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붐비는 전철 안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손등에 새겨진 문신.. 문신의 위치도 위치려니와 그림도 아닌 글자, 그것도 한자가 새겨진.. 이 남자의
옷차림은 수시로 바뀌었고, 얼굴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갔지만.. 손등에 새겨진 문신만큼은 빛바랜 세월
속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전철에 앉은 명운은 기분이 몹시 우울했다.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를 꾹 참았다가 시험이 끝난 오늘 보러 가는
건데, 시험을 망친 탓인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차라리 영화를 먼저 보고 공부를 할 걸 그랬나?..’
기다렸던 영화에 대한 흥분과 기대로 공부가 잘 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한번 들뜬 마음은 좀처럼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에이, 이제 와서 뭐.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시험은
다음에 잘 보면 되고, 오늘은 영화나 재밌게 보자.’
애써 마음을 돌리며 시험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 해도,
시험을 잘 보고 영화를 보러 갔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명운이 눈을 떴을 때, 내려야 할 역을 이미 지나친
상태였다. 그것도 한참..
‘에이, 씨발! 영화 시간 맞춰서 나온 건데.. 지금 다시
반대편에서 전철을 타?..’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명운은
‘젠장! 그래도 늦잖아. 그럼, 다음 걸 봐?..’
시험 결과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그동안 공부 때문에
소진한 체력 탓인지.. 잠깐 눈이나 감고 있자고 했던 것이 이렇게 오랫동안 자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전철은 이미 내렸어야 할 부평을 훨씬 지나 막 영등포를
지난 참이었다. 가뜩이나 우울한 기분에 계획된 일정까지 차질을 빚은 상황에서, 명운은 늦게라도 다음 시간 영화를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에이 씨발, 오늘은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명운은 차라리 종각에 있는 OO문고에 가기로 했다.
‘가서 머리나 식히면서 읽을 만한 책이나 찾아보자.’
다시 목적지를 정한 명운은 가방에서 워크맨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어폰에선 너바나(Nirvana)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가 흘러나왔다.
초반부의 반복되는 리듬에 마음이 끌린 명운은 요새 계속 이 곡만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리플레이
버튼을 누르려 잠깐 고개를 든 명운은 앞쪽, 정확히는
오른쪽 대각선 출입문 옆 기둥에 기대고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명운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문득 남자가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음악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터라 명운은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명운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뭐지?..’
명운은 대각선으로 보이는 남자의 옆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열차가 정차하자 남자는 도망치듯 내렸는데, 그때까지
명운은 자신이 떠올리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진짜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그때, 맞은편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내리는 바람에
우연히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명운은 비로소 그
남자와 닮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명운의 온몸에소름이 돋았다.
전철에서 내린 명운은 아직도 온몸을 훑고 지나간 전율을채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분명 나였어. 고등학교 때의 나..
출신 학교의 교복과 내가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워크맨,. 그리고 얼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말로만 듣던 도플갱어인가?
나(고등학생인)도 나를 본 것 같은데?..
알아챘을까?
근데, 난 왜 내린 거지?..’
명운은 내려야 할 역이 아닌데도, 쫓기듯 전철에서 내린 이유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목적지인 OO문고가 있는
종각역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아있었지만, 그저
‘우선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28살의 내가 고등학교 때의 나를 본다..
좀 더 상황을 살펴보는 건데, 너무 일찍 내렸나?
아냐.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오늘 이후 똑같은 경험을 다시 한다면 모를까,
아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명운은 방금 전에 있었던 기이한 경험에 대해 골몰하다가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7살 때였던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던 명운은 골목길을 뛰어가는 친구들을
쫓다가, 갑자기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땐, 골목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었다거나 잠시 정신을
잃었었다고 하기엔, 너무도 생생해서 두려웠던, 그리고 꽤
길었다고 느꼈던 시간..
명운이는 친구들과 창식이를 놀리고 있었다. 창식이는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는(친구들 중 창식이의 나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몸집은 이미
어른인데 정신 연령은 네댓 살도 안 되는 지적 장애였다. 삐뚤어진 입에, 앞니까지 뾰족하게 생겨서 꼭 사나운
물고기를 연상케 하는 구강 구조,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눈.. 늘 콧물을 달고 다녔고, 말을 하든 안 하든 침을
흘렸다.
