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WK 사이버펑크 세계관 오프닝북 텍스트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한 케이티는 새우거리에 불어온 미묘한 변화의 기운을 느꼈다. 좁다란 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 사이로 낯선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 곳이지만 그래도 뭔가 달랐다.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 러너들의 개성은 가상 세계에서도 가려지지 않는 법이었다. 거기에 제복을 갖춰 입은 사내들까지. 섬뜩한 예감이 케이티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직감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꿰뚫어 본 케이티는 몸서리쳤다. 대사관에서 일하는 병력 같은 수호사들, 그리고 불법적인 일을 도맡는 도시의 용병, 러너들. 그들은 케이티에게 너무나 위협적인 존재들이었다.
길가에 멈춰 선 수상한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옷깃에는 반짝이는 은색 뱃지가 달려 있었다. 수호사들이었다. 도시의 치안을 책임지는 공권력의 상징이었지만, 때로는 러너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수호사들의 제복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감춰진 내부의 무게감이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러너들 역시 개성 넘치는 패션으로 주변과 동떨어진 인상을 풍겼다. 수호사들이 골목 안쪽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 건물 옥상에서는 기묘한 인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낡은 트렌치코트, 첨단 장비로 무장한 그들은 러너들이었다. 정보를 전달하고, 의뢰를 수행하는 도시의 그림자였다. 화려한 문신,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비밀스레 숨겨둔 무기들. 그들은 괴상한 패션이 우글대는 새우거리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풍경이었다.
케이티는 그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인지도 몰랐다. 수호사들은 러너들을 통제하려 했고, 러너들은 수호사들의 감시를 피해 활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 거대한 도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같은 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케이티는 그들 모두에게서 'Z'라는 투명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케이티조차도 의식적으로 주목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든, 교묘히 감춰진 암호 같았다.
금세 알 리 없는 일이었지만, 본능은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래도 티 낼 순 없었다. 평소처럼 가벼운 발걸음과 밝은 미소를 짓는 데 집중했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오히려 관심을 살 게 뻔했다.
"트랜스 재생, 스페셜 서비스 준비합니다!"
가게 문을 열고 활기찬 목소리로 일과를 시작했다. 익숙한 리듬에 몰두하자 불안은 조금 수그러드는 듯했다. 하지만 문 너머로 보이는 거리의 풍경은 어쩐지 낯설기만 했다. 수호사, 러너, 정체불명의 무리들. Z라는 표식을 달고 배회하는 불길한 그림자 같은 존재들로 새우거리는 가득 차 있었다.
음산한 기운에 몸서리친 케이티는 문득 위험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알던 평화롭던 일상은 멀어져 가고, 알 수 없는 음모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는 것만 같았다. 새우거리를 뒤덮은 불길한 안개는 마치 멸망 이후의 세계를 연상시켰다.
'어떻게든 버텨내야 해. 내일은 나아질 거야...'
케이티의 마음은 무거웠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불안을 떨치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손님을 맞이했다.
인공계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케이티는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칙칙하고 황량한 서민구의 풍경이 펼쳐졌다. 빼곡히 들어선 판자촌과 무질서하게 얽힌 전선들, 희미하게 깜빡이는 네온사인까지. 그것이 케이티가 살아가는 세계의 단면이었다.
배가 고픈 걸 느끼며 부엌으로 향했지만, 텅 빈 냉장고가 그녀를 맞이할 뿐이었다. 배달 상자 음식은 이제 질릴 대로 질렸다.
'신선한 공기라도 좀 마시고 싶다...'
문득 근처에 새로 생겼다는 푸드 트럭이 떠올랐다.
'잠깐이니까, 괜찮겠지.'
용기를 내어 아파트를 나선 케이티는 구수한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푸드 트럭이 있다는 곳에 도착하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나마 익숙한 서민구 사람들 틈에 섞여 있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인파 속에서 수상쩍은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검은 정장 차림의 그들은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모르는척 줄을 기다리는 케이티에게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 여자 맞지?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재생사라고 하더군."
“그걸로 찾을 수 있겠어? 어차피 인공계 모습이잖아.”
“까라면 까야지.”
