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臭
은우는 한동안 외로웠던 등굣길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광일이 때문이었다.
광일이는 주위에 친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광일이와
친구가 된 아이들은 얼마 안 돼서 더 이상 광일이와 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은우도 금방 알게 되었는데, 그건
광일이의 입냄새 때문이었다. 광일이와 친해진 이후로도 은우는 광일이와 마주보고 얘기하는 게 곤욕이었다.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와 변소에서 나는 구린내가
광일이의 입에서 한꺼번에 났기 때문이었다. 그 냄새가
얼마나 역했는지, 은우는 광일이와 얘기하다가 넘어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광일이와 같은 반도 아닌 은우가 친구가 된 데는 나름
사정이 있었다. 원래 은우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서 친구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 외톨이가 되었다. 그건
하굣길에 지나치는 분식 가판대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집에 가는 길에 문방구 앞에 있는 분식 가판대에서
떡볶이도 사먹고 불량 식품 같은 군것질도 했는데, 은우는 돈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사 줄 테니까 같이 먹자’고 해서 몇 번 같이 먹은 게
화근이었다. 처음엔 돈이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거절했던 은우도, 친구들이 ‘친구끼리 뭐 그런 걸 따지냐’며 억지로 끌고 가자 못 이기는 척 같이 먹었드랬다. 은우는
군것질맛에, 그리고 공짜라는 즐거움에 몇 번 더
따라갔다가.. 나중엔 염치가 없어서 빠졌었다. 그런데
녀석들은 어디서 그렇게 돈이 나는지, 매일 같이 분식
가판대 앞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날도 은우는
군것질하는 친구들과 엮이기 싫어서 일부러 학교에서
천천히 나왔다. 문방구 앞에는 어김없이 친구들이
뒷모습을 보이며 떡볶이랑 튀김을 먹고 있었다. 은우는
친구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재빨리 그 앞을 지나쳤는데,
- 야, 김은우! 이리 와! 떡볶이 같이 먹자.
- 아냐, 나는 됐어. 빨리 가봐야 돼. 너네끼리 먹어.
- 야! 김은우. 너 우리한테 그만큼 얻어먹었으면, 너도
한 번쯤 사야 되는 거 아냐?
은우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이런 때를
생각해서 엄마한테 용돈 좀 달라고 했었는데, 엄마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은우가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며
애원했지만, 엄마는 ‘누가 거지처럼 얻어먹고 다니래?’.. 이한마디로 끝이었다.
- 미안해.. 나 지금 돈이 없어. 나중에 돈 생기면 그때
내가 살게.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구시렁대더니,
- 야, 김은우! 치사해서 너한텐 안 얻어먹는다.
이 그지새꺄!
다른 녀석들도 한마디씩 했지만, 은우는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 그런 소릴 들었으면 당장 달려가서 두들겨 패 주었을 테지만, 모욕감과 수치심에 상처 입은
은우의 주먹엔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 뒤로도 녀석들은
은우를 비방했고, 심지어 학교에 ‘얻어먹기만 하고 사지는않는 거지새끼’라는 소문까지 퍼뜨리고 다녔지만.. 은우는그럴수록 밖으로 대항하기보다 안으로 움츠렸다. 힘으로 충분히 자기들을 제압할 수 있는 은우가 움츠리는 게
재밌었는지, 녀석들은 한술 더 떠서 있지도 않았던
일들까지 과장되게 부풀려 퍼뜨리고 다녔다. 무의식중에, 눌려 있던 힘의 열세를 그런 식으로라도 뒤집어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은우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몽땅 다 밟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다가도 이내 수그러들었다. 이제 와서 보복을 하면 지금의 모든 소문이 다
진실이 돼 버릴 것 같아서이기도 했고, 거지 같이 얻어먹는것도 모자라 두들겨 팼다는 소문까지 더해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크게 은우의
정신 속에 작용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수치심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키고 영혼까지 좀먹는 금전적
빈곤이었다. 그렇게 은우가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소문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은우는어느덧 남자애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여자애들
사이에서조차 좀스럽고 치사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다른 반 아이들까지 지나가는 은우에게 보이지
않는 손가락질을 하며 귓속말을 해댔고, 은우는 어느 순간 완전한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 은우에게 먼저 다가온 게 광일이었다. 몸집이 좀 있을 것 같은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비쩍 마른 광일이가 어느 날 혼자 집으로 가고 있는 은우에게 뛰어와서는 먼저 아는 척을 했다.
- 너, 이름 은우지? 유 은우..
- ?
- 나는 광일이야. 김광일..
은우는 처음 보는 사람에겐 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
어색하고 불편했다.
- 근데,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 친구들이 네 이름 부르는 거 들었어. 너 짬뽕(야구 배트 없이 맨주먹으로 하는 야구 놀이. 규칙은 야구와 거의 같음) 되게 잘 하더라. 너 1학년 4반이지? 나는 1학년
2반이야.
은우는 뭔가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이내 잊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광일이와의 만남은 매일 아침 학교에 같이 가는
것으로 이어졌다. 은우보다 아랫동네에 사는 광일이가
매일 아침 은우네 집 대문 앞에서 은우의 이름을 불렀다.
- 은우야, 학교 가자~
본의 아니게 외톨이가 되었던 은우에게 광일이는 큰 힘이되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친구들 모두가 적으로
느껴지던 은우에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큼 힘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같이 다니기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은우는 광일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불쾌했던
냄새가 광일이의 입냄새라는 걸 알았지만,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독하고 역한 냄새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은우는 처음엔 등굣길만 광일이와 같이
다녔고, 하굣길에는 시간이 맞을 때만 같이 다녔다.
하지만 광일이는 자신이 먼저 끝나면 은우를 기다렸고,
조금 늦게 끝나더라도 먼저 가는 은우를 뛰어서 쫓아왔다. 그렇지만 실상 하굣길에 은우와 무실이가 같이 가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부를 못하는 광일이가 거의 매일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은우가 숙제부터 하고 나서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광일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처음 한두 번은 광일이도 끼어서 놀았는데, 뭐든 잘하는 은우에 비해
광일이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누가 뭐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감을 잃은 탓인지 이후로 광일이는 놀이에는 끼지 않고 구경만 했다. 은우는 그런 광일이가
안 돼 보여서 같이 놀자고 몇 번이나 더 말했지만,
광일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대신, 은우가
노는 게 끝나고 헤어질 때까지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바닥에 손가락 그림을 그렸다. 은우와 헤어지고 나서도 광일이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는 듯했다. 가끔 은우가
심부름을 하러 나갔다가 그때까지 집에 가지 않고
배회하는 광일이를 본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광일이는 놀고 있다고 말했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전혀 노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꼭 갈 데가 없어서
방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 은우야, 우리집에 놀러 올래?
- ?
은우는 의외였다. 광일이가 은우네 놀러 온 적은
많았지만, 은우가 광일이네 놀러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에 몇 번 은우가 놀러 가자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광일이는 엄마가 자고 있어서 안 된다고 했었다. 광일이네 엄마는 밤에 회사에 나가기 때문에 낮에는
집에서 잔다는 것이었다.
- 너네 엄마 집에서 안 자?
- 어, 엄마 우리 아빠 보러 갔어.
- 아빠?
- 어, 우리 아빠 광부거든.
- 광부?
은우는 광일이네 아빠가 멋지게 느껴졌다. 회사에 다니는 보통 아빠들과는 다른 특이한 직업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광일이네 집에 간 은우는 많이 당황했다. 대문도 마당도 없는 데다가 방이 너무 지저분했기 때문이었다. 광일이와광일이 엄마의 옷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벽에는
도배지 대신 신문지가 누더기처럼 붙어 있었다. 광일이는 조금 창피했던지, 은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집 구조도 특이했다. 하나뿐인 방 한가운데에는 집 밖에 있어야 할 광이 있었다.하나뿐인 방 한가운데 광이라니.. 게다가 광 벽면은
페인트도 칠해져 있지 않은 시멘트 그대로였다.
- 배고프지?
광일이는 안방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갔다. 안방과 문
하나로 연결된 부엌도 지저분하긴 마찬가지였다. 미뤄
놓은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고, 음식물 찌꺼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당장 어디서 쥐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은우는 광일이네 집에 온 걸 후회했다.
- 잠깐만 기다려. 밥상 금방 차릴게.
- 어..
은우는 엉겁결에 대답했지만, 더러운 부엌을 보고 식욕이뚝 떨어졌다. 광일이는 금새 밥 두 공기에 김치 한 접시가 놓인 밥상을 들고 왔다. 밥상엔 국도 없었고, 반찬도
김치가 전부였다. 달랑 김치뿐인 밥상에 당황했지만,
은우는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숟가락을
들고 보니, 잘 닦이지 않았는지 고춧가루가 묻어 있었다. 은우는 가뜩이나 밥맛이 떨어지던 차에 그나마 있던
식욕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자세히 보니, 밥그릇에도 말라붙은 밥풀이 붙어 있었다. 은우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광일이에게 거짓말을 했다.
- 광일아, 나 갑자기 배가 아프다. 여기 변소가 어디야?
- 어, 그래? 그럼 나 따라와.
따라갈 것도 없이 변소는 부엌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걸 알고 나니, 은우는 밥을 먹지 않기 위해 거짓말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거짓으로 변소에 들어온 은우는 쭈그리고 앉아서 한 5분 정도 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광일이는 밥을 먹지 않고 은우를
기다려 주었다.
- 빨리 와. 배고프다.
광일이는 김치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주욱 찢더니
밥숟가락 위에 얹어서 한 입에 넣었다. 은우는 손으로
김치를 찢어 먹는 게 불결하다고 생각했지만, 광일이는
은우의 맘도 모르고 재촉했다.
- 왜 안 먹어? 배고프잖아?
- 어, 아무래도 배탈났나 봐. 속이 안 좋아. 너 혼자 먹어. 난 이따 집에 가서 먹지 뭐.
- 그래? 같이 먹으면 더 맛있을 텐데..
광일이는 더 이상 은우를 재촉하지 않았다. 은우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밥상에서 조금 떨어져서
광일이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광일이는 계속해서
김치를 찢어서 밥에 얹어 먹었다. 젓가락은 사용하지도
않았다. 광일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은우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잖아도 배고픈 걸 참고 있는데, 쩝쩝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 광일이의 모습을 보니
어느새 사라졌던 식욕이 돌아와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게다가 광일이의 김치 찢는 소리가 어찌나 생생하고
맛있게 들리던지, 평소에 김치를 손으로 찢어 먹어 본 적이없는 은우는 갑자기 그 맛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똑같은
김치가 다른 맛을 낼 리는 없겠지만, 왠지 그 찢는 소리가 식욕을 배가시키는 것 같았다. 자신이 먹는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은우에게 광일이가 말했다.