그날도, 아이들은 창식이와 놀아줄 것처럼 꾸미고는
창식이를 담장 구석으로 몰아넣고 고추를 보이라고
꼬드겼다. 매번 속으면서도 아이들이 놀아준다는 얘기에 솔깃한 창식이는 구석진 곳에 주저앉아 거리낌 없이
고추를 꺼냈다. 창식이의 거대한 고추.. 아이들은 고추를 보자마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돌멩이를
던져 댔고, 창식이는 돌멩이를 막으며 울부짖었다. 그리고시작된 숨바꼭질.. 창식이가 분노로 가득찬 험상궂은
얼굴로 일어서자 아이들은 일제히 뛰기 시작했다. 물론
명운이도 그들 틈에 끼어 있었다. 엄마는 창식이랑 놀지도
말고 괴롭히지도 말라고 했지만, 명운이는 창식이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도 아이들 틈에 섞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혼자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창식이를 피해 도망가는 아이들을 뒤따르던 명운이가 갑자기 멈춰선 건, 처음 보는 아이가 비좁은
골목길을 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에 있는 아이는
놀란 눈으로 명운이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본
명운이는 얼어붙은 채로 발을 떼지 못했다. 앞에 서 있는 아이가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명운이는
눈을 비비며 생각했다.
‘이건 꿈일 거야, 꿈!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아무도 없는 골목길이 나타날 거야..’
명운이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전철에 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명운이는 자신이 꿈속에 있음을 자각했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려 해도 의식과는 별개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눈뿐이었다.
‘이것도 꿈이야. 꿈에서 깨어나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조금 답답하더라도 기다리면 돼..’
하지만 언제 꿈에서 깨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이 명운을
불안하게 했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얼마만큼
흘렀을까?..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열차 문이 열리면서 환한 빛이 들어왔고, 명운은 골목길에 멈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명운이는 자신이 낮에 겪었던 일을 엄마에게 얘기했지만 엄마는 그저 웃으며 꿈을 꾼 거라고 말할
뿐이었다. 명운이는 낮의 그 경험이 꿈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꿈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데다.. 엄마의 얘기를 듣고 보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해서, 자신이 아주 실감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던 것이라고생각하고 말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명운이는 엄마에게 물었다.
- 엄마, 나 전철 탄 적 있어?
- 아니, 아직.. 왜, 전철 타고 싶어?
오늘의 기이한 경험으로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린 명운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오늘 겪었던 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이 2003년 7월 13일 일요일.. 내가 고등학교 때면
1992년부터 1994년..
아무래도 고1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고2나 고3으로
보면.. 1993년이나 1994년, 10년 혹은 9년 차이..
오늘은 일요일이었지만 고등학생인 내가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그때는 일요일이 아니었을 테고..
아니지, 7월 13일 자체가 아니었을 수도 있어. 젠장!
그럼 뭐지?..
아냐, 우선 요일부터 맞는지 찾아나 보자.’
명운은 휴대 전화의 일정 관리 프로그램으로 1993년과
1994년의 7월 13일이 무슨 요일인지 찾아보았다.
‘뭐야? 화요일하고 수요일이잖아! 그럼, 요일에는
공통점이 없고..
공통점이라는 건 지하철을 탔다는 것뿐이고..
지하철이라.. 지하철의 목적지?..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은 종각의 OO문고.. 그렇지만
중간에 내려서 목적지에 가지 않았을 뿐더러,
고등학생인 내가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알 수조차 없다.’
- 후우~
한숨을 크게 내쉰 명운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오늘
겪었던 일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쩌면 누구나 한 번 혹은 그 이상 경험하는
일인데, 경험자 스스로가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기억을 잊어버리게 되는 건지도
몰라. 어린 시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난 왜 두 번씩이나..
어쨌건, 난 그 두 번의 경험에서 다 나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고,
오늘은 그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내가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면,
오늘은 달랐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만약 나를 만나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온다면?..