케이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저들이 찾는 건 다름 아닌 새우거리 아바타의 모습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본능적으로 뒤돌아서서 전력질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듯했지만,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좁은 골목으로 몸을 숨긴 케이티는 모로 벽에 기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이런 궁지에서 벗어날 도피처를 생각해 보았다.
문득 떠오른 것은 마즈의 얼굴이었다. 우연히 들른 레드 몽키즈 클럽에서 만난, 그 우호적이고 다정한 청년. 그 역시 러너였다. 러너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케이티에겐 그런 단순한 기억조차 의지가 되었다. 그곳이라면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레드 몽키즈 클럽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노마드 지역 한복판에 있는 그곳을 향해 무작정 뛰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마즈에게 먼저 연락해 봐야겠어. 하지만 어떻게...?'
진퇴양난에 빠진 케이티는 속수무책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클랙슨 소리, 어두운 골목을 배회하는 악취미 가득한 그래피티까지. 익숙한 풍경이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새우거리의 평화로운 일상은 이미 깨져버렸다.
워낙 이벤트가 없던 탓에 개인 로그에서 생각보다 쉽게 마즈의 연락코드를 찾을 수 있었다. 겨우 마즈에게 연락이 닿았을 때, 케이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기억이나 할지 걱정이었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그리고 여전히 다정했다. 다행히 마즈는 그녀의 사정을 이해해주었고, 레드 몽키즈 클럽으로 오는 택시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클럽 입구에 도착하자 건장한 바운서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케이티는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마즈는 케이티를 에스코트하며 태연하게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토바이 헬멧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클럽 내부는 어둡고 음침했지만, 케이티에겐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한 은신처로 느껴졌다.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웅장한 전자음악이 그녀를 압도했다. 이곳은 분명 일반인의 출입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지난 번 이후 처음인가? 나도 그때 여행을 떠나서 오늘 다시 온 것인데,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어제보고 오늘 또 보는 셈이야. 정말 놀랍지 않아?" 마즈는 반갑게 웃으며 케이티를 안쪽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 클럽은 정말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DDI라고 들어봤어? 운명, 우연, 필연 같은 거 말이야. 내가 오늘 너한테 귀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거든. 그러니까 넌 운명적인 손님인 셈이지." 곧 둘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마즈가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친절했다.
"고마워 마즈.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내가 곤란에 처해서 그러는데..." 안전한 공간에서 술을 마시자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케이티는 마즈에게 그동안 겪은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노신사와의 만남, (주)신성의 수상쩍은 영상, Z 표식을 단 이들의 추적까지. 새우거리의 재생사로 일하며 보고 겪은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Z라... 그런 걸 본 적은 없는데. 신기하네. 근데 넌 그 표식을 볼 수 있다고?" 마즈는 믿기 힘들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케이티의 특별한 능력에 감탄한 것 같았다.
"응,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 그냥 보이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겐 안 보이는 그 표식들이."
"흠... Z라는 건 첨 듣는다만, 암호화된 러너들의 배틀마킹인거같은데. 작전이 좀 큰 모양이네. 보통은 좀 더 눈에 띄게 하는데, 투명 잉크라니."
마즈의 추측에 케이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말이야, 러너가 정확히 뭐 하는 사람들이야? 인공계와 차원계를 넘나들면서 뭘 한다는 건지..."
"러너는 일종의 해결사라고 보면 돼. 의뢰를 받아서 정보를 빼내기도 하고, 물건을 전달하기도 하지. 때론 누군가를 지키기도 하고. 뭐, 법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삶이라고 할까."
"그렇구나... 인공계, 차원계는 또 뭐야?"
"네가 있던 새우거리가 인공계잖아. 그건 사람이 만든 곳이고, 자연 차원계도 있는데 그곳은 더 위험해.. 러너들은 그런 곳을 넘나들면서 의뢰를 수행하는 거지. 접속기 없는 차원이동은 위험하거든. "
마즈의 설명에 케이티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갔다.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이 신세계였다. 상기된 케이티의 눈빛에 마즈가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케이티는 그에게서 묘한 겸손함과 여유를 느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 같았다.