- 한 숟가락 먹어봐. 얼마나 맛있는데~ 배 아프면 또
화장실 가면 되잖아.
은우는 광일이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먹어 보자니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것들이 떠오르고, 안 먹자니 도대체 그 맛이 못 견디게 궁금한데다 배에서는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 그럼 한번 먹어 볼까?
은우의 대답에, 광일이는 기다렸다는 듯 김치를 찢어서 은우의 숟가락에 얹어 주었다. 눈 딱 감고 숟가락을 입에
가져간 은우는 그 기막힌 맛에 감탄하며 모든 불결한
것들과 비위생적인 것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렸다.
- 맛있지?
- 와! 진짜 맛있다.
은우는 직접 김치를 손으로 찢어서 밥숟가락에 얹어,
앉은 자리에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워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남아 있는 밥을 박박 긁어서 광일이와 나눠 먹었다.광일이도 은우와 같이 먹는 게 맛있었는지, 보통 때보다 더많이 먹었다.
- 와, 배부르다. 진짜 맛있게 먹었다.
- 이제 배 안 아파?
- 어? 어.. 이제 괜찮네.
- 이제 뭐 할까?
- 밖에 나가 놀자.
- 밖에?
갑자기 광일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그럼 여기서 뭐해? 장난감도 없고, 할 게 아무것도
없잖아.
- 우리 그림 그릴래?
- 그림?..
은우는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집에서 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밖에서 놀면 재밌는 놀이가
얼마나 많은데, 기껏 집에서 그림이나 그리자는 광일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밖에서 놀자는 말에 표정이
급 어두워진 광일이의 얼굴을 보니, 계속 나가자고 우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은우는 광일이와 조금만
놀아 주다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래, 그럼 그림 그리자.
광일이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사실 은우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다만 밖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할
뿐이었다. 광일이는 방 한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16절지 갱지를 여러 장 가져왔다. 족히 몇 백 장은 될 것 같았다.
- 와, 엄청 많다. 이거 다 산 거야?
- 어, 아빠가 왔을 때 사 주고 가셨어. 내가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거든. 그림 그리고 싶을 때 막 그리라고
사주셨어. 연습하는 데 쓰기엔 도화지는 너무
아깝잖아.
- 근데, 뭘 그리지?
- 아무거나 그려. 네가 그리고 싶은 걸루..
- 그럼 우리 똑같은 거 그려서, 누가 더 잘 그렸는지
볼래?
- 그래, 그럼. 근데 뭘 그릴까?
잠시 생각하던 은우가 말했다.
- 우선 자동차를 하나씩 그려보자.
- 좋아.
갱지에 자동차를 그리던 은우는 16절지가 그림을
그리기엔 조금 좁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을 다 그리면
여백이 별로 남지 않을 것 같았고, 답답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우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밖에
나가서 노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경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의외로 긴장감이 있었다.
은우는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다. 밖에서 노는 것도 단순히 아이들과 어울려서 노는 즐거움보다는 게임에서 이길
때의 쾌감이 좋아서였다. 은우는 당연히 자신이 그린
그림이 광일이가 그린 그림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림을 마무리 지었다.
- 난 다 그렸어. 너는?
- 어, 조금만 기다려. 나도 다 됐어.
엎드려서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던 광일이가 몸을
일으키자, 은우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광일이가 그린 그림 옆에 자신 있게 놓았다.
- !
은우는 광일이의 그림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자동차 그림이 네모진 차체 밑에 바퀴 두 개가
그려진 단순한 옆모습인데 반해, 광일이의 그림은
자동차의 전면과 측면이 모두 보이는 모습이었고 바퀴도 각도와 시선에 맞게 네 개가 모두 그려져 있었다. 은우는 자신이 졌다는 것은 둘째 치고, 광일이의 그림이 자신의
그림과 격이 다르다는 것에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은우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고, 그림도 잘 그렸고 뭐든 평균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공부도 못하고 몸치인 광일이에게 졌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1학년이 그린
그림이라고는 볼 수 없는 광일이의 월등한 그림 솜씨는
은우의 가슴속에 열등감 이상의 그 무엇을 박아 놓았다.
은우는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이 어려서, 겉으로 보이는 것이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누구에게나 특별한 재능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은우는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광일이에게 말했다.
- 좋아, 자동차는 내가 졌다. 이번엔 비행기를 그리자.
- 그래, 알았어.
은우는 솔직히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자동차처럼 현격한 차이로 지고 싶진 않았다. 자동차는 길에서 자주
볼 수 있어서 관찰의 기회가 많지만 비행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광일이의 그림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비행기를 그리는 은우의 목적은 광일이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광일이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으면
자동차를 그렸을 때의 열등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난, 다 그렸어.
광일이가 먼저 그림을 내밀었다. 은우도 그리던 그림을 마무리하고 광일이의 그림 옆에 놓았다. 이번에도
광일이의 승리였다. 그러나 은우의 생각대로 자동차를
그렸을 때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은우의
예상대로 실제로 비행기를 볼 일이 없었던 탓인지,
광일이의 그림은 자동차를 그렸을 때처럼 세세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뼈대나 균형에 대한 표현은
역시 광일이가 한 수 위였다. 은우는 패배에 신경 쓰기보다차이가 줄어든 것에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이내,
- 자, 그럼 마지막으로 배를 그리자.
- 그래, 좋아.
마지막으로 그린 배 그림에서 은우는 또 한 번 좌절을
겪었다.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자동차와는 다르게 관찰의 기회가 적은 배였기에, 광일이의 그림에서 세세한
표현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은우의 그림과는 격이 다른 차이가 나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웅장함이었다. 은우와 광일이가 그린 것은 둘 다
군함이었지만, 은우의 그림은 대포를 빼면 그것이
군함인지 고깃배인지 알아보지 못 할 그림이었다. 하지만 광일이의 그림은 누가 봐도 군함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그리고 무엇보다 웅장함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겨우 16절지밖에
안 되는 좁은 공간에 여백도 없이 배만 꽉 차게 그린
그림에서 웅장함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은우는
자동차를 그렸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자동차의
세세한 표현들은 시간만 투자하면 꾸준한 관찰과
습작으로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배에서 느껴지는 웅장함은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키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은우는 광일이가 사물의 어떤 부분을 잘 그리는 것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느낌까지 표현할 줄 안다는 것에 열등감 이상의 모욕감을 느꼈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따를 수 없는 타고난 천재성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은우는 그런 생각을 감추며 패배를 시인했다.
- 내가 졌다. 3 : 0. 너, 그림 되게 잘 그린다.
- 난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좋아.
그러면서 광일이는 그동안 그린 그림이라며, 방벽에 붙은 선반에서 책 한 권 두께쯤 되는 갱지를 내렸다.
- 잘 그린 것만 모아둔 거야.
은우는 광일이가 그린 그림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잘 그린 그림들이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과 갖가지 사물, 그리고 사람의 얼굴 같은 그림들..
- 하루에 열 장씩 그려. 더 그리고 싶어도 종이가
아까워서 많이는 못 그려. 대신 자세하게 오랫동안
그려.
광일이의 얘기를 듣고 나니, 광일이가 그림을 잘 그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얘기도
은우에게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은우는 자기가 광일이처럼 매일 똑같은 분량의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배 그림에서 느꼈던 충격적이고도 웅장한 느낌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해 보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한계를 단정 짓게 하는 그것은 오로지 타고난 천재성만이 안겨줄 수 있는 굴욕적인 패배감이었다.
- 누구 왔니?
은우는 예상치 못한 광일이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패배감과 굴욕감에 사로잡혔던 몽롱함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후로도 은우는 광일이네 집에 자주 놀러 가서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데리고 가는 광일이나 같이 가는 은우나 밤일 때문에 낮에 주무시고 계시는 광일이 엄마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광일이네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밥도 차려주지 않았고, 광일이와 은우가 와도 잠만 계속 주무셨다. 혹 일어나서 나가실 때 인사를 해도 딱히 반응이 없었다. 은우는 그동안 왜
광일이가 놀이에 끼지도 않으면서 집에 가지 않고
배회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림에 새롭게 눈을 뜬 은우는 그림에 대한 재미 때문에 어느 정도 눈치를 보는 건참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눈치도 며칠 지나고 나니익숙해져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운 건
점점 대담해지는 광일이의 태도였다. 밥상을 차릴 때면
행여 수저 소리라도 날까 봐 조심조심하고, 은우와 대화할 때도 귓속말로 하던 광일이가 어느 순간부터 딱히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귓속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삭이며 말하는 은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크게 말하라고 할 정도였다. 은우가
보기에 그건, 그동안 모든 욕구를 억누르고 살았던
광일이가 무심한 엄마에게 항의하는 것 같았다. 은우는
눈치를 보며 죽어지내던 광일이가 갑자기 변한 건 그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이 광일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광일이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고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자신감이 드러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광일이네 엄마는 광일이와 은우가 집에 오면 주무시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셨다. 은우는 광일이
엄마가 주무시고 계시는 것보다 그게 더 마음이 쓰였지만, 하루 이틀 지나고 나니 오히려 더 편했다.
- 요즘 니네 엄마, 밤일 안 나가?
- 몰라.
모른다고 말하는 광일이의 낯빛이 어두웠다. 은우는 뭔가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꼭 광일이의얼굴이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은우는 광일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명암을 표현하는 방법과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는 방법 등이었는데,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다양한 노하우를 광일이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광일이가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깨우친
것들이었다. 광일이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은우는 광일이가 그린 그림들과의 격차를
조금씩 줄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나타난
표면적인 것들일 뿐이었다. 은우의 그림이 겉으로 보기에 좀 더 그림다워졌을 뿐이라면, 광일이의 그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이 점점 더 발전하고 있었다. 보이진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발전.. 은우는 그런 광일이의 재능에 질투와 열등감을 느꼈다.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천재성 앞에서 은우는 스스로의 한계에 실망하며
괴로워했다. 이런 고통은 은우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는 줄도 몰랐던 은우는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에 좌절했다.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질투와 열등감에, 은우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광일이의 재능이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그런 생각은 광일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했는데, 그건 은우의
진심이었다. 자기가 평생을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게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은우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아예 없애 버리고
싶었다. 아직 삶을 이해하기엔 초등학교 1학년인 은우는 너무 어렸고,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 자체가 은우에겐 충격을 넘어선 절망이었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은우는 너무 싫었다.
