력이 좋아서

잘 그릴 거야.’


삼촌은 가시기 전에,

- 무실이,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무실이는 역시 삼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삼촌의월급날이었다. 평소엔 무실이의 손에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 주고 가셨지만, 월급날엔 이렇게 무실이가 갖고 싶어 하는 걸 물으셨다. 무실이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 장난감!

무실이는 삼촌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다. 엄마는 삼촌이 무실이 손을 잡고 문구점에 갈 때마다.. 그냥 가라고,

쓸 데 없는 데 돈 쓰지 말라고 극구 말리셨지만, 삼촌은

장난감도 창의력을 심어주는데 도움이 된다며 무실이의

편을 들어주셨다. 엄마가 극구 말리면서 삼촌에게 그냥

가라고 할 때마다 무실이는 내심 불안했지만, 삼촌은

한 번도 무실이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엄마는 무실이가 손에 장난감을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집에 잔뜩

있는 장난감은 갖고 놀지도 않으면서 돈 아깝게 왜 또

사냐?’고 하시면서도 조카에게 좋은 삼촌이 돼 주는

동생에게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삼촌의 손을 잡고 문구점으로 향하는 무실이의 머릿속은 행복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무얼 살까?..’

문구점 앞에 도착한 무실이는 진열장으로 보이는 새로

나온 장난감들을 구경했다. 삼촌이 무실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 무실아, 들어가서 봐.

문구점 안에 들어온 무실이는 새로 나온 장난감 중에

어떤 걸 사야할 지 고민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이 아주

길게 느껴질 만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진열된

장난감들을 따라 움직이던 무실이의 눈에 크레파스가

들어왔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무실이의 시선은 다시

크레파스를 향하고 있었다. 무실이는 이제 반대로

장난감들을 애써 외면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크레파스지만, 자기가 결코 그 물건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없다는 걸 무실이는 잘 알고 있었다.

- 삼촌, 나 크레파스 사 줘요.

삼촌은 의외라는 듯, 엄마한테 혼날까봐 그러냐고, 그냥 갖고 싶은 거 집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무실이는 고개를

저으며

- 크레파스 사 주세요. 집에 있는 거, 다 써서 이젠

못 써요.

- 그래? 그럼, 크레파스 골라봐.

무실이는 크레파스들 중에서 요즘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24색 티티파스를 골랐다. 옆에 있는 48색

크레파스를 갖고 싶었지만, 비쌀 것 같아서 24색을

골랐다. 그런데 삼촌은 무실이가 집은 24색 크레파스를 내려놓고 48색 크레파스를 무실이 손에 쥐어 주셨다.

- 큰 거 사! 그래야 색깔도 많고 오래 쓰지.

무실이는 삼촌이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동시에 무실이의 머릿속에선..

‘물감도 하나 샀으면 좋겠는데.. 12색짜리라도..’

그렇지만 무실이의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사실 48색 크레파스 대신 24색 크레파스와

12색 물감을 사더라도 삼촌이 쓰는 돈은 큰 차이가 없을 터였지만, 왠지 모르게 무실이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금색, 은색 등 24색 크레파스에는 없는 다양한 색깔이

들어 있는 48색 크레파스를 가슴에 안고 집 앞까지 온

무실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24색 크레파스를 사고

물감을 하나 더 살 걸..’하는 미련도 남아있었고,

‘크레파스가 아직 있는데, 왜 또 새 걸 샀냐’고 엄마한테

꾸중들을까 봐 걱정도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예수님 그림이었다. 제발 엄마가 그 그림에 대해선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엄마는 크레파스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조용히

넘어가셨다. 아직 크레파스가 있는데 왜 또 샀냐는, 쓰던 거 다 쓰고 새것 쓰라는, 삼촌은 돈도 없으면서 왜

48색씩이나 사 줬냐는 등의 잔소리가 좀 있었지만..

