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 Impacts

by 유명운


#1-1. 전철 - 2003년 7월 13일 일요일 오후

명운은 전철에 타자마자 출입문 바로 옆에 기대어 섰다. 팔짱을 끼고 있는 명운 앞을 지나며 몇몇 사람들이 더 전철안으로 들어왔다. 출입문이 닫힐 때쯤 다급하게 들어오던 한 남자가 명운의 팔짱낀 팔을 치고 들어갔다. 피부끼리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다소 세게 부딪혔는데도 남자는

사과도 없이 노약자석 손잡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아프진 않았지만, 명운은 부딪힐 때의 그 소리와 피부가

맞닿았을 때의 차가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디 있다

들어왔는지, 이 더운 여름날에 살과 살이 맞닿았는데도 그 느낌이 차가울 정도로 시원했다. 명운은 자신을 치고 간 그남자를 팔짱을 낀 채 한동안 바라보았다. 강렬한 빨간색

폴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어깨에 검정색

륙색을 걸치고 있었다. 얼굴은 앳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짧은 머리에 륙색을 매고 있는 것으로 봐서 복학한

대학생쯤 되는 것 같았다. 불쾌한 시선으로 남자를

째려보던 명운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뭐 그렇게

쳐다본다고 불쾌했던 기분이 좋아질 리도 없고, 그렇다고 다가가서 사과를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를 피해 시선을 돌린 곳에 명운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영화 브로셔였다. 남자가 서 있는

맞은편 노약자석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영화 브로셔를 들고 꽤나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영화를 좋아하는 명운은 그 남학생이 들고 있는 브로셔가 어떤 영화의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거리가 좀 있는데다 학생이 워낙 웅크리고 브로셔를 보고 있어서 어떤 영화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명운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학생 앞으로 다가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학생이

보고 있던 브로셔를 접어서 가방 안에 넣는 것이었다.

아쉬움과 궁금증으로 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명운은 학생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로셔를 가방에 넣고서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펴고 정면을 바라보는 학생은 고교 시절의 명운

자신이었다.


#1-2. 전철 - 1993년 7월 11일 일요일 오후

명운은 전철에 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영화

브로셔를 꺼냈다. 기말고사 시험 기간 내내 보고 싶었던 걸참고 있다가 시험이 끝나자마자 본 영화였다. 명운은

브로셔를 보면서 아직도 가시지 않은 영화의 여운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었다. 특히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흘러나오던 미스터리하면서도 긴박감 있는 반젤리스의

음악은 영화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으면서도 음악 자체가 긴 여운을 담고 있었다. 명운이 본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감독판’이었다.

‘SF영화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카피에 끌려 보게 된

영화는 명운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아직

명운의 지적 수준이 그런 많은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을

만큼에까진 이르진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명운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혼돈과 여운이었다. 명운은 그

혼돈이 어느 시점에 가면 하나의 체계를 이룰 거라 믿으며 영화의 브로셔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명운은 브로셔를

가방에 넣고서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펴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명운은 자신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운은 일어서려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굳이 일어날 필요를 느낄 수 없어서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금방 내릴 터였고, 노약자나 임산부도 없는데 꼭 일어나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자리에 앉은 채 그냥 앞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짙은 빨간색티셔츠를 입은 남자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명운은

‘저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빨간 옷을 입었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자신을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튀는 색깔의 옷을 입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튀는 색깔’이란 표현도 다분히 안정된 색상을 강요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운은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을 하다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의식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떤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것 같았다. 명운은 그 남자의 옆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남자를 바라보던 명운은 남자의 모습이 자신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피식 웃었다. 조금 닮은

사람을 봤다고 너무 오버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나저나왜 저 아저씨가 날 보고 있었지?’ 생각하던 명운은 이내

자신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2-1. 집

명운은 고등학생인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는 고교 시절 자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명운은 애써 그 시선을 피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이 무의식 중에 작용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명운은 다시 고교 시절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명운은 이 알 수 없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다. 혹꿈이나 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신의 뺨을 때려

보기도 하고, 눈을 떴다 감았다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명운은 소름이 돋았다. 알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명운의 캄캄한

머릿속에 단 하나의 명제만이 실행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피해야 한다!’