어린 시절에 만났던 나는 그때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컸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얼굴은 거의 같았어. 하지만 오늘은 시간(나이)차가 좀 있었는데?.. 그래, 다음엔 내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나이가 들어 있을지도 몰라. 그래 맞아! 이제 생각이 나.
고등학교 때 나는 오늘의 나를 본 적이 있었어. 그때는
내가 나를 보았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라, 내가 컸을 때의
모습이 저렇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지.
그래서 기억하지 못했던 거야! 내가 미래의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그럼.. 언젠가 내가 또다시 나와 마주칠 때를 대비해서
뭔가 준비해야 해.
그런데 무얼?..
나 스스로가 나라는 걸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 확실한
증표나 표식!
그런데, 그 표식으로 내가 나를 다시 만난다면.. 그땐 뭘 어쩌지?..
그리고 내가 얻는 게 뭐지?..’
OO문고에 가려던 생각을 접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명운은 컴퓨터부터 켰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일과
관련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자료를 검색했다. 도플갱어, 유체이탈, 타임 슬립(Time Slip : 다른 시간대의
공간으로의 이동 또는 그 이동을 자각하는 인식),
데자뷰(旣視感),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 : 특정
사물에 손이나 이마를 대는 것만으로 사물에 관련된 과거 이력을 시각적 영상으로 구현하는 능력. 이전에 존재했던 인간의 기억이 냄새처럼 주위의 사물에 남는다는
초심리학적 가설에 의거) 등 여러 가지 관련 단어 중
명운의 경험과 가장 합치되는 현상은 타임 슬립이었다
(자신이 또 다른 자신을 만났다는 점에서는 도플갱어에
가까웠지만, 도플갱어에 대한 최근의 연구 추세는
도플갱어를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기보다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갖는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많은 타임 슬립 경험담 중, 명운처럼 ‘자신’을
만난 사례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특이점이
명운으로 하여금 자신과의 만남에 어떤 필연적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명운은
타임 슬립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는 인터넷서점을 뒤져서 타임 슬립과 관련된 서적에 대한 정보를
모두 출력했다.
다음날부터 관련 서적을 구입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명운은 책을 손에 넣는 순서대로 하나씩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잔뜩 부풀어 있었던 기대와 달리 큰
소득은 없었다. 그저 각각의 구체적인 경험에 대한 사례를 볼 수 있었다는 것 외에, 주요 골자는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단지 타임 슬립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기보다는 인간의 인지 능력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이견이 몇 가지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가설이나 견해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관련 서적을 모두 탐독한 명운이 내린 결론은 자신의
경험이 무엇에 해당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경험으로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같은 경험을 최소한
한 번이라도 더 한다는 것을 전제로. 그렇지만 명운은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왜, 어떻게 바꾸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막연하기만 했다. 어쩌면 삶을 바꾸고 싶은 게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 확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또한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만이라도 더 주어진다면.. 절대로 그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한 달 후,
문신을 하고 나온 명운의 손등엔,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를 자신에 대한 표식으로 ‘만날 遇(우)’자가
새겨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은 몹시 더웠다. 장마가
끝나고 시작된 무더위.. 명운은 이 더위 속에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명운이 가려는 곳은 어린 시절 살았던 달동네였다. 동네 입구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다섯 정거장 되는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인가?..
아니면 결혼을 앞두고, 지나온 내 삶을 돌이켜 보고 싶은
걸까?’
대사를 앞두고 치르는 의식 같은 느낌으로 이곳으로 .찾아든 이유를 명운 스스로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다만지금까지 줄곧 잊은 적이 없었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의
의미가 자신을 이곳으로 이끄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타임 슬립을 경험한다거나, 지금의 내가 아닌 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같은 건 없지만..’
고갯길을 올라 평지에 들어선 명운은
‘이제 딱 반 왔구나.’
온몸에 끈적이는 땀에 힘겨워하며
‘이럴 줄 알았으면 손수건이라도 하나 챙겨오는 건데..’