그래도 무실이가 장난감을 사지 않고 크레파스를 산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시는 것 같았다. 엄마는 삼촌이 사 준

크레파스를 좀 보시더니, 쓰던 거 다 쓰고 쓰라는 말씀을 한번 더 하시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 엄마, 대영이네 갔다 올 테니까 공부하고 있어~

아, 그리고 예수님 그린 거 다시 찾아 봐. 방에 붙어있던. 게 도대체 어디 갔어? 엄마 올 때까지 찾아 놔!

무실이는 또 다시 눈앞이 캄캄했다. 엄마가 나간 걸

확인한 무실이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떤 핑계를 대야할지, 어떤 거짓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싸잡고 방바닥을 굴러 봐도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무실이는 걱정과 두려움, 초조함 때문에 자꾸 신경질이 나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스스로의 짜증과 화를 참지 못하고 있는데.. 그때, 삼촌이 사 주신 새 크레파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무실이는 삼촌이 사 준 크레파스와 어린이 미사 책,

스케치북을 앞에 가져다 놓고는 숨을 한번 크게 쉬더니

다시 예수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생각처럼 잘 그려지지 않았다. 스케치북 몇 장을 버렸지만, 엄마의 눈을 속일 만큼의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건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눈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눈을 그릴 때마다, 자꾸 꿈에서 본 피 흘리던

예수님 얼굴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엄마는 대영이네서 저녁 먹을 시간에야 돌아오실 터라 시간은 아직

충분했지만, 무실이는 초조했다. 자기가 보기에

그럴 듯하면 엄마도 속아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기가 보기에도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무실이는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그림을 그렸다. 연필로

그린 스케치를 몇 번씩 지워가면서…….


그림을 바라보는 무실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번엔흡족했다. 오히려 저번 그림보다 더 잘 그려진 것 같았다. 색칠.. 색칠만 조심스럽게 완성하면 끝이었다. 무실이는 다시 차분하게 숨을 가다듬고 선과 선의 경계부터 칠했고, 결과는 거의 완벽했다. 삐져나간 부분이 약간 있긴 했지만 그다지 표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저번 그림보다 더

깨끗했다. 문제는 무실이의 손에서 나오는 땀이었다.

손에서 나온 땀이 자꾸 스케치북을 적셔서 종이를 울게

만들고, 크레파스로 그린 경계선에 닿아 지저분하게

번졌다. 그래서 무실이는 경계선 안쪽을 칠할 때는 아예

손바닥 부위를 휴지로 감싸고 칠했다. 다른 부분을 다

칠하고 눈과 머리 부분만 남게 되자, 무실이는 부위가 좁은눈부터 조심스럽게 칠했다. 자꾸 꿈에 보였던 예수님의

눈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무실이는 머리를 흔들며

그림에 집중했다. 눈을 다 칠하고 머리만 남겨 놓은

무실이는 기분이 좋았다. 머리 부분은 면적이 넓어서

칠하기 어렵지 않은데다, 이미 경계선을 그려 놓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칠할 수 있었다. 무실이는 검정

크레파스를 예수님 머리에 갖다 댈 때, 불현듯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혹 실수한 게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실수를 발견하진 못했다. 그래도

뭔가 께름칙한 기분으로 크레파스를 칠하는데.. 자기 주먹만큼의 공간을 칠했을 때, 비로소 무실이는 그 찜찜했던

기분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먼저 그렸던 그림은 검정색 크레파스가 없었기 때문에 머리를 갈색으로 칠했던 것이다. ‘아차!’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무실이는 갈색 크레파스를 검은색 위에

급하게 덧칠했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패착이었다.