명운은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전철이 빨리 다음 역에서

정차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철에서 너무 빨리 내린 명운은 집까지 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평소 다니던 곳이 아닌 터라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한참이나 걸려서 집에 도착했다. 사실

전철에서 내린 후 다음 전철을 타도 됐지만, 명운은

한시라도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집에 들어온 명운은 방문을 닫고 책상에 앉아서

지금까지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자,명운은 스탠드를 켜고 그동안의 사건들을 종이에 그려

보았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을 직접 겪었지만,

그에 대한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명운은 왜 그때 자신이 그곳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는지, 직접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의 존재를 물리적으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2-2. 집

집에 돌아온 명운은 책상에 앉아서 스탠드를 켜고 씨네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1993년 7월 11일(日)-‘블레이드 러너-Director's Cut’〉

‘SF영화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카피가 기말고사 기간 내내 공부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다행히 시험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터미네이터나 로보캅 같은 액션을 기대했던 탓에 초반부는 꽤나 지루했다. 아니, 영화 후반부에 남녀

주인공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카피에 속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반젤리스의

음악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영화와는 차원이다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눈이 한 단계 높아진 느낌이었다. 집에 오는 내내 영화와 음악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내

머릿속을 두 단어로 정리하면 ‘혼돈’과 ‘여운’이었다. 그

혼돈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까지 앞으로 몇 번을 더

보게 될 것 같다. 아니, 굳이 정리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혼돈이 정리되는 순간, 여운도 사라지게 될

테니..


※ ‘블레이드 러너’가 ‘저주받은 걸작’으로 불렸던 이유

-1982년 개봉 당시, 향후 10여 년간 사상 최고 흥행작이 될 ‘ET’와 맞붙었다고 함(정확히는 ‘블레이드 러너’가 2주 늦게 개봉). 게다가 디스토피아적인 암울한 세계관과

심오하고 철학적인 문제의식으로 인해 대중뿐 아니라

비평가들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수 마니아들에 의해 끊임없이 추앙받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재평가되어 현재에는 SF영화의 고전이자

걸작으로 꼽힘.


蛇足 -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나랑

비슷한 사람을 봤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래의 나’라고나 할까?.. 꼭 나이든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혹시 나의 리플리컨트(복제인간)?..


#3. 씨네 다이어리

방안에 틀어박혀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던

명운은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극도의 피곤함으로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다. 책상 위에 흘린 침을 닦고 일어났을 때는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세수를 하고 나오니, 아버지는 버라이어티 TV 프로그램을보고 계셨고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다. 세수를

하고 나와서도 명운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TV 앞에 앉아 있었다. ‘내일 출근을 위해 저녁 먹고TV나 보다 일찍 자자’고 생각한 명운이 밥상 앞에 앉아서 무기력하게 숟가락을 뜨고 있을 때, 여동생이 외출에서

돌아왔다. 동생은 밥상 앞에 앉자마자 밖에서 찍어온

스티커 사진을 다이어리에 붙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밥상 앞에서 딴짓하는 동생이 못마땅했는지 잔소리를

하셨고, 동생은 이내 다이어리를 덮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명운은 자신이 고1 때부터 쓰던 씨네 다이어리에 생각이 미쳤고, 흥분과 긴장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밥을 먹었다.


#4. Slide Impacts

명운은 긴장과 초조함으로 씨네 다이어리를 읽고 있었다. 고1 때 쓴 다이어리에는 명운이 찾는 내용이 없었다.

고3 때는 수능 준비로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고2 때 쓴 다이어리에 명운이 찾고자 하는 내용이 있을

확률이 컸다. 만약 고2 때의 기록에도 명운이 찾고자 하는 내용이 없다면, 명운이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해답을 찾을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명운은 기대와 불안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1993년의 기록에 빠져들고 있었다.


1993년 7월 11일.. 그날의 기록을 본 명운은 심장이 멎는듯했다. 특히나 마지막 줄에 사족(蛇足)으로 붙인 글의

내용은 명운이 오늘 겪은 모든 일이 사실, 즉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명운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명운이 겪은 일은 분명 10년 전의 자신이 겪은 일이기도 했다. 현재의 명운은 과거의 자신을 만났고, 과거의 명운은 미래의 자신을 만난 것이다. 이제 명운은 더 이상 자신이 겪은 일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 우연 또는 필연적인 만남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5. 시공(時空)의 탐험가

명운은 ‘시공의 탐험가’로 불렸던 물리학자 로버트 튜링박사의 ‘Slide Impacts'를 다시 꺼내서 읽고 있었다.

명운은 한때 이 책을 읽고 로버트 박사의 이론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책은 출간 당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는데, 이후 로버트 박사 자신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물리학적인 방법 대신 인간의 기억에 대한 연구로 궤도를 수정하는 바람에 그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고 사라진 책이기도 했다. 로버트 박사 또한 이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실패한 과학자로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라곤, 어느 레스토랑 테이블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세상에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휴지 위에 쓴 다소 생뚱맞은 글이 전부였다. 하지만

명운은 로버트 박사의 이론이 증명되지 못했을 뿐, 이론

자체는 완벽하다고 믿었다. 특히나 그의 ‘슬라이드 이론’은 명운이 지금껏 읽어 온 모든 이론서들 중에서 시간과

공간에 관한 정의를 가장 쉽고 명확하게 설명한 것이었다.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함께 움직이는 일치된 개념이다. 흔히 사람들이 착각하는(하루 24시간이라는 생활 주기에 맞춰 시간에 중점을 두다보니) 개념 중의 하나는 공간을 언제나 정지된 개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후 8시에 약속 장소에서 애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10분쯤 늦게 도착한 애인이 왔을 때, 당신은 애인과 함께 약속 장소를 떠났다. 그럼 당신은