또 다시 한참을 걸어서 자신이 살던 동네 입구에 도착한 명운은 비탈길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잠시 숨을
골랐다.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 지어진 건물과 상점,
고층의 아파트들.. 주변 개발로 일대가 많이 변한
상황에서 명운은 자신이 살았던 동네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게 더없이 반가웠지만, 개발에 소외돼서 고립무원의
섬처럼 남은 달동네가 아직도 걷어 내지 못한 가난의
그림자는.. 명운의 가슴속에 20년 넘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던 추억의 장소에마저 그늘을 드리웠다.
명운은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보며, 그 문신이
어쩐지 고립무원의 섬처럼 남아 있는 이 달동네와
닮았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동네 초입의 구멍가게가 바꾼
간판을 제외하고는 다 예전의 그대로였다. 경사진
오르막길, 좁고 굽이진 골목길, 난간 없는 계단, 집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낮고 작은 창문.. 더러 페인트칠을
다시 한 집들과 예전의 갓전등을 대체한 신형 방범등만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명운은 자신이 살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글세와 전세를 전전하다 처음 갖게 된 우리 집..
이 집에 이사 오던 날, 가족 모두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하나뿐인 동생 진운을
교통사고로 잃은 것도 이 집이었다.
‘도망치듯 이사를 가고..’
명운은 맞벌이하던 엄마 아빠를 기다리며 늦은 밤까지
동생과 함께 앉아 있었던 대문 문턱을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여기서 엄마 아빠를 기다렸었는데.. 배고픔을 참으며
동생을 끌어안고.. 그랬었는데.. 그 기다림이 너무
싫어서..호강의 뜻이 뭔지도 모르면서, 나중에 크면 돈. 많이 벌어서엄마 아빠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그리고
동생한테 먹을 거 많이 사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랬었는데..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내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채, 그저 하루를 살기 시작했던 건.. 이 집을
떠나면서부터였을 거야.’
명운은 자신과 동생이 엄마 아빠를 기다리던 문턱에 앉아 눈을 감았다.
- 헝아, 엄마 왜 이렇게 안 와?
- 글쎄.. 또 야근 하나?
- 헝아, 배고프다.
- 아까 밥 먹었잖아?
- 그래도.. 헝아는 배 안 고파?
- 나도 고파..
- 헝아, 과자 먹고 싶다.
- …….
- 헝아, 왜 우리는 과자랑 빵이랑 맨날 못 먹어?
- 형아가 크면 돈 많이 벌어서,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 줄게.
- 정말?
- 응..
- 헝아,
- 응?
- 춥다..
명운은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폭풍처럼 들이 닥친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던 7살의
명운이는 커다란 어깨를 들썩이며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감정을 추스른 명운은 자신이 살던 집을 뒤로하고 골목길계단을 내려갔다. 계단과 계단이 이어지는 곳에 멈춰 서
뒤를 돌아본 명운은 신음 같은 한숨을 토해 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명운은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앞으로 난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까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어린 시절 자신이 처음 타임 슬립을 경험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명운은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한 번 보고 자리에 선 채로 눈을 감았다.
집 앞에서 감정을 모두 쏟아냈던 탓인지,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다. 눈을 뜬 명운은 그대로 그곳을
지나치려다, 미련 때문인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돈 뒤, 잠시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굽이진 골목길을 돌아 마지막 계단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명운은 오른쪽으로 보이는 구석진 곳으로 눈을
돌렸다. 담벼락이 잇닿아 만들어진 움푹 들어간 구석진
장소.. 어린 시절 창식이의 아지트였고, 아이들이
창식이를 몰아넣고 고추를 보여 달라고 꼬드기기도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 명운아, 창식이 놀리지 마.
아이들과 창식이를 놀리며 놀고 있다가, 모처럼 일찍
퇴근한 엄마와 만나서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한테 이런
말을 들은 명운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 엄마가 창식이랑 놀지 말라며?..
- 그래, 같이 놀지도 말고 놀리지도 마. 놀리고 괴롭히는. 건 나쁜 짓이야.
그때까지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명운이는 엄마의 말에
어딘가 모순이 있다고 느꼈다.
‘놀지도 말고 놀리지도 말고?..’
- 왜 같이 놀면 안 되는데?..