아무리 갈색 크레파스를 꾹꾹 눌러서 검정색 위를 덮어도, 칠하면 칠할수록 색깔은 더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무실이는 허탈했다. 지금껏 애타게 그린 그림이 다 허사가 된 것이었다. 이제는 시간도 많지 않았고, 시간이

충분하다 해도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또 다시 똑같이 그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무실이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머리 부분의 남은 색을 갈색으로 칠했지만, 덧칠한 부분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어쩌면 엄마가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져 보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근심하던 무실이에게 퍼뜩 떠오른 생각은.. 다시 검정색 크레파스로 갈색 위를 덧칠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색깔이 왜 이러냐?’고 물어보면, 검정색이 없어서 갈색으로 칠한 부분을 다시 검정색으로 칠했다고 하면 될 것 같았다. 무실이가 다시 검정색 크레파스를 갈색으로

칠해진 부분 위에 대고 꾹꾹 눌러서 덧칠을 하는데,

‘아뿔싸!’ 무실이가 크레파스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무실이의 땀으로 젖어 있던 도화지가 찢겨져 나가면서

크레파스가 부러지고 말았다. 갑자기 열이 확 오른

무실이는 부러진 크레파스를 그림에다 닥치는 대로 그어버리고 신경질적으로 그림을 구겨버렸다.

‘아차! 찢어진 건, 다시 칠하다가 그랬다고 말하면 될

것이었는데..’

엄마가 알면 가만히 계시지 않을 터였다. 그림이 진짜고 가짜고를 떠나, 엄마가 절대적으로 믿는 예수님 얼굴을

마치 저주라도 퍼붓듯 엉망으로 만들고 구겨버렸으니…….

이 모든 결과는 비단 찢어진 스케치북과 무실이의

신경질만이 빚어낸 결과는 아니었다. 쫓기듯 불안하고

예민해진 심리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무실이가 신경질을 내도록 극도로 예민해진 이유도, 충분히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던 이유 또한 모두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무실이는 다시 냉정을 찾으려

애쓰면서, 이미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그림을 펴서 또 다른변명거리를 생각했다.

‘원래 있던 그림에다 검은색을 칠하다가 그림이 찢어지는 바람에, 갑자기 신경질이 나서 구겨버렸다?..’

무실이는 변명이 너무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무실이는 결국 마지막 선택을

했다.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이었다.


6


그림은 최악이었다. 지금껏 그렸던 어떤 그림보다도

엉망이었다. 초조함 탓인지 손에 흐르는 땀은 더

많아졌고, 그래서 도화지는 스케치 하다가 찢어질 정도로 젖어 있었다. 연필로 그리다 찢어지고 지우개로 지우다

찢어지고.. 그림은 자꾸 엉망이 되어 가는데, 엄마가 올

시간은 다 돼 가고 있었다. 무실이는 몇 번씩이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림은 갈수록 엉망이었다. 짜증이 날수록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지고, 엄마가 올

시간은 다 돼 가고..


‘공부하냐?’라는 말과 동시에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그림 그리는 데 너무 열중했던 나머지 무실이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 바람에 그림 그리는 모습을엄마에게 들키고 말았다.

- 뭐하냐?

- !

무실이는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정신이 붕 떠버린

상태였다. 생각을 정리하고 상황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무실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엄마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무실이의 당황하는 모습과 바닥에 널려 있는 그림을

보고는

-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응!

- …….

- 너 이리 와 봐!

‘이젠 죽었구나..’

이제 맞고 안 맞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나 맞느냐가 문제였다. 조금 맞고 꾸중 듣다 끝나느냐, 죽도록 맞고 또 맞느냐..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후자 쪽이 확실했다.

- 이리 와서 앉아 봐.

엄마는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차갑고 냉랭하게 말했다.

- 너, 지금 뭐하고 있었어?

- 그림 그렸어요.

- 무슨 그림?

- 예수님 그림이요..

- 그걸 왜 또 그려?

- …….

- 너 찾으라는 거 찾았어?

무실이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그 그림 어쨌어?

- 없어요..

- 벽에 붙어 있던 게 어디 갔어! 그림에 발이 달렸냐?

멀쩡하게 붙어있던 게 어디 가! 왜 없어?

- …….