당연히 8시부터 8시 10분까지는 약속 장소에 있었고,

8시 10분 이후에는 약속 장소에 없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건 시간과 공간을 분리된 개념으로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 당신의 착각이다. 당신이 떠난 8시 10분 이후에도 8시의 당신은 여전히 약속 장소에서 당신의 애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어릴 적 갖고 놀았던 슬라이드를

생각해보라. 여러 개의 필름으로 이루어진 슬라이드는

일종의 작은 영사기다. 그 작은 영사기의 버튼을 누를

때마다, 당신의 눈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어두컴컴한 바탕 위에 펼쳐졌을 것이다. 그런 슬라이드가 고장나거나 싫증났을 때, 또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인해 작은 구멍으로만 보는 세상이 성에 차지 않아 슬라이드를 분해했을 때.. 당신은 지금껏 보았던

경이로운 세상이 한낱 필름 몇 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실망스런 필름 몇 장이 당신이 이제껏 착각해 온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올바르게 수정해 줄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자, 그러면 다시 8시로 돌아가

보자. 8시에 약속 장소에서 애인을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들었다고 하자. 그리고 8시 10분에 애인을 만나 당신이 이미 떠나고없는 약속 장소 또한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들었다고 해

보자. 그리고 그 두 필름을 순서대로 꽂아서 슬라이드의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해 보자. 먼저 8시에 약속 장소에서 애인을 기다리는 당신의 모습이 보일 테고, 다음에는

당신이 없는 약속 장소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분리된 개념이라고 인식하는 당신은 8시 10분의 슬라이드를 보고 이제 8시의 당신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슬라이드를 보라. 8시의 당신은여전히 약속 장소에서 애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즉 하나의 시간에는 언제나 하나의 공간만이 존재한다...」


「...이제부터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일치된 물리적

개념으로 보고 ‘시공’으로 줄여서 표현하겠다. 그렇다면 두 개의 시공이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아직도

당신이 이런 현상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지금 당장

슬라이드에서 두 개의 필름을 꺼내 그 둘을 붙여보라...」


명운은 책을 덮었다. 로버트 박사는 ‘슬라이드 이론’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책 제목인 ‘Slide Impacts'.. 즉 ‘시공의 충돌’에 대해서는 그 열린

가능성만을 제시했을 뿐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의 책 맨 앞에 서문 대신 적힌,

‘나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짧은

글귀가 말해주듯이..


#6. 움직이는 시공(時空)

명운은 책을 덮고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 자신은

과거의 나와 만났으며, 과거의 나 또한 미래의 자신을

만났다. 이것은 분명 서로 다른 시공의 조우(遭遇)를

뜻했다. 로버트 박사는 ‘충돌’이란 표현을 썼지만, 명운은 자신에게 어떠한 물리적인 피해도 입히지 않은 이 우연한 만남을 충돌이란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명운은 그날 있었던 일을 시간 순서대로 다시 떠올렸다. 시작은 전철을 타고 나서부터였다. 분명 그 이전까진 이 예기치 못한

조우를 예측할 만한 어떠한 조짐도 없었으니까. 명운은

그날의 장면 장면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1. 전철을 탄다.


2. 문 옆에 기대어 선다.


3. 우측 대각선 반대편 노약자석에 앉은 학생이 들고

있는 영화 브로셔에 시선이 간다.


4. 고개를 든 학생이 고교시절의 나임을 확인한다.


정리라고 할 것도 없는 간단명료한 시간적 구성이었다. 명운은 이 네 가지 사실을 어떻게든 ‘서로 다른 시공의

조우’와 연관 지으려 했지만, 이 단순한 시간적 구성을

가지고 자신이 경험한 그 기이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으려는 명운을 좌절케 하는 그 첫 번째 장애물은 바로 로버트 박사가 말한‘시공의 충돌’이었다. 두 개의 시공이 충돌하려면, 그

이전에 분명 두 개의 시공은 달리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두 명운(과거와 현재의)이 같은 시공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즉 같은 시공(=열차) 안에, 그것도

같은 칸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명운은 차라리 두 자신이서로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전철 안에 타고 있었다면

오히려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분명 서로 다른 전철, 즉 두 개의 시공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같은 시공(=열차)에, 그것도 같은 칸이라는 상황이 명운의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명운은 생각이 진전되지 않자, 일종의 가정(假定)을 해보기로 했다. 즉,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 사이에 가상의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가상의 경계선 너머를 과거의

시공으로, 자신이 서 있던 경계선 안쪽을 현재의 시공이라가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가정은 물리적인 현상을

무시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열차는 분명 하나의

차량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다른 시공의 열차가

충돌했다면 분명 열차의 내부 또한 그 충돌로 인해

일그러졌을 테고, 차량 안에 타고 있던 두 명운 또한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인