- …….
- 창식이가 더럽고 지저분해서?..
- …….
- 왜 놀면 안 되는데?.. 바보라서? 창식이 엄마가
할머니라서?..
- 놀지 말라면 놀지 마! 다 너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명운이는 엄마의 말뜻이 몹시 궁금했지만, 엄마의 말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느꼈기에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다음날, 명운이는 혼자서 창식이의 아지트로 갔다.
창식이는 그 구석진 아지트를 몹시 좋아했다. 하루 중 집에
있는 시간보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명운이는 창식이의 아지트 앞까지 다 와서는 담벼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항상 여럿이 몰려다니다가 혼자
오니까, 꼭 사자 우리에 혼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창식이는 어른 몸집에 힘이 셌기 때문에 혼자서 창식이
앞에 나서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전까지 명운이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창식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창식이는 그저
놀림감으로서의 말도 제대로 못하는 덩치 큰 바보일
뿐이었고, 항상 더러운 옷차림과 몰골, 괴물 같은 험악한 인상은 다가갈 마음이 생기게 하지 않았을 뿐더러 또
다가갈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어제 엄마의 말을 듣고
명운이는 창식이가 진심으로 가엾게 느껴졌다. 사실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창식이를 괴롭히면서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었다. 처음 창식이의 혐오스런 얼굴에
돌멩이를 던질 때만 해도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어딘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없어져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창식이가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 또 창식이 엄마가 돌멩이를 던지는
아이들을 쫓으며 창식이를 감싸안는 걸 보고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건 본능적인 연민에서 나온 측은지심 같은
거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옳지 못한 집단행동을 부정하지 못하고 계속 그 속에서 함께 돌을 던지면서, 명운이는
죄책감을 몰아내는 집단행동 속에서 가학적 희열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고통스러워하는
창식이의 얼굴을 보고 죄책감과 동정심을 느끼다가도,
험악한 얼굴로 변하는 창식이의 사나운 울부짖음 앞에선 다시 돌멩이를 던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
엄마의 얘기를 듣고.. 명운이는 처음으로 엄마의 말이나 친구들과의 집단행동이 아닌, 자신의 생각만으로
창식이와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창식이의 아지트 앞에 도착한 명운이는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명운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창식이의 아지트로
담벼락이 꺾여 들어가는 모서리 끝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창식이는 과자를 먹고 있었다.
‘맛있겠다..’
잠깐 딴생각을 하다 창식이와 눈이 마주친 명운이는
순식간에 적의를 띄며 달라진 눈을 빛내는 창식이에게
놀라 얼굴을 숨겼다.
‘그냥 갈까?.. 아닌데..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명운이는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고민하다가, 다시 용기를
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창식이의 시야에 전신을
드러냈다.
‘……’
창식이는 여전히 적의를 드러내는 눈으로 명운이를
바라보다가.. 명운이가 손에 돌멩이가 없다는 표시로
양손을 펴 보이고 무방비 상태로 있는 모습에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명운이는 창식이의 눈이 다시 풀리는 걸
보고는 한 발짝 다가갔다.
- 너랑 놀려고 왔어.
- …….
명운이가 창식이 곁으로 다가가도 창식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계속 과자를 먹었다. 명운이는 창식이가 과자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창식이 가까이에 앉았다.
창식이가 과자를 먹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명운이가
자신의 발끝에 눈을 두고 침을 삼키는데, 무언가 흐릿한
것이 명운이의 눈앞에 나타났다. 고개를 뒤로 물러 다시
보니, 눈앞에 있는 건 과자였다.
‘ ! ’
그리고 팔을 뻗어서 과자를 내밀고 있는 창식이의 눈..
명운이는 창식이의 그런 태도가 너무 반가웠고 과자 또한 몹시 먹고 싶었지만, 과자를 들고 있는 창식이 손톱 밑의 시커먼 때를 보고는 선뜻 과자를 받아서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늘상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는 손등엔 아직 마르지 않은 콧물이 묻어 있었다. 명운이는 잠시 망설이다 마음의 눈을 딱 감고 과자를 받아서 입에 넣었다.