- 너 솔직하게 말해 봐, 그 그림 어쨌어?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가 안 때릴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무실이는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준다고 할 때마다

엄마를 믿고 사실대로 말했었지만, 엄마가 약속을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실이는

갈등하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가 정말로 안 때릴지

모른다는 기대와, 어차피 걸린 거 괜히 어설프게 숨겼다가 나중에 더 크게 맞는 것보다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매 번 속지만 매 번

갈등하듯 이번에도 무실이는 그 갈등 속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무슨 말이든 빨리 대답해야 했다.

우물쭈물하다간 매가 먼저 날아올 게 뻔했다. 아직 엄마는 손에 빗자루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언제 그 손에 빗자루가쥐어질지 몰랐다. 결국 무실이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괜히 어설프게 거짓말했다가 걸리면 뼈도 못 추렸다.

거기다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부풀어서, 결국엔 거짓말이 또 거짓말을 낳고.. 또 다른 거짓말거리를 생각하느라

불안해하고 골머리를 앓느니, 차라리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무실이의 그런 생각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기보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 버렸어요..

- !.. 버렸어?

엄마는 단지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으로 무실이를 찔러본 것이었는데, 막상 무실이의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오자

‘이것 봐라..’

엄마는 무실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멀쩡한

그림을 버리고 다시 그리는지, 도대체 벽에 붙어 있던

그림은 왜 버렸는지 등등. 안색이 변한 엄마는 일단

무실이가 그리던 그림을 가져오라고 했다. 무실이는

스케치북을 들고 방에서 나가려다 잠시 멈칫했다. 망쳐서구겨버린 그림도 가져가야 하나 어쩌나를 망설이고

있는데, ‘빨리 안 와!’라고 소리 지르는 엄마의 째진

목소리가 들렸다. 무실이는 엉겁결에 구겨진 그림도 주워들었다. 엄마가 방문을 열면서 구겨진 그림을 봤는지

안 봤는지 모르지만, 혹 봤는데 안 갖고 갔다간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랐다. 무실이는 무거운 마음으로

스케치북과 구겨진 그림을 들고 다시 안방으로 갔다.

엄마는 스케치북을 한 장씩 들춰보며 물었다.

- 너 이거 왜 그렸어?

- 엄마한테 혼날까 봐요.

- 왜 혼나?.. 네가 뭐 잘못한 게 있으니까 또 그린 거

아냐?

무실이는 뜨끔했다.

- …….

- 이거 왜 그렸냐니까?

- 그림을 못 찾아서, 엄마한테 혼날까봐..

- 너, 그림 버렸다며?

- …….

무실이는 혼란스러웠다. 사천왕(四天王)보다 무서운

엄마의 표정 때문에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됐다.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말의 앞뒤가

맞는지 불안하기만 했다.

- 그건 뭐야?

‘아차! 가져오지 말 걸..’

무실이의 손에서 그림을 빼앗아 펼쳐 본 엄마의 눈이

확 뒤집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에 불을 켜고

무실이를 다그쳤다.

- 너, 이거 뭐야? 이거 왜 이렇게 했어? 어!

무실이는 머릿속이 캄캄했다.

‘이젠 정말 죽었구나..’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죽도록 맞는

수밖에는.. 순간, 무실이의 머릿속에선 아쉬움의 탄식이 스쳐지나갔다. 엄마는 문제의 구겨진 그림을 못 봤었다는 것, 혹 봤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그걸 괜히 들고 와서 일을 크게 만든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엄마는 벌써

빗자루로 무실이를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가 진짜 크게 화가 난 이유는 멀쩡한 그림이 없어진

때문도 아니고, 무실이가 그림을 다시 그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멀쩡하게 붙어있던 그림을 떼어내서 마치

저주라도 하듯 예수님 얼굴에 낙서를 하고 구겨버린 것’

에, 그리고 ‘그림을 숨겨 놓고는 버렸다고 거짓말 한 것’에 화가 난 것이었다. 엄마에게 있어 무실이의 잘못은

신성 모독과 범죄 은닉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그 구겨진 그림을 벽에 붙어 있던 그림으로 착각하고

계신 것 같았다. 무실이는 정신없이 맞으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 게 있었다. 칼로 사정없이 쑤셔 넣은

그림.. 그것에 대해선 엄마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엄마가 그것까지 알았다간 무실이는

정말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지금 맞는 매만 해도

무실이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엄마는 나무 빗자루로

무실이를 사정없이 때리면서 다그쳤다.