현상을 무시하지 않고선 생각의 진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명운은 우선 이런 물리적인 현상을 무시하기로 하고 다시 생각을 진전시켜 나갔다. 즉, 과거의 명운과 현재의 명운 사이의 가상의 경계선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일단

물리적인 충돌을 배제한 가상의 경계선을 인정하고 나니 모든 게 로버트 박사의 이론과 일치하는 듯했다. 명운은

문제가 너무 쉽게 풀리는 게 오히려 불안했다. 아직 자신이모르는 뭔가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없었다. 명운은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가상의 경계선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된 듯 보였지만, 정작 그 가상의

경계선 자체가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법칙을 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명운은 서로

다른 시공의 물리적 충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가상의 경계선 또한 그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결국은 모든 게 다시

원점이었다. 모든 현상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면 그 뒤의

현상들 또한 증명할 수 없었다. 명운은 아주 먼 길을

돌아서 다시 출발점에 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명운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고 느꼈지만, 이대로 생각을

멈추면 생각의 출발점도 다시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명운은

다른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충돌’이란 단어에만 골몰했다

‘충돌.. 충돌.. 충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명운은 충돌이란 단어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떠올리다가, 무언가가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뭔지는 뚜렷하게

떠올릴 수 없었지만, 왠지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명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펜을 들고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노트에 정리해

보았다.


1. 전철을 탄다.


2. 문 옆에 기대어 선다.


그렇다! 명운이 놓친 것이 있었다. ‘빨간 옷 입은

사람과의 충돌’.. 명운은 마치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생각을 잡아 두려는 것처럼 방금 떠오른 생각을 재빨리 .

노트에 옮겨 적었다.


1. 전철을 탄다.


2. 문 옆에 기대어 선다.


3. 빨간 옷 입은 사람과 부딪친다.


4. 우측 대각선 반대편 노약자석에 앉은 학생이 들고

있는 영화 브로셔에 시선이 간다.


5. 고개를 든 학생이 고교시절의 나임을 확인한다.


생각을 노트에 옮긴 명운은 우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중에서 놓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명운은 이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머릿속으로만 정리하려 하지 않고 노트에 옮겨진 것들을 토대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실상 변한 것은 단 한 줄의 짧은

문장이 첨가된 것뿐이었지만, 명운은 왠지 그 한 줄로 인해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은 반가운 느낌에 희망을 걸었다. ‘빨간 옷 입은 사람과 부딪친다..’


빨간 옷 입은 사람과의 기분 나쁜 충돌에서 무언가 얻을 게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생각을 진전시키던 명운은 순간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는 소리에 절망했다. 그것은 가상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랬다. 분명 빨간 옷 입은 사람은 명운과 부딪힌 후, 과거의 명운이 있던 가상의

경계선 너머로 유유히 건너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상의 경계선마저 무너뜨린 전철 안의 공간은 결코 서로 다른

시공이 될 리가 없었다. 그럴수록 어떻게 서로 다른 시공의두 명운이 같은 시공에 존재할 수 있었는지 명운은 납득할 수 없었다. 더욱이 로버트 박사가 말한 ‘충돌’도 없이……. 명운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였다. 명운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서 더 이상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서로 다른 시공이 충돌 없이 같은 시공에 존재하려면

도대체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그때였다. 명운의 머릿속에 얽혀 있던 모든 생각들이

급속도로 하나의 명제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충돌하지 않았다!’..


명운은 전율했다. 아직 충돌하지 않은 서로 다른 시공은.. 두 명운이었던 것이다.


#7. 악몽-1

명운은 걸음을 빨리했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기 전부터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골목길로

들어서고부터는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더 가까이

들렸다. 명운의 심장 박동이 빨라질수록 발자국 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명운이 뛰는 듯 빠른 걸음을 재촉할수록

발자국 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 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려서 명운은 감히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명운은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가로등불에 비쳐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땅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 뒤에 어느새 또 다른 그림자가 머리를 내밀었다. 명운은 뛰어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얼어붙어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명운이 간신히 힘을 내서 오른쪽 발을 들었을 때, 어느 순간 눈앞에는 보이지 않던 담장이 생겨서 골목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손이 명운의 어깨를짚었다. 명운은 땅에 비친 그림자를 보았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그림자였다. 명운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짚은 손을 바라보았다. 손등에 한자로 보이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명운이 손등에 새겨진 글자를 더

분명하게 보기 위해 시선을 집중할 때였다. 또 다른 손이 명운의 눈을 가리고, 명운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이 명운의입을 막았다.


명운은 식은땀으로 젖은 몸을 일으키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며칠 전부터 같은 악몽에 시달리던 명운은

또 한 번 꿈이었다는 걸 확인하고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째서 며칠간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꿈이 점점 더 현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명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방 안의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명운은 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8. 문신

명운은 학교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며칠째 계속되는 악몽에 대해 생각했다. 요 며칠 사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꾸는 악몽..