그 뒤로 명운이는 매일 창식이와 같이 놀았다. 창식이의 지능이 떨어지는 관계로 무슨 놀이든지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고, 명운이가 거의 창식이 몫까지 하는
판이었지만.. 그래도 명운이는 창식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을 느꼈다. 그리고 막상 친구가 돼서 알게 된
창식이는 그렇게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명운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들어주었고, 또 힘이 세서 이래저래 편리한 게많았다.
하지만 둘의 우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누구보다
명운이 엄마가 싫어했고, 창식이 엄마마저 명운이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
창식이와 친구가 된 명운이는 친구들의 돌팔매로부터
창식이를 보호하기 위해 창식이 편을 들었다가 대신
돌팔매를 맞기도 했고, 친구들로부터 조금씩 따돌림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된 놀림..
- 창식이는 바보래요~ 명운이도 바보래요~
창식이는 병신이래요~ 명운이도 병신이래요~
창식이와 명운이는 친구래요~ 병신 친구..
그 놀림을 주동한 녀석과 싸워서 이긴 명운이는 그날
저녁 잊을 수 없는 두려움을 경험했다.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돌을 던졌는데, 주머니에까지 돌멩이를 채워 왔는지 돌팔매는
한두 번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저 놀림으로 던지는
가벼운 팔매질이 아닌, 배신자를 처단하는 증오가 담긴
사나운 팔매질에 명운이의 몸은 많은 곳이 찢기고
멍들었다. 아이들은 계획적으로 창식이가 없는 틈을 타서 혼자 있는 명운이를 노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명운이는 약을 발라주는 엄마에게 서러운 마음을
토해냈지만, 엄마에게서 돌아온 싸늘한 대답..
- 너 이제 창식이랑 놀지 마.
엄마는 마지막까지 창식이를 편 든 명운이를
알아주기보다는, 명운이가 창식이랑 놀았다는 이유만으로아이들 편을 들었다.
다음날부터 명운이는 창식이랑 놀지 않았다. 일부러 피해다녔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창식이가 명운이의 이름을
웅얼거리며 며칠 동안 자신의 집 앞을 서성이는 모습을
외면하기도 했다. 그리고 창식이와 다시 마주쳤을 때..
명운이는 일부러 아이들 앞에 나서서 제일 먼저 돌을
던졌다.
그 후로 창식이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더러워졌고, 다시 사나워졌다. 하지만 명운이는 알고 있었다. 창식이가 결코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마 창식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명운이가 던지는 돌은 맞아도 아프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운은 창식이의 아지트였던 구석진 담벼락을 바라보며 지난날의 씁쓸했던 기억을 더듬었다.
‘창식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유일한 가족이던 노모마저 돌아가셨을 텐데, 보호자도
없이..
말도 제대로 못하고,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직업도
못 구했을 텐데..
보호시설로 보내졌을까?..’
명운은 경사가 급한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며 창식이의
현재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명운이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 동네를 벗어나서 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가고 있던 순간,
창식이는 연탄 배달 리어카를 길옆에 세워 두고 네댓 살 된남자 아이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비록 얼굴에
군데군데 연탄재가 묻어 있었지만 머리는 단정하게
가르마가 타져 있었고 옷차림도 말쑥한 편이었다. 늘
흐리멍덩하게 초점이 없던 눈은 분명하게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었고, 입가에는 늘상 흐르던 침 대신 온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창식이가 어눌한 말투로 아이에게 물었다.
- 맛있어?
- 응. 아빠도 맛있어?
- 응, 아빠도 맛있어..
명운이는 9살이 돼서 처음 타는 전철에 긴장했던지,
자리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가족끼리 오붓하게 갈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을 생각했었지만, 기차는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앉을 자리도 없었고, 어른들 틈에 끼어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의 뒷모습뿐이었다.
이전에 명운이가 갖고 있었던 전철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고.. 겨우 자리가 나서
앉았을 때, 명운이는 극도의 피곤함으로 이내 잠이
들었다.
꿈속에 들어온 명운이는 눈앞에 서 있는 아이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골목길 앞에 서 있는 아이는 자신이었다. 아이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눈을 비볐다.