- 왜 그랬어? 왜 예수님 얼굴에다 낙서하고 구겼어? 어!. 빨리 말해! 빨리 말 안 해!

엄마는 무실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때리면서 계속 똑같은 대답을 요구했다. 몇 번씩 말할 기회를 놓치다가, 무실이는 눈물범벅이 된 채 울먹이며 겨우 ‘화가 나서..’

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엄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더 세게 빗자루를 휘둘렀다. 나무 빗자루의 묵직한

손잡이가 무실이의 정강이뼈나 손가락에 부딪칠 때마다 뭔가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엄마는 매를 멈추지 않았다.

-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네? 엄마..

- 뭐가 화가 나? 어? 뭣 때문에 화가 나? 어!

- 그냥..

- 빨리 말 안 해!

무실이는 그렇게 쉴 새 없이 맞으면서, 왜 화가 났는지에 대한 변명까지 찾아야 했다. 엄마는 잠시 매를 멈추고,

- 뭔데? 왜, 뭣 때문에 화가 났는데? 말해봐. 어!

- …….

- 말해보라니까!

- 크레파스 안 사줘서..

- 뭐?

엉겁결에 불편한 진실의 일부분을 말해버린 무실이의

대답에 엄마의 매는 또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무의식적으로 크레파스 때문이라는 말을 뱉어버린

무실이는 정말로 서러워서 눈물을 흘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매 맞는 게 아파서 찔끔거리던 눈물은 이제 정말서러워서 흐르는 눈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꼬라지를 보고엄마는 더 화가 나서 더 세게 매를 휘둘렀다.

- 뭘 잘했다고 울어, 이 새끼야! 어! 뭘 잘했다고 울어!

무실이는 김밥, 도시락, 크레파스, 경식이, 음료수,

보물찾기, 선생님한테 들은 ‘나쁜 아이’라는 말, 실기평가..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라 정말 서럽게 울었다. 이제 무실이는 사정없이 날아오는 매도 아프지

않았다. 하도 맞아서 감각도 없을 뿐더러, 그 서럽게

초라했던 지난 일들이 억울할 뿐이었다. 무실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 오른 눈으로 엄마를

노려보았다. 무실이의 입에선 더 이상 잘못했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맞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정없이 매를 때리던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무실이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자, 잠시 매를 멈추고 무실이의 얼굴을 보았다. 무실이의 살기(殺氣)

어린 눈에 깜짝 놀란 엄마는 잠시 멈칫하다가 도끼눈을

뜨고 더 세게 매를 휘둘렀다.

- 이 새끼가 뭘 잘했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 덤벼!

- 거짓말쟁이!

순간 무실이의 입에서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했다. 그

절규에 깜짝 놀란 엄마는 뒤로 주춤했다.

- 거짓말쟁이! 엄마.. (훌쩍)물통.. 시장에서 사왔다고..

(훌쩍)바이오 물통이라고.. (훌쩍)그거 거짓말..

(훌쩍)애들이 놀려서.. (훌쩍)그거 공짜로..

(훌쩍)시장에서 공짜로 주는 거라고..

(훌쩍)창피만 당하고.. (훌쩍)김밥도 안 싸주고..

(훌쩍)크레파스랑 물감도..

안색이 돌변한 엄마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표정으로

다시 빗자루를 들었다. 엄마가 있는 힘을 다해서 휘두르는 매가 무섭게 무실이에게 떨어졌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있는 힘껏, 사정없이 때리기만 했다.