그렇다고 일상에 특별히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점점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꿈이 ‘무언가 안 좋은일의 전조는 아닐까?’하는 불안감을 배가시켰다. 그럴수록명운은 더욱 더 꿈속에서 보았던 한자(漢字)처럼 생긴

문신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된 꿈이 더

현실처럼 느껴질수록 오히려 글자는 더 희미해졌다.

글자를 확인하려는 꿈속에서의 명운의 노력은 마치

‘그 글자의 의미를 알아야만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현실에서의 의식이 개입된 듯 간절하고

필사적이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뿌옇게 흐려지는 문신의 형상은 이제 곧 꿈에서 깨어날 거라는 암시 외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분명 한자 같긴 했는데..’


얼핏 ‘일만 萬(만)’자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지만

‘萬(만)자’는 분명 아니었다. 명운은 꿈속에 나온 남자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이 분명 이 계속되는 악몽과 관련된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버스가 도착했고, 명운은 버스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9. 악몽-2

명운은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역시나 같은 꿈이었다.

며칠째 반복되는 꿈은 마치 예지몽처럼 무언가를

알려 주는 것 같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명운은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었다. 뿌연 가로등이

비추는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 명운은 잠시 돌아갈까

망설였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명운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벌써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명운은 생각보다 길었던 골목길을 지나 반대편 길로

나오면서 땅바닥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가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점차 일그러졌다. 명운은 잠시 환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명운은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고, 그러자 눈앞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누군가 뒷모습을 보이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그 학생의

모습이 점차 멀어져 갈수록 명운은 어쩐지 그 뒷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랬다. 비록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그

는 분명 고교 시절의 자신이었다. 명운은 차마 과거의

자신을 따라가진 못하고 마치 붙잡으려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뻗었다. 명운의 올라간 손이 저 멀리 자신의 어깨에 시각(視角) 안에서 얹어졌을 때, 고교 시절의 자신은

눈앞의 담장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끝내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명운은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10. 어리석을 愚(우) - 기억의 왜곡

한문 수업 시간이었다. 명운은 아직도 악몽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옥편을 뒤적이고 있었다. 한문 수업

시간이었기에 마음 놓고 옥편을 찾아볼 수 있었고, 마침

선생님도 수업과는 상관없는 다른 말씀을 하고 계셨다.

수업 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명운은 수업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눈치껏 옥편을 찾아보았지만,

꿈에서 본 한자(漢字)를 찾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꿈에서 본 문신의 형상 자체를 명확하게 확신할 수

없었기에, 혹 문제의 한자가 나오는 페이지를 옥편에서

찾았다가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업 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도시락을 꺼내고 책상을 붙이기 시작했다. 명운도

도시락을 꺼내서 친구들이 모인 자리로 갔다. 밥을

먹으면서 우연히 칠판 쪽을 바라본 명운은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칠판 위에 쓰여져 있는 걸 보고 칠판에 적힌 내용을자세히 살펴보았다. 칠판 가운데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한글로 크게 쓰여 있었고, 그 각각의 글자 밑에 한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한자로 씌어진 이름 부분에는 밑줄과 함께 ‘크게 어리석다’는 뜻풀이가 적혀 있었는데.. 명운은 칠판의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다가 전직 대통령의 이름까지 나왔는지 친구들에게 물으려다 말고 황급히 칠판으로 고개를 들렸다. ‘愚’..

그랬다. 명운이 꿈에서 본 그 문신이 분명했다.

‘어리석을 愚(우)’..


#11. 개꿈

불길한 느낌의 꿈 때문에 걱정했던 명운의 신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

친구들에게서도 나쁜 소식 같은 건 없었다. 며칠간 똑같은 꿈을 꾼다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무탈함에 감사하며 그저 개꿈이었으려니 넘겨버렸다.


#12. 표식(標式)

명운은 악몽을 꾸기 전에 고민했던 일에 대해 다시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때.. 전철 안에서 지금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 충돌하진 않았지만, 언제 또 같은 상황에

놓일지 몰랐다.


‘이후로 다시는 과거 또는 미래의 나와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다시 또 나를 만날 기회가

온다면?..’


명운은 혹시 또 올지 모를 그날을 위해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달라졌을 모습의 미래의 자신을 알아보기 위한 표식(標式)이 필요했다.


명운은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 후 전철을

탈 때쯤이면 명운의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내일이

쉬는 토요일이라 그런지 여느 때보다는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전철을 탄 명운은 출입문 옆에 기대어 섰다.

버스를 탈 때면 명운은 주로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지만,전철을 타면 자연스레 시선이 사람들에게 쏠렸다. 같은 칸 안에 탄 사람들을 살펴보던 명운의 눈에 손등에 문신을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어깨나 팔뚝에 하는데.. 그래야 필요할 때 가릴 수도 있고. 손등에 하면 장갑을 끼지 않는 한 가릴 수가 없을 텐데..’