일요일 저녁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잘 안 먹던 김치를
손으로 찢어 먹는 은우를 보고 엄마가 말했다.
- 젓가락 놔두고 왜 더럽게 손으로 찢어 먹어?
- 이렇게 먹으면 되게 맛있어요.
평소에 잘 안 먹던 김치를 먹는데다가, 손으로 찢어 먹는 안 하던 짓을 하는 은우에게 엄마가 물었다.
- 누가 그렇게 먹어?
- 광일이요.
- 그렇게 먹으면 맛있어?
- 네. 무지 무지 맛있어요.
- 똑같은 김친데 뭐가 다르다고 손으로 찢어 먹어?
더럽게.
은우는 입 안에 침이 돌던 차에 엄마가 자꾸 반복해서
말하는 ‘더럽다’는 말에 식욕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김치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엄마는 ‘안 먹던 김치를 먹겠다는데, 그냥 놔둘 걸 그랬나?’하는 후회를 하다가
은우에게 물었다.
- 걔네 엄마가 그렇게 찢어 주디?
- 아뇨. 광일이네 엄마는 밥 안 차려주고 잠만 자요.
- 그럼 밥은 누가 줘?
- 광일이가요.
- 집에 있는데도 잠자느라고 밥을 안 차려줘?
- 광일이네 엄마는 밤에 일 나가서 낮에는 자야 된대요.
- 그래도 그렇지, 무슨 애엄마가 그러냐?
은우 엄마는 잠시 나가서 손을 씻고 오더니, 김치를
찢어서 은우 밥숟갈에 얹어 주었다.
- 맛있어?
- 응. 엄마가 찢어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애.
- 오늘만 찢어주는 거야, 다음부턴 젓가락으로 먹어.
똑같은 김치가 왜 손으로 찢는다고 더 맛있냐?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지.
은우는 듣고 보니 엄마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왠지 찢어 먹는 게 더 맛있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엄마가 찢어서 얹어 주는 김치는 더 맛있는것 같았다.
- 오늘도 광일이네서 놀다 왔어?
- 네.
엄마의 물음에 답하며, 은우는 엄마의 물음에 어떤
의도가 있다는 걸 직감했다.
- 왜요?
- 걔네 아빠가 광부 맞지?
- 네. 저번에 얘기했잖아요. 근데 왜요?
엄마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 마는 듯하다가,
- 너 이제 광일이네 가서 놀지 마.
- !.. 왜요?
엄마는 역시 잠시 머뭇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엄마가 말하면 들어!
은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엄마의 강한
어조에 눌려 더 이상 묻지 못했다.
- 은우야, 학교 가자!
- 어! 잠깐만.
오늘도 광일이는 은우네 집 대문 앞에서 은우를 불렀다. 은우는 이를 닦고 있었는데,
- 광일아, 너 먼저 가. 은우는 조금 있다 갈 거야.
- 아니에요. 아직 안 늦었으니까 기다릴게요.
- 아냐. 너 먼저 가. 아줌마 말 들어.
엄마는 광일이에게 낮지만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은우는 엄마의 그런 행동에 화가 났다.
- 엄마! 왜 그래?
- 시끄러워! 넌 빨리 가방이나 챙겨!
엄마의 신경질적인 고함에 눌린 은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광일이도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분위기에 밀려
조용히 인사를 하고 문 앞에서 사라졌다. 광일이가
가자마자 은우는 엄마에게 따지듯 물었다.
- 엄마, 왜 그래요?
- …….
- 엄마, 왜 그러냐니깐!
엄마도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지, 은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씀하셨다.
- 너 이제 쟤랑 놀지마.
- 왜요!
- 놀지 말라면 놀지마!
은우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엄마의 명령이
불합리하다는 생각과 함께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꼈지만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가방을 챙겼다. 엄마의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로 봐서 또 한 번 토를 달았다간 아침부터 실컷 두들겨 맞고 학교에 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은우가 교문 앞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던 광일이가
달려왔다. 광일이는 요새 나머지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은우와 그림 그리는 데 재미를 붙인 광일이는
은우와 같은 시간에 학교에서 나오기 위해 공부를 꽤
열심히 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숙제부터 하면서 모르는 것은 은우에게 도움을 청했고, 은우가 집으로 돌아가면
복습과 예습을 했다.
광일이는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은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은우 역시 그 일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은우는 그런 광일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서먹한 대화를
나누면서 은우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은우가 말했다.
- 오늘은 못 놀 것 같아. 숙제가 너무 많아서..
- 그럼 우리집에서 같이 하자.
- 아냐! 그냥 우리집에서 할래. 내일 놀자.
- 그럼, 너네집에서 같이 하면 안 돼?
- 아이, 안 된다니까!
은우는 자기도 모르게 광일이에게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은우는 마음속으로 많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엄마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은우는 하루 이틀 정도 엄마 눈치를 보다가 다시 광일이와 놀 생각이었다. 그래서 숙제를 핑계로 댄
건데, 눈치 없는 광일이가 자꾸 달라붙자 미안한 마음과
짜증이 동시에 폭발했던 것이다. 은우는 자기가 엄마
때문에 이러는 거라는 걸 아마 광일이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자기에게 더 매달렸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이유를 광일이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내려가는 광일이의 뒷모습을 보자은우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럴수록 엄마의 그 일방적이고도 강압적인 명령이 터무니없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드니 은우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래서
반항이라도 하고픈 마음에 광일이네로 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광일이한테 가기엔 늦은 것 같았고,
아무리 불합리하다고 해도 엄마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집에 들어가기는 싫어서 대문 문턱에 앉아 있는데, 엄마 친구들이 오셨는지 대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그 여자 문제가 많나봐.
- 남편이 알면 어쩌려고 그럴까?
- 남편이 광부라며.. 석 달에 한두 번 온다는데 알 게
뭐야.
- 그래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 꼬리가 밟히는 걸 떠나서 사람이 죄 짓고 살면 안 되지. 애도 있는데..
- 사람들 눈이 무섭지도 않나 봐.
- 얘기 들으니까, 처음부터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는데.. 요샌 사람들이 봐도 신경도 안 쓴대. 대담해진 거지.
- 외롭기도 했겠지. 1,2년도 아니고 9년, 10년 그렇게
살면서 얼마나 적적했겠어. 한창 나이에..
- 그래도 그렇지. 거기다 애한테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던데? 우리 은우가 그러는데, 애가 친구를 데려가도. 잠만 잔대. 애들 밥도 안 차려주고..
은우는 본의 아니게 듣게 된 이야기의 주인공이 광일이 엄마라는 걸 알게 되자 광일이가 가엾게 여겨졌다. 그리고 엄마가 광일이랑 놀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우는 어른들의 얘기를 더 들을까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광일이네 집을 향해 뛰었다.
은우는 광일이네 집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아까 대문 앞에서 들은 얘기해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가엾은 광일이를 위해 모르는 체 하기로,
그리고 광일이랑 더 자주, 더 진심으로 놀아 주기로..
광일이는 방문을 열어 놓고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광일이는 은우를 반갑게 맞으며 바로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은우는 광일이
엄마가 보이지 않자 광일이에게 물었다.
- 엄마는 안 계셔?
- 몰라. 요새는 낮에도 일이 많은가 봐.
- 그래?..
- 밥 먹었어?
- 아니.
- 난 벌써 먹었는데.. 어떡하지? 남아 있는 밥이 없는데..
- 됐어. 별로 배 안 고파. 놀다가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지 뭐.
- 그래도 돼? 정말 괜찮아?
- 어, 괜찮아. 근데 우리 놀기 전에 숙제부터 하자. 모르는
거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 정말? 그래, 그러자 그럼.
같이 숙제를 할 때면 광일이가 모르는 걸 물어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은우는 ‘그것도 모르냐’며 타박을 놓곤 했다. 물론 결국 가르쳐 주긴 했지만, 가르쳐 주기 전에 꼭 타박을 놓고 무시하는 은우 때문에 내색은 안 했어도
광일이는 적잖이 마음이 상했을 터였다. 은우는
오늘만큼은 광일이를 무시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고, 친절하게 정성을 다해서 광일이를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숙제가 다 끝났을 때, 광일이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장판 밑에서 갱지 한 장을 꺼냈다.
- 엄마가 보면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그림을 본 은우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광일이는 그림 속 주인공이 자기라고
했다. 그림 속 광일이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16절지 종이를 가로로 눕힌 상태에서 왼쪽 하단에광일이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우측 상단엔 해가 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광일이의 뒷모습이 더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고, 광일이의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토록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광일이의
뒷모습에도 불구하고, 해가 지고 있는 모습이 표현된 우측 상단 아래 중앙에서는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발이 쑤욱
튀어나올 것 같은 간절한 그리움의 희망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은우는 누가 봐도 초등학교 1학년인 자기
또래의 그림 솜씨라고 보기 어려운 광일이의 그림에
감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아빠를 기다리는 나를 그린 거야.
은우는 비로소 광일이의 그림에 드리워진 외로움과
간절한 그리움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그림 속 정서가 자신의 가슴에 진심으로 와 닿음을 느끼며,그 느낌만큼 광일이를 가엾게 여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진심으로 광일이의 그림에 감동했고, 순수하게
광일이를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광일이가 그린 그림에
대한 감상을 끝내고 자기 그림을 그리려던 은우는 종이에 가는 선 하나 그리지 못했다. 광일이의 그림을 보고 의욕을상실한 은우는 자기 그림에 대한 동기 부여를 얻을 수
없었다. 옆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광일이를 잠시 바라보던 은우는
- 광일아. 나 오늘은 그냥 갈게. 몸이 별로 안 좋다.
- ?.. 왜, 어디 아퍼?
- 아니, 특별히 아픈 건 아닌데.. 갑자기 몸이 피곤하네.
광일이는 무척 아쉬웠지만, 몸이 안 좋다는 은우를 잡을 수는 없었다.
- 잘 가. 내일 꼭 또 놀자.
- 응.