무실이는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움에 북받쳐 억눌린 감정을 토해냈지만, 아무 말도 없는 엄마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무실이는 이렇게 매를 맞다간 정말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있고 있었던

고통이 쓰라림으로 변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감각마저 없어진 살이 시커멓게 부어올라 터지고, 잘못 맞은 손가락 뼈마디는 퉁퉁 부어올랐다.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같이 아팠고, 막 죽을 것 같이 아팠다. 나무 빗자루

손잡이에 뼈가 부딪치는 소리는 점점 심해졌고, 무실이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 희미하게 내뱉었다.

- 엄마 나 아파요..

무실이는 정말 아팠다. 온몸에 냉기가 돌고 식은땀이

쏟아지던.. 예수님 눈에서 피가 흐르던 그때의 악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7


무실이는 몹시 앓았다. 입에서는 신음이 새어 나왔고

이불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어미 잃은

강아지가 흐느끼는 것 같은 가냘픈 신음을 흘리며,

무실이는 자꾸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몸을 옴작거렸다.

- 아파요.. 엄마 나 아파요..

잠꼬대 소리에 깰 때마다 무실이의 감은두 눈에서는 어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추운지 새우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움츠리고 떨다가 또 잠꼬대가 시작되면, 무실이는 애원하듯 고개를 흔들며 영혼의 신음을 토해냈다.

- 아파요.. 엄마, 나 아파요..


무실이가 잠을 깬 건, 엄마가 깨워서였다. 엄마는 온몸에땀 냄새를 풍기며 일어난 무실이에게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무실이는 몽롱한 정신으로 엄마를 쳐다보았지만,

엄마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무실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빨리 나와! 밥 먹고 자.

무실이는 축축하게 젖은 옷 때문에 으스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에는 종아리 살이 터져서 나온 진물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종아리에선 또 다시 노란 진물이

흘러나왔다. 절룩이며 들어간 안방에는 밥상 위에 밥이

두 공기만 놓여 있었다.

- 아빠는요?

- 야근이야. 먹어.

무실이는 숟가락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빗자루에

맞은 오른손 손가락들이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었다.

손가락이 구부러지지도 않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너무

아팠다. 간신히 엄지와 검지로 숟가락을 잡았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는 무실이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 밥에반찬을 올려 무실이의 입에 직접 넣어 주었다. 무실이는

억지로 입을 벌렸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꼭꼭 씹어서 억지로 삼켰지만 계속 목에 걸린 듯 답답했다.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야 목구멍이 좀 뚫린 듯 했다.

무실이는 입맛이 없었다. 하도 맞아서 그런지 식욕도

없었고,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먹는 게 고통이었다.

게다가 엄마가 직접 밥을 입에 넣어 주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 엄마, 나.. 더 못 먹겠어요..

엄마는 무실이의 입에 넣어 주려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내밀었다. 무실이가 물을 다 마시자,

- 가서 자.

평소 같았으면 끝까지 다 먹으라고 했을 테지만, 엄마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무실이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는 그때까지 한 술도 뜨지 않았다.


- 무실아, 무실아.. 일어나 봐. 무실아!

엄마는 무실이의 어깨를 잡고 몇 번이나 흔들었지만

무실이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원래 무실이는 한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을 자는데다,

오늘 하루는 무실이에게 너무 고단한 하루였다. 엄마가

계속해서 깨우는 바람에 반쯤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무실이는 아직 정신이 없었다. 엄마는 무실이가 눈을

비비는 걸 보고 일어서며 말했다.

- 안방으로 와 봐.

안방 문 앞에는 하얀 비닐봉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무실이는 문 앞에 서서 눈을 깜빡이며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풀어 봐.. 먹어..