그때였다. 명운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

‘그래, 문신! 그것도 손등이라면..’


#13. 미로(迷路)-1

시곗바늘은 이미 밤 12시를 넘은 지 오래였다. 명운과

반 친구들은 윤석이네 집에서 가을 축제 때 상영하기 위한 슬라이드 영화 제작회의에 골몰하고 있었다. 각본, 촬영, 역할 분담, 분장이나 연기 등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을 넘기고 말았다. 다행이 오늘이 일요일이라 등교에 관한 걱정 없이 늦잠을 잘 수 있어서 그나마 부담은좀 덜했다. 대략적인 회의를 마치고 윤석이네 집에서

명운이 나온 시각은 새벽 1시 반쯤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더 놀다가 자고 가기로 하고 명운만 혼자 나왔다. 낯선

곳에선 잠을 잘 못 자는 탓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단

하루뿐인 자유 시간을 시시껄렁한 얘기나 노닥거리다가 늦잠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음악도 듣고 싶었고, 책도 읽고 싶었고, 영화도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명운은

혼자라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버스도 전철도 끊긴 시간.. 명운은 집까지 걸으면서 모처럼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명운은 윤석이네 집에서 나오자마자

워크맨을 꺼내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한 5분쯤 걸었을까?.. 명운은 좌우로 갈리는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명운은 자신이 어느 쪽에서 올라왔는지

헷갈렸다. 처음 오는 윤석이네 집이었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까닭에 주의 깊게 살피지도

않은데다가, 친구들과 장난을 치면서 윤석이만 따라왔던 터라 자신이 어느 길로 왔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기억이라는 게 참 어이없게도, 양쪽 길이 모두 다 눈에

익어 보였다. 명운은 잠시 고민하다가 우측 길을 택했다. 내려갔다가 아니면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명운은 길을 내려가면서 눈에 익은 상점이나 간판이 보이는지 살폈다. 다행이 얼마 가지 않아 눈에 익은노란색 간판의 슈퍼마켓이 눈에 들어왔다. 명운은 그제사 마음을 놓고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집중했다.


‘음악에 너무 심취했던 탓일까? 분명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었는데..’

명운은 꽤 걸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정류장이 나타나지

않자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면 금방 정류장이 있는 큰길이 나와야 하는데, 그 큰길이 금방

나올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분명 눈에 익은

곳이었다. 명운이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엔 주위 모든

것들이 너무 눈에 익은 터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그동안 걸어온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명운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을까 하다가, 보면 볼수록 눈에 익은

길이라는 확신에 조금 더 가보기로 했다. 명운은 낮에는

가는 길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은데다가, 친구들과 장난치며 가느라 그 시간이 더 짧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불안감을 덜어 내려 애썼다. 또 얼마쯤

걸었을까.. 길은 자꾸만 더 뚜렷하게 기억과 일치하는데, 정류장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명운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워크맨을 가방에 넣었다. 명운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긴장감 탓인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손바닥에 땀도 났다. 명운은 조금씩 커져가는 불안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길을 물으려 해도 뒤로는 아무도

없었고, 앞은 너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명운이 잠시 앞으로 갈까, 뒤로 돌아갈까를 망설이는데.. 왼쪽 전봇대 옆으로 또 다른 골목길이 보였다. 명운은

무언가에 끌리듯 골목길 입구에 들어섰다가 잠시

망설였다. 왠지, 이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명운은

다시 방향을 바꿔서 골목길에서 나오다가, 갑자기 컥 하고 숨이 막히는 고통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명운은

갑작스런 고통에 복부를 움켜쥐고 무의식중에 우측으로 향했다. 어느 곳으로 가야할까를 판단하기 이전에,

쓰러지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는 본능이 앞섰다. 명운은 뒤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이 미로(迷路) 같은 골목길에 영원히 갇힐 것만 같아서 복부를 움켜쥐고 다급하게

앞으로 향했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명운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앞만 보고 가던 명운의 눈에 희미하게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명운을

엄습하던 불안감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 명운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명운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전율에 .걸음을 멈췄다. 명운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것은 명운이꿈에서 본 담장이었다. 지금껏 눈에 익은 길이라 생각하고 걸어온 길이 실은 꿈에서 본 길이었다는 걸.. 명운은 이제는 희미하지 않은, 너무도 뚜렷하게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담장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때였다. 명운은

무언가 자신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날카로운 고통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명운이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땅바닥을 짚고 있는데 손등에

무언가가 스멀거렸다. 명운의 눈앞이 흐려질수록 손등의 스멀거림은 더욱 또렷해졌다. 꿈에서 보았던 문신이

자신의 손등 위에 나타나는 걸 본 명운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14. 미로(迷路)-2

문신을 하고 나온 명운은 만족스러운 듯 손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의 곱지 않을 시선이 걱정되긴

했지만(특히나 부모님과는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할

터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경험한 일을 얘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 기이한 경험을 얘기한다면, 그때는

문신과는 비교도 안 될 더 심각한 반응이 돌아올 게

뻔했다. 어쨌든 문신에 대해서 돌아올 반응에 대해선 이미 각오를 하고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걱정을

한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만날 遇(우)’.. 명운이 손등에 새긴 문신이었다.