은우는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어떤 나쁜 의도도 담겨
있지 않은 광일이의 말이 괜스레 거슬렸다. 은우는 집으로 걸어가면서 자신이 광일이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했다. 그것은 광일이의 그림이 주는 감동과는 다른 별개의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은우의
마음속엔 두 명의 광일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엾은
광일이와 시기의 대상인 광일이.. 광일이네 집에서 멀어져갈수록 가엾은 광일이가 차지하는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갔고, 은우네 집에 가까워질수록 시기심의 대상인
광일이가 차지하는 자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은우는 집에 돌아와서도 광일이가 그린 그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광일이가 가진
재능에 집착하고 있었다. 한참을 광일이의 재능과 자신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 은우의 마음속에서 가엾은 광일이는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은우는 자신이 짧은
기간의 노력으로 광일이가 가진 재능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우가 광일이의 재능에 집착하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짧은 시간이 아닌 영겁의 시간이 주어진대도 자신이 광일이의 재능을 넘지 못할 거라는 한계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은우는 뛰어난 광일이의 재능
앞에서 한계를 드러낸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똑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또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재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몹시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것은 이미 개인적인 열등감이나 시기심을 넘어선,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은우는 그런 자신의 분노를 어디에,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결론에 먼저 이르렀다.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건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어.’
오늘따라 담임 선생님의 종례 말씀이 꽤 길었다. 먼저
종례를 마치고 복도를 뛰어나가는 옆 반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은우는 옆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는 소리를 들은 후부터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복도를 뛰어나간 아이들이 교문을 향해 달려가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은우네 반 창문을 보고 서
있었다. 광일이었다. 먼저 끝난 광일이가 은우를 기다리고있었다. 은우는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 몰래 손을
흔들었지만, 너무 소극적으로 흔들어서인지 광일이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광일이가 자신을 발견하길 바라며
계속 응시하고 있는데, 광일이 주위로 아이들 서넛이
모여드는 게 보였다. 의자 끄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생님이 종례를 끝내고 나가고 계셨다.
은우가 교실을 뛰쳐나가 광일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데, 광일이 주위로 모였던 녀석들이 광일이의
가슴을 밀치는 게 보였다. 은우는 멈춰 서서 무슨 일인지 지켜봤다.
- 야, 이 더러운 새끼야!
- 얘네 엄마 창녀라며?
- 얘 입에서 썩은 내 나. 똥냄새보다 더 고약해.
- 우리 엄마가 얘 근처에도 가지 말랬어.
아이들은 광일이를 둘러싸고 흉을 보더니, 가슴을 밀치는것에 그치지 않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광일이는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은우와 눈이 마주쳤다. 은우는 순간적으로 광일이의
눈길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녀석들 중 하나가
던진 돌이 광일이의 이마에 맞아 피가 흘러내렸다.
광일이는 이마를 감싸고 주저앉았고, 그때서야 은우는
가방을 벗어 던지며 달려갔다.
- 야, 이 개새끼들아! 왜 가만히 있는 애를 괴롭히고
지랄이야, 이 십팔새끼들아!
녀석들은 셋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는 은우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은우는 키는 작았지만 힘이 세고 몸집도 좋았다. 정상적으로 붙어도 은우에게 이길 수 있는 놈은 셋 중엔
없었다. 은우는 다른 아이들과 싸울 때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녀석들을 응징했다. 머리채를 잡아다
나무줄기에 찧어 박았고 불알도 걷어찼다. 녀석들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을 때야 은우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먹을 내렸다. 나무줄기에 머리를 박힌 녀석은
광일이처럼 이마에 피를 흘리며 울고 있었고, 불알을
걷어차인 녀석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나머지 한 녀석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걷어차려는 은우의 다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는데, 은우는 녀석의턱을 걷어차서 떼어 내며 말했다.
- 야, 이 씹팔새꺄! 한 번만 더 가만있는 애 괴롭히면
죽을 줄 알어!
녀석들은 은우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 빨리 안 꺼져!
뒤로 물러서고도 막상 도망치지 못하던 녀석들은 은우의 고함에 비로소 등을 보였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울고 있던녀석은 분해서인지 그냥 가지 못하고 서 있는 걸, 은우의 다리에 매달렸던 녀석이 뒤돌려서 데리고 갔다. 은우는
녀석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도 광일이와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다.
- 고마워.
광일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괜찮아?
은우는 그때서야 광일이의 얼굴을 보고 말했지만, 눈은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 가자.
은우가 광일이에게 말하고 자신의 가방을 가지러 가려 할 때였다.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광일이의 다리를 맞혔다.
- 야, 이 씨발새끼야, 개새끼..
이마를 찧었던 녀석이 던진 돌이었다. 그냥 가기엔
분하고 억울했던지 은우에게 돌멩이를 던진 모양인데,
그게 빗나가서 광일이를 맞힌 것이었다.
- 야, 이 씹팔새끼야! 너 진짜 뒈져 볼래!
은우의 고함에, 녀석은 속사포처럼 욕을 지껄이고는
잽싸게 도망쳤다.
- 병신새끼!
은우는 등을 보이며 도망가는 녀석을 향해 한마디
내뱉고는 가방을 들고 앞서 걸었고, 광일이도 고개를 숙인 채 은우의 뒤를 따랐다. 둘은 함께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은우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은우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광일이에게 말했다.
- 잠깐 우리집에 들렀다 가자.
광일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젓더니 힘없이 말했다.
- 오늘은 그냥 갈게. 내일 놀자.
- 왜?..
-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미안해, 내일 놀자.
은우는 자신을 지나쳐 골목길 계단을 내려가는 광일이를 바라보다가 가방을 벗어서 대문 안에 던져 놓고 광일이를 따라갔다.
- 왜 그래?
- …….
- 왜 그러냐니까?
- 아무것도 아냐. 그냥 가.
- 너 나한테 화났어?
- …….
- 어?
광일이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은우의 눈을 보고 말했다.
- 너 아까.. 처음에 왜 나 못 본 척 했어?
은우는 슬픔이 고인 광일이의 눈을 차마 더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떨군 채 대답을 회피했다.
- 내가 언제?..
광일이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은우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 아냐, 됐어. 나 갈게.
은우는 등을 보이고 계단을 내려가는 광일이를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은우는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걸터앉았다. 벌거벗은 몸을보인 것처럼 부끄럽고 창피한 기분이었다. 광일이가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 것 같지 않았다. 사실 광일이가 괴롭힘 당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은우는 친구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보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광일이를 보자, 팽팽한 긴장감이 넘치는 싸움 구경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는 대신 은우의 맘속에 숨어 있던 가학적성향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이었지만, 힘없는 존재를
일방적으로 짓밟는 절대 폭력의 희열, 거기다 내가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괴롭힐 수 없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대신 괴롭혀 줄 때 느끼는 금기에 대한 대리 만족을 느꼈다.
하지만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약자에 대한 측은함과 연민,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처할지도 모를 미래의 자아에 대한 투영이 그런 악마적 본성을 누르고 이제 막 깨어나려 했을 때, 은우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광일이의 눈을 진실로 외면했었다. 그 이유가 너무나도 비겁하고 부끄러웠던
것이어서 은우는 땅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하필 그때, 광일이의 눈과 마주쳤던 그때.. 광일이의 그림이 생각났을까?’
은우가 최소한의 양심으로 정신을 차린 건, 광일이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난 후였다. 그때서야 은우는
자신이 너무도 비겁하고 졸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깨닫고 광일이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광일이를 외면할 순
없었다. 그건 친구를 돕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비겁했던 행동을 떨쳐 버리기 위한 변명 같은 거였다.
그래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더 잔인하게
녀석들을 응징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은우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괴로워하다가 문득,
‘만약 그때 내가 거기에 없었다면?..’
광일이가 녀석들에게 당하고 있던 곳은 복도가 끝나는
곳에서 불과 2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교실 유리창에서도 훤히 보이는 그런 장소였다. 언제든
선생님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녀석들이 광일이를
괴롭혔다는 걸 은우는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선생님들의 등장도 무시할 만큼 녀석들이 광일이를 우습게 봤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힘없는
아이에겐, 학교라는 최소한의 안전지대마저 믿을 수 있는 곳이 못 된다는 사실에 은우는 분통이 터졌다. 교실에서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조차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곳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은우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계속 당하기만 했을
광일이를 그저 구경거리로 바라보았을 대다수의 아이들이혐오스러웠고, 힘없는 아이가 당할 때 제 때 나타나주지
않은 선생님들도 결코 믿을 사람들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까 광일이를 괴롭히던
녀석들을 더 확실하게 뭉개 놓지 못한 것이 은우는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은우의 예상대로 광일이는 은우네 집에
들르지 않았다. 은우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기다려 봤지만, 학교에 가자고 부르는 광일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은우는 축 처진 어깨로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기분이 몹시우울했다. 은우가 골목길에서 나와 오르막길을 오르려 할 때, 저 위에 광일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은우는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다가 이내 멈춰 섰다. 아직 광일이와의
서먹함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은우는 그렇게 학교까지 가는 내내 광일이의 뒤를 따라갈 뿐 더 이상 다가갈 순
없었다.
교실에 도착한 은우는 광일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내곤 조금 걱정이 됐다. 어제 자기가 때린 녀석들이 엄마나 선생님께 이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들이 잘못한 게 있으니까
선생님들한테는 이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조금은 불안했다. 다행히도 3교시가 끝날 때까지
선생님이 은우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은우는 내심
안도하며, 이제 어떻게 광일이와의 서먹함을 풀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화장실에 가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이 뭔가
수군대는 것 같았다. 은우는 짐짓 모른 체하며 앞으로
가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 쟤 입냄새 되게 난대.
- 2반 애한테 옮았대.
- 야, 입냄새가 어떻게 옮냐? 원래 나는 거지.
- 2반 애랑 맨날 어울려 다니더니, 이빨도 안 닦나봐.
- 걔는 병이래. 쟤도 병 옮은 거 아냐?
은우는 울컥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뒤를 돌아봤다.
뒤에서 수군대던 소리는 쏙 들어가고 아이들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무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은우는 잘 알고 있었다.
‘냄새? 입냄새?..’
은우는 뒤에서 수군대던 아이들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냄새가 나고 안 나고를 떠나 흉보는 내용이 부끄럽고 창피한 것인지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고 행여나 조금이라도 진짜 입냄새가 날까 봐
조심스러웠고, 지레 조금 위축이 됐다. 은우는 분노가
수치심으로 바뀐 붉어진 얼굴로 복도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4교시 내내 은우는 자신의 입냄새에 대해 고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입냄새에 대해 말하던
아이들의 수군거림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왜 갑자기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 그리고 정말 자기한테서 입냄새가 나는지에 대해.. 사실 복도에서 은우를 흉보던 아이들은 은우네 반도 아니었다. 옆 반인 3반 아이들이었는데,
복도에서 지나치며 본 탓에 낯이 익을 뿐이지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걔네들이 어떻게?..’