명운이는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걸 자각하고는 빨리
꿈에서 깨어나길 바랐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지금 있는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영원히 꿈에서 깨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에.. 명운이는 눈을 비비고 있는
자신을 뒤로 하고 반대편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뛴 명운이는 둘로 나뉘는
골목길에서 잠시 주춤했다.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명운이는 거친 숨을 고르며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했다. 그때 담장에서 뛰어내린 듯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오른쪽 골목길로 사라졌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명운이는 지체 없이 왼쪽 골목길로 뛰었다.
명운이가 한참을 뛰다가 뭔가 따라오는 듯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더니, 방금 전의 그 고양이가 맹렬하게 자신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전력 질주로 굽이진 골목길을 돌았을 때, 길은 막혀 있었다. 고양이는 먹잇감을 노리듯 천천히 다가왔고, 다가올수록 덩치가 커졌다. 명운이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주저앉았고, 명운이의 얼굴 바로 앞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고양이는 마치 명운이의
머리라도 삼키려는 듯 사나운 쇳소리를 내며 입을 크게
벌렸다. 명운이는 얼굴을 무릎에 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 ?..’
명운이가 눈을 떴을 때 고양이는 담장 위에 올라 있었고, 마치 따라서 담을 넘으라는 듯 뒷모습을 보이며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보이지 않는 담장 건너편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고양이의 의도를 알아차린
명운이는 담장을 넘으려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담은 자신의 키보다 훨씬 높았고 도움닫기로 뛰기엔
골목길 폭이 너무 좁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담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명운은 넘으려는 담 맞은편 담장에 등을
밀착시키고.. 도움닫기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거리를 최대한 활용해서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앞에 있는
담벼락에 발자국을 찍었다. 첫 번째는 실패.. 실패할
때마다 체력이 떨어져서 담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는 사실을 명운이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꼭 넘어야 돼! 이번에 넘지 못하면..’
명운이는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머릿속에 잡념이
생기기 전에 몸을 튕겼다. 겨우 담장 끝에 손이 닿은
명운이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손끝이 담장 꼭대기에 갈리는 느낌이었지만, 여기서 손을 놓으면 영원히 담을 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명운이는 있는 힘을 다해 손끝에 힘을 모아 자신의 몸을
끌어올렸다. 왼쪽 팔꿈치를 가까스로 담장 위에 걸친
명운이는 몸을 흔들어 트는 것과 동시에 오른쪽 다리를
담장 위에 올렸다.
- 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명운이는 반대편 바닥을 보고절망했다. 방금 넘어온 곳의 세 배쯤 되는 높이로 내리막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마침 계단에 있던 고양이가 빨리
뛰어내리라는 듯
- 야옹~
뛰어야 할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계단의 높이를 재던
명운이는 어느새 계단에 드리워진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고 침을 삼켰다.
‘일단 뛰어야 해!’
차마 뒤돌아서 그림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명운이는 그대로 눈을 감고 뛰어내렸다.
- 명운아! 명운아, 일어나! 내려야 돼.
둘째 고모가 살고 있는 개봉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명운이는 허둥지둥 서두르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어른들다리 숲 사이를 뚫고 열차에서 내렸다. 비몽사몽간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오다가 본, 누군가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의 잔상.. 명운이는 열차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입문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느라 아직 닫히지
않았고,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미소. 명운이는
문신의 잔상을 떠올리며 할아버지의 손등을 확인하려
했지만, 붐비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이
출입문은 닫히고 말았다.
- 뭐해! 앞에 똑바로 안 보고!
엄마의 손에 등짝을 맞는 순간, 명운이는 누군가의
손등에 새겨져 있던 기억의 잔상을 영원히 잊어버렸다.
‘누가 날 보고 웃고 있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붐비는 전철 안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손등에 새겨진 문신.. 문신의 위치도 위치려니와 그림도 아닌 글자, 그것도 한자가 새겨진.. 이 남자의
옷차림은 수시로 바뀌었고, 얼굴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갔지만.. 손등에 새겨진 문신만큼은 빛바랜 세월
속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당신이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그곳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