명운은 문신 때문에 처음 와 본 이 골목길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꼭 한 번, 아니 몇 번 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은 선명한.. 그런

느낌이었다. 명운이 골목길에서 나와 큰 길로 돌아서려 할 때였다. 맞은편 골목에서 나오던 사람이 명운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꽤나 다급했던 길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왠지 불안해

보였다. 가던 길을 가려던 명운은 문득 방금 전에 지나쳤던남자의 옆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그냥 비슷한

사람이려니 지나치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자세히 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명운은 그 학생이 얼마 전 전철에서 본 고교 시절의 자신이라는 걸 직감했다. 앞모습을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명운은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소름이 돋았다. 명운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직면한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 급급해서 또 다시 과거의

자신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명운은 상황 정리는 뒤로

미루고 되도록 조용히 자신의 뒤를 밟았다.


‘혹시라도 과거의 내가 나를 돌아본다면?..’


잠시 잠깐 명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걱정도 이내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과거의 명운은 지금의 명운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얼굴이 많이 변하지 않아서, 많이 닮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설마 지금

보는 사람이 미래의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운은 굳이 어떤 계기를 만들어서 과거의 자신과 접촉할 생각은 없었다. 명운은 그것보다 대체 과거의 자신이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건지, 무엇을 하려는 건지 그게 더 궁금했다. 자신만 알고 상대방은 모르는 훔쳐보기의

희열이랄까?..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쫓던 명운은 과거의 자신이 갑자기 멈춰 서서 양 옆을 두리번거리는 것에

당황했다. 길을 잃었는지, 금방이라도 뒤를 돌아볼 것

같았다. 명운은 급한 마음에 전봇대 뒤로 숨어서 양팔을

위로 올리고 두 손을 모았다. 과거의 자신이 자신을 보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전봇대 뒤에 숨은 명운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과거의 자신이 내는 발자국 소리에 집중했다. 운동화를 신었는지 소리가 크게 들리진 않았지만, 잠시

서성거리다 다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방향이 자신을

향하는 건지, 다른 곳을 향하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마주치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또 놓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명운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전봇대에서 나와서 앞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명운은 당황하는 동시에 왜 자신이 또

그렇게 숨어 버렸는지 후회했다. 이대로 또 자신을 놓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명운은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명운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것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을 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담장이 명운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15. 살인자들

김종욱과 박명식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의 결과에 대해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담벼락 밑에 쓰러져 있는 30대 남자의 복부에는 손잡이가 긴 회칼이 꽂혀 있었고

바닥에는 피가 번지고 있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남자의 거센 저항에 당황해서 생긴 우발적인 사고였다. 남자를 찌른 것은 박명식이었지만 김종욱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김종욱이 먼저 입을 열며

박명식의 팔을 잡아끌었다.

- 빨리 튀자! 아무도 못 봤을 거야.
그러나 박명식은 김종욱이 끄는 대로 딸려가지 않고

버티며 말했다.

- 같이 한 거다. 너랑 나랑 둘이 같이 한 거야.

김종욱은 대답하지 않고 박명식과 마주치던 눈을 피하며 다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 말 해, 새꺄! 왜 말 안 해? 나 혼자 다 뒤집어쓰라고?

김종욱은 박명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새를 못 참고 또 뭔가를 말하려는

박명식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담장으로 밀쳤다.

갑작스런 김종욱의 행동에 놀란 박명식은 저항하지 않고 김종욱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종욱은 한 손으로는

박명식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론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그제서야 박명식은 담장 반대편에서

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김종욱의 손을 조용히 내렸다.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였다.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김종욱과 박명식이 기대고 있는

담장 반대편에서 갑자기 멈췄다.


명운은 담장 앞에 멈춰 서서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또

다른 골목길은 없었다.

‘분명 이 담장 앞에서 사라졌는데.. 내가 있던 뒤쪽으로 오지는 않았고, 양 옆은 막혀 있는데.. 그렇담 담을

넘어갔나? 그래, 그것밖에 없다!’