이내 도달한 결론은 누군가의 모함이 있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모함의 주동자가 누구인지는..
‘이 개새끼를 그냥..’
은우는 선생님의 종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부리나케
2반으로 뛰어갔다. 거기도 이미 종례가 끝났는지
아이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은우는 남아 있는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녀석은 이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광일이는 나머지 공부에 걸렸는지 아직 책상에
공책과 연필이 남아 있었다. 은우는 광일이와의 서먹함을 무시하고 다가가서 물었다.
- 광일아, 어저께 너 괴롭히던 놈 이름이 뭐야?
- ?..
- 이마에서 피 흘린 새끼 말야!
- 왜?..
- 아, 글쎄 빨리 이름이나 말해!
광일이는 은우의 다급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에 눌려 입을 열었다.
- 병철이.. 유병철.
대답을 듣자마자 은우는 후다닥 교실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 유병철! 1학년 2반 유병철! 병철아! 1학년 2반 유병철!
은우는 고함치며 달려가면서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아이들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그 얼굴들 중
병철이가 있었다. 녀석은 어제의 그 똘마니 둘과 함께
은우가 뛰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은우의 달려오는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쳤지만 은우가 한발 빨랐다. 은우는 가방과 신주머니를 내던지며 달려가 녀석의 면상에
주먹부터 날렸다.
- 이 씹팔새꺄! 개새꺄!
은우는 이성을 잃고 병철이를 사정없이 짓밟았고, 병철이옆에 있던 똘마니 두 놈은 은우의 살기에 눌려 감히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친구를 버려두고 도망쳤다.
- 야, 이 개새끼야! 니가 날 놀려!
코피가 흐르고 입술이 터진 병철이의 얼굴을 보고도
은우는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병철이는 살기 가득한
은우에게 질렸는지, 어제와는 다르게 이내 미안하다고
빌었지만 정신없이 날아드는 은우의 주먹과 발길질에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은우는 병철이가
저항을 멈추고 늘어지자, 주먹질을 멈추고 깔고 앉은
병철이의 멱살을 잡았다.
- 뭐하는 짓이야!
갑작스런 고함에 은우가 고개를 돌리니, 둘러싼 아이들 틈으로 교감 선생님이 보였다.
- 너 이름 뭐야? 몇 학년 몇 반이야?
- 1학년 4반 유 은우요.
- 너는?
교감 선생님은 은우 밑에 깔려 있던 병철이를 일으키며 물었다.
- 1학년 2반 유 병철이요.
- 너희 둘 다 따라와.
담임선생님께 인계된 은우는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인정했지만, 병철이를 때린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병철이가 자신을 놀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어떻게 놀렸냐는 선생님의 질문에는
병철이가 욕을 했다고 둘러댔다. 선생님은 병철이가 어떤 욕을 했냐고까지 물으셔서 은우는 대충 둘러댔지만,
선생님은 그 정도 욕 때문에 은우가 병철이를 그렇게
심하게 때렸다는 게 납득이 안 되셨던지 재차 다른 이유를 물어보셨다. 계속되는 물음에도 은우가 똑같은 대답으로 일관하자, 선생님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여기시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은 묻지 않으셨다. 은우는 벌로
반성문을 쓰고 엄마에게 도장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른 체벌은 없었지만, 은우에겐 차라리 선생님께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는 게 나을 일이었다. 엄마의 매가 선생님의 매보다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우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병철이 녀석은 교무실에서 더 얄밉게 굴었다. 녀석은
은우에게 왜 맞았냐는 자기 담임 선생님의 물음에, 그냥
집에 가고 있는데 은우가 달려와서 다짜고짜 때렸다고
말했다. 병철이 담임선생님은 그래도 은우가 아무 이유
없이 때리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면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시려고 병철이에게 다시 물으셨지만, 녀석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왜 때렸냐는 은우 담임
선생님의 물음에 은우가 ‘병철이가 욕을 해서..’라고
말하는 걸 들었으면서도, 녀석은 끝까지 자기는 영문도
모르고 맞기만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니, 최소한 오늘 일어난 일로만 판단했을 때는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은우는 병철이의 그 얄미운 거짓말이 너무나도
가증스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의 보복은 용납되지 않았다.
병철이 담임선생님도 병철이의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본인이 끝까지 우기는 데다 녀석이 피해자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셨다. 은우는 걱정을 한가득 안고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교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는
길에 나머지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광일이와 마주쳤지만 은우는 눈길을 돌렸다.
은우의 걱정과는 달리 엄마는 의외로 조용히 넘어가셨다.그래도 맞고 들어오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셨던지, 매도 들지 않으셨고 야단도 크게 치지 않으셨다. 아마도
병철이의 얼굴을 보셨으면 다르셨을 테지만……. 은우는 엄마가 녀석의 얼굴을 보지 못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다음날 아침, 은우는 등교하자마자 엄마의 도장이 찍힌 반성문을 담임 선생님께 보여 드렸고, 엄마한테 많이
혼났냐는 선생님의 물음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말라는 주의를 주시고는 더 이상 은우를 힘들게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모든 게
조용히 마무리 되는가 싶었던 순간, 앙칼진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걔 어딨어! 유은우가 누구야?
병철이 엄마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는 순간,
조용하던 교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은우는 결국 올 것이왔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담임 선생님은
머뭇거리다 교실 문을 열고 나가셨고, 일순간 아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은우에게 쏠렸다. 은우는 고개를 숙이고
복도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커진 탓에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은우는
조용히 넘어가도 될 일을 이렇게 만든 병철이가 밉기보다 한심스러웠다.
‘치사한 새끼! 남자새끼가 엄마한테 이르기나 하구..’
- 김은우! 잠깐 나와봐.
담임 선생님의 부름에 복도로 나간 은우는 교실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병철이 엄마의 밀침에 넘어질 뻔했다.
- 니가 유은우야?
은우는 병철이 엄마의 그런 위압적인 태도가
무섭기보다는 불쾌했다.
- 네, 제가 유은운대요.
은우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엄마 뒤에숨어 있는 병철이를 노려보곤, 이내 병철이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이게 뭘 잘했다고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부라려!
부라리긴!
병철이 엄마는 상스럽게 말하며 팔을 있는 힘껏 올려서 은우의 뺨을 때렸다. 그 바람에 은우는 바닥에 쓰러졌고, 놀란 담임 선생님은 은우를 일으키며 병철이 엄마에게 쏘아붙였다.
- 어머니, 이게 무슨 짓이세요! 애한테..
- 짓? 무슨 지잇~?
병철이 엄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고는 담임
선생님한테 삿대질을 해 대며 천박하게 떠들어 댔다.
- 야! 너 내가 누군지 알어? 어린년이 어디 겁대가리
없이.. 야, 니가 얘 담임이야? 담임이면 애들 교육을
똑바로 시켜야지. 어디 깡패새끼처럼 남의 귀한 자식. 때리게 만들어! 이 새끼가 내 아들 이렇게 만든 건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좀 민 건 대단한 거냐? 어!
병철이 엄마는 상스럽게 욕을 하며 담임 선생님의
뺨이라도 때릴 것처럼 손바닥을 치켜올렸다. 그때서야
보고만 있던 교감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부랴부랴
병철이 엄마와 담임 선생님을 떼어 놓으며 교무실로
인도했다. 소란스런 소리에 교무실에서 나오신 교장
선생님도 우선 병철이 엄마를 교무실로 모시도록 했고,
뒤이어 은우와 담임 선생님, 병철이와 병철이 담임
선생님도 그 뒤를 따랐다. 교무실에 가서도 병철이 엄마의 경우 없는 언행은 계속되었다. 상소리는 기본이었고,
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자기 말만 계속
떠들어 댔다. 교감 선생님과 두 담임으로부터 상황 설명을 들은 교장 선생님은 병철이 엄마를 일단 교장실로 모셨다. 이어서 은우와 병철이의 두 담임 선생님들도 불려
들어갔고, 은우는 교감 선생님의 지시로 병철이와
마주보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병철이는 자기 엄마가
창피하지도 않은지, 그리고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은지
무슨 대단한 응원군이라도 데리고 온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은우에게 혓바닥을 내밀었다. 은우는 녀석의
얼굴에 침을 뱉고 짓이겨주고 싶었지만, 분노를 삭이며
시선을 돌렸다. 1교시가 끝나고 2교시 중반이 다 되어서야교장실 문이 열렸다.
- 애 엄마 부르라니깐!
- 저 병철이 어머니..
- 아, 글쎄 애엄마부터 불러! 그 여편네 얼굴부터
봐야겠어, 내가!
다 끝난 얘기인 줄 알았는데, 또 똑같은 얘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은우는 혹시라도 엄마가 학교에 와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불안했다. 엄마한테 혼나는 건 상관없었지만, 저 천박하고 경우 없는 여자한테 엄마가 용서를 빌어야
하는 상황이 올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한동안 또
선생님들과 병철이 엄마의 실랑이가 계속되었고,
다행히도 은우의 엄마가 학교까지 오는 일은 없도록
마무리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병철이
엄마는 선생님들이 지켜보고 있는 교무실에서 병철이가
은우를 때리도록 시켰다.
- 자, 너도 때려. 얼른!
- 어머님!
담임 선생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지만,
- 왜?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할까?
병철이 엄마의 이 한마디에 교감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을제지했고, 다른 선생님들은 침묵했다. 병철이는 처음엔
쭈뼛거리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손바닥으로 은우의
가슴을 밀기만 하더니, 이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인지하고 주먹으로 은우의 가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갈수록 강도는 세졌고, 배를 제대로 맞은
은우는 숨이 턱 막혔다. 은우가 배를 움켜잡고 웅크리자
병철이는 놀란 듯 주먹질을 멈췄고, 은우도 '이제
끝났구나' 생각했지만,
- 왜 얼굴은 안 때려? 너도 때려!
병철이가 얼굴은 안 때리고 가슴만 때리는 게
못마땅했던지, 병철이 엄마는 직접 병철이 손을 들어
은우의 뺨을 때리게 했다. 병철이도 그것만은 못하겠던지 엄마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 썼지만, 병철이
엄마의 우악스런 손은 병철이의 손을 놔주지 않았고,
병철이의 손은 엄마에게 잡힌 그대로 은우의 뺨에
날아갔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병철이 엄마는잡고 있었던 병철이 손을 내려놓더니 자신이 직접 은우의 뺨을 때렸다. 우악스런 병철이 엄마의 손바닥이 은우의
뺨에 다시 떨어지는 순간, 은우는 놀람과 아픔으로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렇게 서너 번.. 참다못한 담임 선생님이
병철이 엄마의 손목을 잡았고, 병철이 엄마는 담임
선생님을 노려보다 손을 내렸다. 모든 게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병철이 엄마는 병철이 손을 잡고 교무실을
나갔고, 담임 선생님은 은우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은우의 뺨은 병철이 엄마의 손자국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 은우야, 아프지? 미안해, 선생님이 미안해..