무실이는 이불 위에 앉아서 비닐봉지를 풀었다. 전부

과자였다. 무실이가 좋아하는……. 평소에 무실이가 제일 먹고 싶었던 것들만 있었지만 무실이는 달려들지 않았다. 자다 일어나서 입맛도 없는데다, 막상 이렇게 많은 걸 보니무얼 먹어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무실이가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있으니까,

-먹어. 왜 안 먹어? 저녁도 안 먹어서 배고프잖아.

사실 배는 고팠다. 하지만 입맛이 없었다. 뱃속은

허기졌지만 입 안은 모래라도 씹은 것처럼 꺼끌거렸다.

평소에 그렇게 먹고 싶었던 것들.. 아빠가 월급이라도

타야 사주던 것들이 오늘은 한꺼번에 몽땅 눈앞에

있는데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래도 무실이는 엄마의 미안해하는 마음을 아는지라, 초코파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과자는 입 안이 꺼끌거려서 못 먹을 것 같았다.

초코파이를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무는 무실이의 손가락은 전보다 더 퉁퉁 부어있었다. 넷째 손가락이

엄지손가락만큼 컸다. 무실이가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자, 엄마는 부엌에서 컵을 가져와 쿨피스를 따랐다.

- 천천히 먹어.

- 엄마는?.. 엄마도 먹어요..

무실이는 초코파이 하나를 다 먹고 쿨피스도 한 잔 다

마셨다. 무실이가 다 마신 컵을 바닥에 내려놓을 때,

무실이는 매를 맞은 이후로 처음으로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의 눈은 눈물이 글썽거려 곧 넘쳐날 것

같았지만, 엄마는 무실이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실이는 방금 내려간 초코파이가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온 것처럼 목이 메었다.

- 다 먹었어? 더 먹어, 왜 더 안 먹어? 딴 거 먹을래?..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 그만 먹을래요.. 배불러..

무실이의 목소리도 떨렸다.

- 그래, 그럼 가서 자.

- 네..

무실이는 엄마한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왔다.

- 무실아, 양치질 하고 자.

- 네.

무실이는 화장실 문을 닫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양치질을 하면서 소리 없이 울었다.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 안녕히 주무세요.

양치를 마치고 나온 무실이는 간신히 울음을 참고

말했지만 말끝이 흔들렸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무실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 무실아, 안방에서 자. 아빠 야근하니까..

무실이는 엄마랑 같이 자는 건 좋았지만, 눈에서 자꾸

넘쳐나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눈에 힘을 꾹 주고 절룩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 이리 와 봐.

엄마는 손에 안티프라민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무실이의옷을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긴 채, 새까맣게 멍이 든

맷자국에다 안티프라민을 발라주셨다. 엄마가 연고를

바르며 아픈 곳을 건드릴 때마다, 무실이의 입에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갗이 터져서 진물이 나는 곳은 약솜으로

닦아내고 연고를 발라 주셨다. 약솜으로 상처를 닦을 때는 너무 아파서 신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약을

발라 주면서도 무실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무실이는 고개 숙인 엄마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꾸 눈에 고인

눈물이 넘치려는 걸 몇 번씩 참아 내야 했다. 엄마는

무실이에게 연고를 다 발라주시고는 자라고 했다.

무실이는 엄마 베개 옆에 자기 베개를 갖고 와서 누웠다. 엄마는 방 안에 있던 비닐봉지를 부엌으로 들고 가시며

안방의 불을 껐다. 무실이는 눈을 감았다. 부엌의 불 켜는 소리, 비닐봉지 소리.. 냉장고 여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무실이는 졸렸다. 하지만 엄마가 들어오면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졸음을 꾹 참았다. 엄마는 한참

후에야 들어왔는데, 무실이는 자기가 아주 잠깐 동안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 무실이.. 자니?..

- 아니..

- 자..

- …….

엄마.. 나.. 엄마 젖 한번 만져 보면 안 돼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무실이도 엄마와 등을 맞대고 돌아누웠다. 돌아누운 무실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베개를 적셨다.

무실이의 눈이 스르르 감길 때.. 돌아누운 엄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무실이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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