명운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담장은 꽤 높았다. 명운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도움닫기 하듯 담벼락을 한 발로딛고서야 겨우 담장 턱에 매달릴 수 있었다. 담장에 매달린명운은 양 팔꿈치를 담장 턱에 걸고 몸을 기울여서

오른발을 먼저 담장 턱에 올렸다. 그렇게 겨우 담장을

넘을 때, 명운은 배에 칼이 꽂힌 채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누군가와 담벼락에 붙어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다른 두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담장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명운의 충격은 컸지만, 아픔 따위나 다친 곳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명운은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건너편 살인자들이

자신을 쫓는 소리를 들었다. 명운은 일어나서 무작정

뛰었다. 명운이 뒤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뛰어가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과거의 자신이 살인자들이 쫓아오는 길을 향해 자기 옆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명운은 아까

자신이 몸을 숨겼던 전봇대 옆 골목길로 숨어들어 벽에

등을 기대고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도망을 가야하는지, 과거의 자신을 구해야 하는지. 길게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생각하며 머뭇거리다간 살인자들의 손에 잡힐 게 뻔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망친다고 끝날 일도 아니었다.살인자들 곁으로 간 사람은 과거의 자신이었다. 만약

과거의 자신이 잘못된다면 지금의 자신도 무사할 리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명운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무사하다면 과거의 나도 무사할 거야. 설사 무슨 일을 당했더라도, 지금의 내가 살아있는 걸 보면

과거의 내가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빨리 도망쳐야 해.’

명운이 과거의 자신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다시 도망치려 할 때였다. 명운의 어깨를 뒤에서 붙잡고 돌려 세운

김종욱의 칼이 명운의 배를 깊숙이 찔렀다.


#16. 이면(二面)

명운은 김종욱의 칼에 수차례 찔리며 골목길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는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만, 마지막으로 과거의 자신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명운의 흐려지는 시야에 담장 밑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명운은

안타까움에 과거의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명운의 손이교복을 입은 자신의 어깨에 시계(視界) 안에서 얹혀졌을 때였다. 어느새 교복을 입은 명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현재의 자신이 있었다. 담장 밑에 무릎을 꿇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다. 명운은 쓰러지면서 방금 전 자신이 손을

뻗었던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과거의 자신이 있었다. 두 명운은 눈을 감지 못한 채 서로를 마주보며 죽어갔다.


김종욱과 박명식은 먼저 죽은 남자가 있는 건너편에 담장밑으로 명운을 끌고 갔다. 그곳에서 김종욱은 다시

박명식이 붙잡고 있는 명운을 수차례 찔렀다. 명운의 몸이 무너지면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이어 김종욱은 주저

없이 박명식도 찔렀다. 놀라움과 의문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박명식을 향해 김종욱이 말했다.

- 나는 너한테 기대하는 거 없었어. 너도 나한테

그랬어야 해. 우리 둘 다 서로……. 네가 쓸데없는 헛소리만지껄이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아니, 나한테는 오히려 득이 됐지. 네가 믿을 놈이 못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날 너무 원망하진 마. 그냥 여기까지가

우리의 인연이었다고 생각해. 그럼..

#1-3. 전철 - 1993년 7월 11일 일요일 오후

종명씨는 출입문이 닫히려는 전철을 간신히 타고

노약자석 앞에 섰다. 처음 입고 나온 빨간색 폴로 티셔츠에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조금은 불편했다. 한 30분쯤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한 종명씨는 전철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려는데, 경찰에 쫓기던 소매치기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던 종명씨를 옆으로 밀치고 도망갔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플랫폼에서 떨어진 종명씨는 몸이 철로에

닿기도 전에 지나가는 급행열차에 휩쓸려 버렸다.


- 에필로그(Epilogue)

눈을 떴을 때, 명운의 몸은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얼굴 한 면이 바닥에 닿아 있었고, 시선이 향한

곳에는 차로가 있는 큰길이 보였다. 명운은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명운은 땅바닥에

닿아 있던 얼굴 을 어루만졌다. 쓰러지면서 바닥에

긁혔는지 살짝 피가 굳은 느낌의 자국이 만져졌다. 명운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손등부터 살폈지만 문신은 없었다.

명운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방을 열어보았다. 지갑과

워크맨 모두 그대로 있었고, 지갑 안에 있어야 할 얼마

안 되는 돈도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쓰러지기 전의 상황이 생각난 명운은 자신의 배와 가슴을 만져 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분명 쓰러지기 전에 가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통을 느꼈었는데..’

명운은 자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게 아니라, 잠시

잠들었든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정말로 단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처럼 몸도 가벼웠다. 명운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생각을 정리하려다가, 길을 잃었을

때의 불안감이 되살아나서 우선 큰길로 나가기로 했다.

어찌된 일인지 명운의 앞에는, 명운이 쓰러질 때 앞을

가로막고 있던 담장 대신 차가 다니는 큰길이 놓여 있었다.명운은 큰길로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왠지

뒤를 돌아보면 또 그 담장이 있을 것 같았고, 그 미로 같던 골목길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명운은 차로가 닿아 있는 큰길로 나온 후에야 안심하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에 명운은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쓰러질 때 충격을 받았는지, 시곗바늘의 초침이 멈춰 있었다. 명운이 시계를 손바닥으로 몇 번

두드리자 멈춰 있던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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