- 괜찮아요.
담임 선생님이 은우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릴 때, 주변에 있던 선생님들이 수군거렸다.
- 외삼촌이 이성(二星) 장군이래.
- 딸 넷 낳고 난 아들이라니 오죽하겠어?
- 그래도 그렇지, 몰상식하긴!
- 어쩌겠어요? 빽 있다는데..
은우는 교무실을 나오면서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보다 담임 선생님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교실에 들어선 은우는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조금은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자신이 동정 받는 만큼 병철이가 나쁜 놈이 될 것을
생각하니, 동정 받는 다는 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동정이 아니라, 경계와 무시였다는 걸
은우는 2교시가 끝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는데,
- 2반 애가 은우한테 입냄새 난다고 놀렸대.
- 걔네 외삼촌이 되게 높은 군인이래.
- 입냄새가 많이 나나?
- 장난 아냐, 엄청 심해.
- 어쩐지 걔 옆에 있으면 무슨 냄새가 나더라구.
은우는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소문이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몰상식한 엄마를 학교에
데리고 온 병철이를 흉보는 게 아니라, 난데없는 입냄새가 소문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그것도 모든 문제의 원인이
실제론 나지도 않는 자신우 입냄새로 귀결되고 있다는 게 은우는 기가 막혔다. 은우는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데에는 병철이의 입놀림이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헛소문을 낸
녀석을 혼내 주겠다고 했다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다, 그 몰상식한 병철이 엄마를 또 학교로 불러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번 더 사고를 쳤다간 엄마까지 학교에
불려 올 게 뻔했다. 게다가 담임 선생님을 두 번이나
당혹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다. 여하튼 나쁜 쪽으로 머리를 굴려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영악함은
은우로선 병철이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은우는 학교에 있는 내내 수업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이 아닌 수업 시간에도 주위에서 자신의 입냄새에 대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더 노골적이고
과장된 내용들이었다. 아무래도 수업 시간엔 은우가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걸 악용하는 듯 했다. 하지만은우는 자신을 흉보는 애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왠지 눈이 마주치는 아이들
모두가 입냄새를 의식하며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은우는 짝꿍인 정은이에게 진짜
자기한테서 입냄새가 나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있지도 않은 왜곡된 사실 때문에 자기가
자존심을 버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또 자존심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로 입냄새가 날 경우였다. 만약 정말로 입냄새가 날 경우 병철이가 퍼뜨린 소문은
기정사실이 될 테고, 어리석게도 은우는 자신을 향해 확인사살을 한 꼴이 되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 냄새의
기준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자기만의 냄새가 있고, 다른 사람이 그걸 맡았을 때는 ‘
냄새가 난다’고 인식하기 마련인데.. 유독 심한 입냄새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른 사람의 입에 코를 가까이 대면
어느 정도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는 법이다. 그런데 만약 짝꿍인 정은이에게 물어봤다가, 정은이가
‘유독 심한 냄새’도 아닌 누구나의 입에서나 날 수 있는
그냥 평균치의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냄새가 난다’고인정할 경우.. 그 파장을 은우로선 감당할 수 없었다. 또
이미 알게 모르게 퍼진 소문을 들었을 정은이가 소문의
선입견을 가지고 은우의 입냄새를 판단할 경우, 그 판단은 객관적인 중립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은우의 머릿속은 생각만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서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다. 4교시가 끝날 때까지 망상에 시달리는 은우의 악몽은 계속되었다.
집으로 가는 은우는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 눈은 칠판을 보고
있었어도 머릿속은 온통 입냄새에 관한
생각뿐이었으니까. 더욱 낙담스러운 것은 집으로 가는
지금까지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은우는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았다. 입냄새를 의식한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의 목을 죄는 것만 같았고, 내일 하루는 또
어떻게 버텨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 은우야!
광일이었다. 오늘은 나머지 공부에 안 걸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은우는 광일이가 반갑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자의든 타의든 광일이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직접적으로..
- 괜찮아? 선생님하고 엄마한테 많이 안 혼났어?
은우는 광일이가 걱정이 돼서 물어보는 줄 잘 알면서도
광일이의 그런 물음이 괜스레 얄밉게 들렸다.
- 어?
은우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광일이는 무실이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한번 더 물었다. 은우는 마지못해 짜증
섞인 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 어.
- 미안해.. 나 때문에.
은우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애써 참아내며 말을 아꼈다. 사실 매우 짜증나는 상황이었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광일이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좀 그랬고, 그렇다고 광일이 때문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었다.
- 미안해, 은우야.
- …….
- 미안해..
- 은우는 치미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르며 겨우 대답했다.
-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 …….
광일이는 은우의 곁을 쫓으면서 계속 은우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는 한번 더
- 미안해. 나 때문에..
- 아이씨, 너 때문이 아니라니까!
은우는 광일이의 답답한 행동에 더 이상 짜증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런 은우의 반응에 놀란 광일이는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 미안해..
진심이 담긴 광일이의 마지막 말까지도 짜증스러웠던
은우는 광일이를 버려두고 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은우는 광일이와 함께 학교에 가는 걸
피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혹시라도
광일이가 뒤쫓아올까 봐 걸음도 빨리 걸었다. 광일이를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지만, 우선 당장 아이들의 입방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교실 앞에 도착한 은우는 제발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을 열었다.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와서인지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은우는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피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교실에 들어올 아이들의 시선을 모두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은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소란스런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어느새 교실은 아이들로 꽉 차 있었다.
교단을 바라보니 다행히 선생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했고, 지각을 면하기 위해 후다닥 앞문으로 뛰어
들어오는 아이들이 보였다.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은우는 정신을 차리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려다 책상에 흘린 침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은우는
다른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얼른 팔소매로 책상을
닦았다. 그때 불현듯 불길한 느낌에 옆을 돌아본 은우는
짝꿍인 정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은우는 황급히 눈길을
피하며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이내 다시 그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잠깐 눈이 마주쳤던 정은이의
얼굴은 분명 불결함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은우는 얼굴에 묻은 침을 닦을 때 살짝 코끝을 지나갔던
침 냄새를 정은이가 느끼지 않았기를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수업이 시작되기 전의 그 소란스러움마저 뚫고 귓가에 들리는 소리들이 있었다.
- 쟤, 침 흘린 거 봐. 아휴! 더러워~
- 책상에서 냄새나는 거 아냐? 쟤 입냄새 되게 나잖아.
은우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마
정은이 말고도 본 아이들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침
흘리고 자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문제는 아이들이 은우의 입냄새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그대로 믿고 모든 걸 판단하고 있다는것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이 시작된 후에도, 다시 화제가된 은우의 입냄새에 대한 아이들의 수군거림은
계속되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선생님이 몽둥이로
교탁을 몇 번 두들기는 것으로 차분해졌지만, 은우는
오늘도 몹시 피곤한 하루가 될 것 같아서 벌써부터 머리가 무거웠다.
1교시가 끝나자 은우는 부리나케 교실에서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건물 밖에 있다가 수업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교실에 들어갈 생각으로 복도를 지나는데, 광일이가
아는 체를 했다.
- 은우야!
은우는 못 들은 척 그냥 지나쳤다. 광일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한번 은우를 불렀다.
- 은우야!
은우는 이번에도 모른 척하고 복도를 걸어가는데,
광일이가 뛰어오더니
- 은우야, 오늘 우리 집에서 안 놀래? 우리 엄마가 맛있는
과자 사다 놨는데..
은우가 슬금슬금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으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 야, 저기 입에서 똥냄새 나는 애들 있다.
병철이었다. 은우는 당장 달려가서 녀석의 얼굴을 밟아 주고 싶었지만, 녀석의 그 무식한 엄마 때문에 참을 수밖에없었다. 은우가 겨우겨우 화를 누르고 있는데,
병철이녀석은 자신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은우의 입장을 악용해서 은우와 광일이를 조롱했다. 녀석의 조롱은 한층 더 노골적이었고, 애초부터 광일이가 아닌 은우를 겨냥한 것이었다.
- 어우, 냄~새.
녀석은 손짓으로 냄새를 내쫓는 시늉을 하더니, 엄지와 검지로 코를 막는 시늉까지 했다. 옆에 있는 녀석의
똘마니들 또한 마치 진짜 냄새라도 나는 것처럼 녀석의
시늉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 은우야..
은우는 병철이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는
광일이에게 치미는 짜증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광일이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밀쳐 버리고는 자리를 피했다. 그때, 은우의 등 뒤로 병철이의 징긍징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저기 똥이 도망간다~아!
은우는 수업 내내 생각한 끝에 더 이상 광일이와 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떳떳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광일이와 싸잡혀 놀림감이 될 수는 없었다.
선생님의 종례말씀이 끝나고, 은우는 광일이가 자신을
기다리거나 따라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은우는 광일이와 마주치더라도 못 본 척 피할
생각으로 걸음을 빨리 했다. 한참을 빠른 걸음으로 걷던
은우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광일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안심하고 천천히 걸어갈 생각으로 뒤를 돌아봤다.
- 은우야!
확인 차 뒤를 돌아보았다가 광일이와 눈이 마주친 은우는뒤돌아본 걸 후회했지만 벌써 광일이는 은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광일이는 줄곧 은우의 뒤를 쫓으면서
은우가 돌아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반갑게 은우를 불렀던 광일이는 막상 은우 옆에 서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함께 걸을
뿐이었다. 은우는 이 모든 상황이 짜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광일이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광일이를 피하고 싶을 뿐이었고, 녀석이 자신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은우는 화난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 없이 땅만 보고 걸었고, 광일이는 은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같이 했다. 은우는 걸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광일이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광일이를 떼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어떻게, 뭐라고 말하지?..
오늘은 그냥 같이 가고 내일 말할까?..
아냐, 내일로 미루면 더 힘들지 몰라. 그냥 눈 딱 감고 말해 버릴까?’