무대에선 금발의 청년이 뭔가를 죽이고 부수자는 가사의 노래를 지르고 있었고, 홀의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쟤가 크리스야. 레드 몽키즈의 리더. 크리스는 술만 먹으면 저러니까. 신경쓰지 말아. 이따 소개서켜 줄께.
케이티 이야기는 크리스가 무척 재미있어할거야. 좀 또라이지만 착한 친구니까 케이티를 도와줄거야."
클럽을 가득 메운 담배 연기와 술 냄새. 어둠을 가르는 화려한 레이저 쇼. 귓가를 때리는 북소리와 기괴한 웃음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신세계로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주)신성의 본사에 비상이 걸렸다. 이사회는 비밀 채널을 총 동원해서 우호 러너와 수호사들에게 비밀 임무를 의뢰하기 시작했고, 이 의뢰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Z라는 상호식별코드가 발급되었다.
그런 사정으로 그날부터 러너 길드가 모인 빅 포레스트에서는 러너길드들의 홀로그램 회의가 한창이었지만 기업 테러를 일삼는 크리스는 반기업주의자로 낙인찍힌 탓에 레드 몽키즈 클럽의 의뢰 게시판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 크리스는 지금 홀로스크린 앞에 앉아 찌푸린 얼굴로 메시지함을 뒤지고 있었다. 최근 러너 커뮤니티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익명 게시판마다 수상한 의뢰들이 심심찮게 올라오는 가운데, 크리스만 쏙 빼놓고 뭔가 숨은 거래가 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신성이랑 관련 있는 건가?' 문득 떠오른 오래된 적수, 신성. 크리스는 공단계에서의 실패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때의 치욕이 아직도 뼈아팠다. 신성은 그에게 있어 피를 토하고서라도 넘어서야 할 벽이었다. 그런 와중에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마즈와 낯선 여자, 케이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 크리스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크리스, 이 친구가 아까 말한 케이티야. 인사해." 마즈의 소개에 크리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손짓으로 케이티를 가까이 부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케이티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노신사, 기묘한 영상, Z 표식, 끈질긴 추격까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크리스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절실한 호소에 크리스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데." 그 한마디가 모든 것에 대한 허락같았다. 잔뜩 구겨져있던 표정의 크리스가 갑자기 너무 밝은 미소를 짓는 바람에 케이티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밀을 밝혀내자고. 대신 조건이 있어. 의뢰주의 정체가 밝혀지면 빌딩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거야. 내 전용 폭탄으로 말야. 그땐 너도 협조해야 해."
뜬금없는 제안에 케이티는 당황했다. 폭탄이 뭔 소린지 터무니 없었지만 아무튼 끄덕였다.
케이티의 미심쩍은 표정에 크리스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목걸이, 아니 케이티는 그게 영화상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이거 봐. 내가 직접 설계한 폭탄이야. 어때, 끝내주지?"
이미지 속에는 기괴한 형상의 폭탄이 빛나고 있었다. 빨간 막대 다발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 가운데, 커다란 시계가 폭탄 중앙에 달려 있었다. 아날로그식 시계바늘이 위협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우습고도 섬뜩했다.
"헤헤, 멋지지? 옛것과 새것의 조화라고나 할까. 내 디자인의 정수야."
으쓱거리는 크리스의 모습에, 케이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계 폭탄이라...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게 실제로 존재하다니."
"뻑더레스에서 얻은 기술이지. 내가 훔쳐왔어. 시계는 내 아이디어고."
어린애같이 상기된 크리스에게 케이티가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크리스는 으쓱했지만, 내심 그 말이 기분 좋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죠."
"좋았어. 그럼 계약 성립이다. 자, 악수나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해, 파트너."
‘단단히 또라이'라는 마즈의 말 그대로였지만 크리스의 거침없는 태도에 케이티는 묘한 자극을 받았다. 세상을 향한 도전의식, 불의에 맞서 싸우려는 열정. 그건 잃어버렸던 낯선 감각이었다.
씩 미소를 짓는 크리스의 모습에, 케이티도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괴짜와 함께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어쩐지 이 남자라면 믿어볼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