은우가 이렇다 할 결정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며 걷고 있는데,
- 야, 저기 똥 두 마리가 걸어간다~ 어휴! 냄새~
또 병철이었다. 은우는 녀석들이 놀리는 것보다,
광일이를 빨리 떼어 내지 못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 아이, 씨발! 왜 자꾸 따라다녀! 이 냄새나는 새꺄!
너 때문에 나까지 냄새나는 놈이 돼 버렸잖아!
이 시궁창 같은 새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억누르고 있던 짜증이
폭발하면서 튀어나온 말에 자신도 놀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광일이는 어둔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땅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은우는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을 한 자신을
원망하면서 분노와 증오가 담긴 눈으로 병철이를
노려보았지만, 병철이 일행은 ‘지들끼리 싸운다’고 은우와 광일이를 조롱하면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 미
- 미안해. 나 때문에..
은우는 또 다시 치미는 짜증을 겨우겨우 참았다. 자신이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광일이 입에서 먼저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자 어이가 없었다. 미안할 짓을 한 건자기인데, 오히려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광일이가 은우는 짜증이 날 정도로 답답했다. 은우는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은우는 말없이 광일이에게 등을 돌리고
걸어갔고, 광일이는 그런 은우의 모습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은우의 예상대로 광일이는 등굣길에 은우네 집에들르지 않았다. 은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광일이가
지나는 골목길에서 광일이가 올라오는 모습을 기다렸지만광일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학교에 가는 내내도 뒤를
돌아보며 광일이의 모습을 찾았지만 광일이를 볼 수는
없었다.
광일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수업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던 은우는 쉬는 시간에 광일이네 반에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광일이의 책상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책도, 공책도, 가방도, 신발주머니도 없었다.
은우는 불안한 마음으로 광일이의 짝에게 물었다.
- 광일이 학교 안 왔어?
- 어.
- 왜?
- 몰라. 어디 아프대.
- …….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내내 은우의 발걸음은
마음만큼이나 무거웠다.
‘나 때문인가?.. 나 때문일 거야.. 안 되겠다. 광일이한테 가봐야겠다.’
은우가 광일이네 집에 가 볼 마음을 먹고 걸음을 재촉하려 할 때,
- 야! 입에서 똥내 나는 놈! 광일이 어디 갔냐?
같은 똥끼리 같이 다녀야지!
또 병철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은우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으로 아무 대꾸 없이
길을 갔고, 병철이는 아무 반응이 없는 은우의 태도에
머쓱해져서 혼잣말을 씨부리고는 더 이상 은우를
자극하지 않았다.
광일이네 집 앞에 도착한 은우는 생각이 복잡했다. 막상 광일이가 걱정돼서 오긴 했지만, 또 다시 광일이와 엮여서 놀림 받을 생각을 하니 그것 또한 여간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은우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광일이네
집까지 오긴 했지만, 이성적으로는 이미 광일이와의
관계를 끝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비록 모진 방법이긴
했지만, 그나마 그게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지 않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괜한 동정심 때문에 질질 끌다간
나중에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어차피 끝내기로 마음먹은 거, 아예 ‘지금’ 끝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일이에겐 미안했지만,
광일이와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감내해야 할 고통들을
은우는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은우는 무겁지만 냉정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가슴
한 켠에 원죄의 일부분을 남겨둔 채로..
학교에 가기 위해 대문을 연 은우는 깜짝 놀랐다. 웃고
있는 광일이의 잇몸이 피투성이였다.
- !.. 광일아..
- 은우야, 나 이제 입냄새 안 나. 이틀 동안 깨끗이
닦았어. 냄새 나나 한번 맡아 볼래?
은우는 ‘이~’하고 벌린 광일이의 입에서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 확인하기 전에 피투성이인 광일이의 잇몸을
보고 혐오감과 거부감부터 느꼈다. 게다가 은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강한 집착이 서린 광일이의 섬뜩한 눈빛은
은우로 하여금 두려움마저 들게 했다.
- 됐어.
- 한번 맡아 봐.
은우는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보통 때와 다르게 집착과 강요가 느껴지는 광일이의 태도와 그 속에 담긴 간절함을 뿌리치지 못해 은우의 벌린 입에 코를 갖다 댔다.
- 어. 이제 안 난다.
- 그치? 이제 안 나지?
순간 환하게 바뀐 광일이의 얼굴을 보고 은우는 차마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은우는 지난 이틀 동안 광일이가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지, 또 집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지만, 귀기 서린 광일이의 얼굴을 보는 일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또 광일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첫날과는 달리, 둘째 날에는 광일이에 대한 죄책감이나 걱정보다
무거운 짐을 벗었다는 홀가분함을 느꼈던 게 은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 더 큰 부담을 주는 혐오스런 얼굴로 나타난 광일이가 반갑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다시 집 앞에 찾아온 광일이에게 차마
모질게 할 수 없어서, 은우는 어쩔 수 없이 광일이와 함께 학교에 갔다.
광일이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말했는데, 이틀 동안
갑자기 말이 많아진 것 같았다. 은우는 부산스러워진
광일이가 적응이 안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잇몸이 피범벅이 될 때까지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일이의 입냄새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광일이가 물어봤을 때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거짓말을 했지만, 오히려 그 냄새가 더 역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은우는 그것까지 내색할 수는 없었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은우는 불안했다. 광일이와 함께
가는 모습을 또 병철이 일행에게 보여서 놀림을 당할까 봐 걱정이었다. 은우는 광일이가 하는 말들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광일이를 떼어 내느냐
마느냐, 떼어 낸다면 어떻게 떼어 내느냐’하는
생각뿐이었다. 때마침 은우의 눈에 주번 표시 리본을 달고 가는 아이가 보였다. 은우는 지체 없이,
- 아차! 나 오늘 주번인데. 아~이, 늦었다.
미안해, 먼저 갈게.
은우는 광일이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달려가고 있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자위했다.
광일이는 그런 은우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종례가 끝나고 집에 가려고 나온 은우는 교실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일이를 보고 멈칫했다. 짜증과
부담감.. 그리고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 주번이라며?..
- 어? 어..
은우는 자신이 주번인지 확인하러 온 광일이의 눈에서
섬뜩한 집착을 느낀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물론 그 짜증의가장 큰 원인은 양심의 가책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은우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은우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광일이를 밀치고 복도를
지나갔다. 은우는 이제 광일이에게 거짓말 했다가 들킨
것도 창피하지 않았다. 이참에 확실하게 광일이와의
관계를 마무리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은우는
광일이가 쫓아오더라도 도망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뛰지 않고 걸었지만, 어쩐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빠르게 걷고 있었다. 다행히 광일이는
쫓아오지 않았다. 은우는 가슴 한켠이 어두워지는 걸
느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양심의 가책까지
다스리기엔 은우는 아직 어렸고, 또 그로 인한 모든 것들을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광일이는 은우를 찾아오지 않았다. 등굣길에도, 하굣길에도.. 어쩌다 마주치는 복도에서도 광일이는
은우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본인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피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은우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당분간 마음이 편치 않더라도 병철이의
놀림에서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자위했다. 실제로
광일이와 함께 다니지 않으니까 병철이의 놀림을 받는
일도 그만큼 줄었다. 물론 아직까지 녀석의 놀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광일이와 함께 다니지 않는 한 녀석의놀림도 언젠간 시들해질 거라고 은우는 생각했다.
- 야, 똥내 나는 애! 왜 혼자 다니냐?
똥냄새 나는 애들끼리 같이 다녀야지.
은우가 체육 시간에 맞춰 운동장으로 나갈 때, 병철이가 또 은우에게 시비를 걸었다. 은우는 아무 대꾸 없이 자리를피하려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면서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은우는 병철이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말했다.
- 나 이제, 광일이랑 안 다니거든. 한 번만 더 나 놀리면,. 그땐 정말 죽여버린다.
은우는 살기 어린 눈으로 병철이의 멱살 잡은 손에 힘을주며 위로 들어 올렸고, 병철이는 까치발을 하면서 멱살을 잡고 있는 은우의 손을 떼어 내려고 발버둥쳤다. 옆에 있던똘마니들은 놀란 표정을 하면서도 은우의 기에 눌려
끼어들지 못했고, 병철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사색이 되었을 때야 은우는 병철이를 놓아주었다.
- 개새끼!
병철이는 분을 이기지 못해 욕을 했지만 은우와 눈을 .
마주치지는 못했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가는 길에 은우는 광일이네 반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야! 이 똥내 나는 새끼야! 이 재수 없는 새끼.
광일이었다. 병철이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밀침을 당하며 놀림을 받고 있었다. 은우는 교실 안을 들여다본 걸
후회했다. 아마도 병철이 녀석이 자기에게 당한 분을
광일이에게 풀고 있는 것 같았다. 은우는 이미 머릿속으로 끼어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뛰는 가슴이 갈등하는
터라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지도
못하고 끼어들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광일이는
계속해서 병철이 녀석들에게 떠밀리며 놀림을 받고
있었고, 주변의 누구도 광일이를 도와주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는 광일이의 모습을 재밌는
구경거리처럼 그저 바라보고들만 있었다.
- 우당탕!
병철이에게 떠밀린 광일이가 책상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은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건 광일이를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병철이를응징하기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약자를 짓밟는 불의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이내 병철이와 눈이 마주친 은우는 급속도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또 다시 광일이와
엮이는 사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은우의 갈등을 조롱이라도 하려는 듯, 병철이는 일부러
은우를 의식하며 광일이에게 침을 뱉었다.
- 이 냄새나는 더러운 새끼, 퉤!
은우는 보란 듯이 광일이를 짓밟는 병철이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여전히 달려가진 못하고 갈등만 하고
있었다.
- 왜? 열받냐? 열 받으면 저기 니 친구한테 일러라.
병철이는 비겁하게 은우의 존재를 광일이에게 알렸다.
광일이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고개를 돌려 은우를 보았다. 광일이의 얼굴에서 병철이가 뱉은 침이 흘러내렸다. 침을 닦으며 은우를 바라보는 광일이의 눈엔 처연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은우는 차마 더 광일이를 볼 수 없었다.
광일이를 뒤로하고 걸어가는 은우의 등 뒤로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은우는 더 이상 병철이를 피하지
않았다. 병철이와 눈이 마주칠 때면 오히려 결연한 의지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한번 더 녀석이 주둥아리를 놀리면, 그땐 정말 녀석을 죽여버릴 생각으로……. 그런 은우의
살기가 느껴졌던지, 아님 광일이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병철이는 더 이상
은우 앞에서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은우가
지나가고 나서야 똘마니들하고 뭐라고 씨부려대긴
했지만, 그건 자기들끼리나 알아들을 정도의 소곤거림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두세 번뿐이었다. 그 뒤로는
오히려 병철이 쪽에서 은우를 피했다.
병철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정리되면서 은우의
학교생활도 자연스레 안정을 찾아갔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은우의 입냄새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도
점차 시간 속에 묻혀 버렸다.
한동안 광일이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어색했지만,
익숙함이란 모든 떳떳치 못한 것들조차 무감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어느덧 이제는 광일이와 얼굴을 마주치는 일조차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익숙해졌을 때, 은우의 곁에는 다시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들과 예전의 친구들 모두.. 아이들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모든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멍청한 병철이와의 관계만 빼고. 병철이 주위엔 늘상 붙어 다니는 두 똘마니가 있었지만, 이기적이고 변덕스런 성격 탓에 많은 친구들이 따르지는 않았다. 녀석이 다른
친구들과의 경쟁에 있어 우위를 점하는 건 오로지 돈
뿐이었다. 굳이 하나 더 덧붙이자면, 그것이 친구들과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몰상식한 엄마와 외삼촌 빽 정도?.. 아무튼 은우가 철저한 외톨이에서 다시 친구들 사이로 파고들어 그들의 마음을 얻게 된 뒤부터 광일이의 존재는 은우의 기억 속에서 점점희미해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지금의 은우에게 광일이와의 지난 시간들은 애초에 없었으면 좋았을
지독한 구취(舊臭)일 뿐이었다.
- 은우야, 너 요새도 광일이랑 노니?
- 아니, 왜요?
- 걔 엄마가 집 나갔다는데, 너 알고 있었어?
- !
때가 되면 원치 않는 소식들도 듣게 마련이다. 그것도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한꺼번에..
다음날부터, 듣고 싶지 않은 소식들이 연이어 은우의
귀에 들려왔다.
- 걔네 엄마 바람났다며?
- 아빠랑 같이 가서 살 거래.
- 어디?
- 강원도랬나?
- 근데, 어디가 아픈 거래?
- 몰라, 뱃속 어디가 안 좋대. 걔 입냄새 되게 심하게
났잖아? 그거 다 속병 때문에 그랬던 거래.
그리고 며칠 뒤, 전학 절차를 마치기 위해 아빠랑 학교에 온 광일이를 볼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광일이는 은우와 마주친 눈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
떳떳하진 않았지만, 은우 또한 마지막이란 생각에
광일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광일이의 눈에선 엄마를
잃은 슬픔이나 아빠와 함께 떠나야 하는 처지에 대한
서글픔, 은우에 대한 원망이나 서운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는, 그렇다고 초연해
보이거나 평화로워 보이지도 않는 무감의 눈빛이었다.
아빠의 손에 이끌려 그대로 발길을 돌리는 광일이의
뒷모습이 은우와 광일이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날 밤, 은우는 광일이 꿈을 꾸었다. 아빠와 함께 학교를떠나던 광일이가 은우를 향해 웃어 보였는데, 벌어진
입으로 보이는 잇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입냄새를
안 나게 하려고 이틀 동안 이를 닦았었다는.. 그때의 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소름끼치고 섬뜩했는지,
은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말 이상한 일들은 그 후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양치를 하던 은우의 칫솔에 피가 묻어 나왔다. 칫솔질을 잘못해서 잇몸을 잘못 건드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속 이를 닦았는데, 뱉어 낸 치약 거품마저
시뻘건 핏빛이었다. 찝찝한 기분으로 거울을 본 은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울에 비친 잇몸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색이 돼서 엄마한테 달려간 은우는
울먹이며 잇몸을 보여주었고, 엄마는 겁에 질린 은우를
진정시키며 물로 입 안을 헹구게 하고 다시 거울을 보게
하셨다. 그런데 거울 속에 비친 잇몸은 말끔하기만 했다. 엄마는 칫솔질을 잘못하면 피가 날 수도 있다며 별거
아니라고 말했지만, 은우는 자신이 거울에서 봤던 모습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악몽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주위에서 나는 지독한 악취에 인상을 찌푸렸던 은우는 그 냄새가 자신의 입냄새라는 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은우의 입냄새는 은우만 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은우가 입을 벌리는 순간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심지어 엄마까지도..
은우의 갑작스런 입냄새에 엄마가 직접 이를 닦아 주기도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학교에서는 이미 은우의
입냄새가 광일이한테 옮은 거라는 얘기가 또다시 돌고
있었고, 엄마는 은우를 데리고 병원에도 가 봤지만 별다른 이상을 찾지 못했다. 은우는 자신의 몸에 생긴 갑작스런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스스로 그 지독한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는 반사적인 반응들을 몸으로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엄마까지도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그 지독한 입냄새를 통해 서글픈 멀어짐 또한
느끼게 되었다.
어렵게 다시 찾게 된 친구들이 또다시 은우 곁에서
멀어졌다. 은우는 그런 친구들이 야속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역겨워서 구역질을 할 만큼의 악취,
그리고 전염병처럼 옮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은우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말이 아니었다.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심적으로 받은 상처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신경과민과 대인 기피, 그리고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생긴 여파로 인해 은우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핼쑥해져 있었다.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데다가 지나치게 예민해진 신경 때문에
수업에도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고, 자신감 결여로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려함에 따라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매번 한 두 개 이상 틀려 본적이 없는 받아쓰기 점수도 처음으로 70점을 받았고, 한 번도 걸려 본 적이 없는 나머지 공부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주변의 시선에 대한 피해 의식
단계를 넘어, 은우가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은우의 모습은 점점 광일이를 닮아가고 있었다.
- 미안해, 광일아..
내가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 줘..
미안해..
정신과 몸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은우는 다시 매일 밤 광일이가 나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의 광일이는
어느 때는 슬픈 눈으로, 어느 때는 사납게 노려보는
눈으로, 그리고 어느 때는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으로
은우를 바라보았지만, 피범벅이 된 시뻘건 잇몸을 보이며 웃는 것만큼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그 섬뜩한 모습에 놀라 식은땀에 젖은 몸으로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잠들수 없는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아야만 했다. 그런 상태로 학교에 갈 때마다, 은우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학교도, 친구도, 가족도..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에 대한 미련마저도..
은우는 비로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광일이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은 이미 늦어버린 죄의식마저 소리 없이 삼켜 버렸다. 심지어 은우 자신까지..
‘광일이가 죽었다고?..’
조례 중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광일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은우는 머릿속이 휑하니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광일이는 뱃속 어딘가가 아파서 수술을 받았지만 일주일만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 어린 너희들에게 말하기 어려운 얘기였지만, 광일이를. 알았던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려 줘야 할 것
같았고, 그 친구를 기억하고 그 친구가 하늘에서
편하게 쉴 수 있기를 기도하라는 뜻에서 말해 주는
거야.
아이들의 시선은 슬금슬금 은우에게 향했고, 은우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었다.
방과 후, 은우는 광일이네 집으로 갔다. 자신의 발걸음이 왜 광일이네 집으로 향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은우는 굳이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광일이네 집에 도착한 은우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열려진
방문으로 이미 비워져 있는 방 안을 먼저 보게 되었다.
가구는 아무것도 없었고, 이사의 흔적을 알려주는 정도의 쓰레기만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은우는 발길을 돌릴
것인지, 방 안에 들어가 볼 것인지를 망설이다 결국 문턱을넘었다. 은우는 방안을 훑어본 뒤, 눈을 감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광일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 그간의 사건들..
그리고 광일이의 마지막 모습과 불편했던 감정들..
은우는 문득 서늘한 기운에 눈을 떴다. 열려진 방문으로 바람이 불어 바닥에 있던 쓰레기들이 살짝 쓸렸다. 그
바람에 쓰레기에 가려져 있던 광일이의 그림들이
드러났는데.. 이사를 하면서 챙겨가지 못한 건지, 그냥
버리고 간 건지 너댓 장 되는 갱지가 바닥에 있었고,
은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림들을 들여다보았다. 전구, 화장대, 방문.. 무슨 생각에서 그렸을지 모르는 의외의
그림들이었다. 은우는 그림을 도로 바닥에 두고 나가려다,장판 밑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장판 바닥을 들춰보았더니, 역시나 그림이 있었다. 광일이가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은우에게 지독한 굴욕감과
열등감을 안겨 주었던 그림. 은우는 그림을 집어 들다가
떨어뜨린 또 한 장의 그림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자빠졌다. 아마도 그림 두 장이 겹쳐져 있던 모양인데,
뒤에 떨어진 그림은 잇몸이 온통 시뻘건 핏빛으로 칠해진광일이 얼굴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거렸다. 은우는 겁에 질려 후다닥 방을 뛰쳐나가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멈춰 섰다. 일순간 미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은우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문제의
그림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먼저 보았던 그림이 발에 밟혔다. 광일이가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은우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 그림도 집어 들었다. 무심코 주머니에 구겨 넣으려던 걸, 먼지를 털어 낸 다음 가방에 있는 공책 사이에 끼워 넣고 방을 나섰다.
집까지 뛰어온 은우는 엄마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꺼낸 그림을 바닥에
펼치고 성냥에 불을 붙였다. 그림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은우는 몸속 저 밑바닥으로부터 다시금 삶의 활기가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끔찍한 입 모습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림 속의 눈이 타들어갈 때, 은우는 그 눈이 몹시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그라진
뒤였다. 은우는 재가 된 그림에 물을 뿌려 수챗구멍으로
흘려보냈다. 모든 게 흔적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공책에 끼워 두었던 그림마저 태우려고 꺼낸 은우는
어쩐지 바로 불을 붙이지 못하고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결국 그림에서 느껴지는 진실한 그리움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은우는 그림을 태우지 않는 대신 안방
장판 밑에 숨겨 두었다.
그날 밤, 은우는 정말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은우의 지독했던 입냄새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우 곁엔 다시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은우는 다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느 늦은 오후, 은우는 낮잠을 자다가 광일이 꿈을
꾸었다. 광일이는 어두운 골목길을 가고 있었고, 은우는 말없이 광일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서 환한 빛이 비치더니 광일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은우를 보는 광일이의 표정은 엄숙했고, 눈빛은 차갑고
매서웠다. 그리고 천천히 웃어 보였다.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찼던 차갑고 매서운 눈은 자애로움이 깃든 온화한
눈으로 바뀌었고,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활짝 열리면서
선홍색 잇몸 아래로 새하얀 치아가 빛났다.
은우의 감은 두 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은우의
머리맡 장판 밑에는 광일이가 그린 그림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