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은WhtDrgon May 08. 2024

FEWK:KEITI -Q3-

FEWK 사이버펑크 세계관 오프닝북 텍스트

3-1 아르바이트


크리스는 케이티에게 묵을 곳을 마련해주라고 따로 지시하고는 모두를 내보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뜬금없던 의뢰의 퍼즐이 지금 우연히 맞춰진 것이다. 신성, 비밀임무, 무언가 일어난 사태, Z, 케이티. 

크리스는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났다. 오랜만에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일이 생긴 듯했다. 아직은 막연했지만 크리스의 감이 이게 분명 대박일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주)신성을 제대로 엿 먹일 수 있는 기회가 반가웠다. 크리스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툭툭 털어냈다. 연기가 천천히 흩어지며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마치 미궁 속에서 빠져나갈 실마리를 찾은 것처럼, 안개가 걷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크리스의 푸른 눈동자가 흥미로운 빛을 발하며 반짝였다. (주)신성의 공단계에서의 실패는 아직도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의 패배감과 자괴감이 뼈아프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기회를 통해 그 모든 한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벽에 기대어 선 크리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끝없는 배신과 좌절, 그리고 반복되는 실패의 순간들. 하지만 동시에 그를 지탱해준 불굴의 의지와 정의감도 떠올랐다.

'난 아직 죽지 않았어.'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마즈는 또 훌쩍 오토바이 여행을 떠났고 케이티는 그렇게 홀로 남아 며칠 째 레드몽키 클럽에서 무위도식하던 중에 나름 큰 맘을 먹고 크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크리스, 저 레드 몽키즈에서 서빙 좀 해보고 싶은데요."

술잔을 닦던 크리스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케이티를 바라보았다. 마치 낯선 존재를 마주한 듯한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자넨 우리 손님이잖아. 그런 일 안 해도 돼."

"단순히 서빙뿐만 아니라, 이 곳에서 제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케이티의 눈빛에는 확고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크리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결심인데... 정말 해보고 싶은 거야?"

"네. 이 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배우고, 제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요. 저를 믿어주세요."

크리스는 케이티의 단호한 태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는 모습이 댄디하게 느껴졌다.

크리스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흠, 그래. 해보고 싶다면야 말릴 순 없지. 대신 술값 정도는 내가 내줄게. 어때?"

"됐어요. 제가 벌어서 낼 수 있으니까. 어차피 저도 한 잔 하고 싶어서요."

씩 웃으며 케이티가 크리스의 어깨를 툭 쳤다. 그 모습에 크리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 새로운 생기가 느껴졌다.

"자, 오늘 밤은 제가 서빙을 담당할게요. 손님들 많이 오시겠죠?"

"하, 그럼. 난리 날 걸? 우리 레드 몽키즈에 여자 서버가 있다는 걸 알면 말이야."

"어디 한번 두고 보시죠. 어떤 놈이 괴롭히든 혼쭐을 내줄 테니까."

장난스레 주먹을 쥐어 보이는 케이티의 모습에 크리스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벼운 농담이지만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유명무실해진 '최후의 연주자들' 예술가 자격 유지를 위한 공연 빼고는 임무 이야기만 가득한 레드 몽키즈 클럽에 서버는 별 필요 없었지만, 케이티의 결심이 그저 어리숙하고 귀엽게 보일 뿐이었지만 크리스에겐 그 모습도 나름 신선했다.


3-2 지현


"블러디 메리 한 잔!"

"아메리카노에 보드카 더블로 줘봐!"

장난기 가득한 주문이 쏟아졌다. 케이티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열심히 음료를 만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에 술을 쏟기도 했지만, 러너들은 그냥 재미있다는 듯 웃어넘겼다.

"야, 쟤 재생사라면서? 그런 능력자는 처음 아냐? 너 들어본 적있어?"

옆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러너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맞아. 새우거리에서 왔대. 거기 이야기해주는게 엄청 재미있어."

“오! 새우거리! 나도 거기 한번 가봐야하는데. 하하하하하" 

술 취한 채 키득거리는 그들을 보며 케이티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떤 소리를 듣든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뿐이었으니까.

"아, 죄송해요!"  쟁반에 가득 실은 잔을 옮기다 그만 앞에 있던 여자와 부딪치고 말았다. 

"괜찮아요. 케이티 씨 맞죠? 전 지현이에요."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그녀가 의외로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네, 반가워요. 서빙은 처음이라 많이 서툴러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다들 케이티 이야기뿐이라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재생사라면서요? 대단한데요? 러너들 사이에선 꽤 희귀한 능력이에요."

"아, 네... 뭐 별거 아니에요. 그냥 할 줄 아는 거라서..."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는 케이티를 보며 지현은 묘한 눈빛을 보냈다. 초기의 자신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던 시절, 순수했지만 아직 각박해지지 않았던 그 시절.

잠시 뒤, 일이 끝나고 술잔을 닦던 케이티에게 지현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혹시 팀에서 하는 의뢰에 관심 없어요? 우리 팀이 마침 심상 재생 능력이 필요한데, 케이티 씨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의뢰요? 저 같은 초짜가요?"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죠. 그리고 케이티 씨, 당신은 특별한 재능을 가졌어요.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운이에요." 지현의 말에 케이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지현 씨. 제가 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볼게요."

하지만 의뢰라는 말에 케이티의 마음 한편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아직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저 호기심에, 설렘에 이끌려 뛰어든 것뿐인데.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지현은 그런 케이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차가운 손과 따뜻한 손, 묘한 조화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괜찮아요.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가 함께할 거니까. 우린 팀이거든요."

그 한마디에 케이티의 마음이 놓였다. 지금까지 만난 러너들은 모두 혼자였다. 러너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혼자서 위험한 뭔가 한다는 것은 막연한 공포 그 자체였다. 이 미지의 공포를 함께 맞서 싸울 동료가 있다는 건 큰 위안이 되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고 클럽은 창을 내렸다. 케이티는 레드 몽키즈 백룸중 크리스에게 지정받은 방의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오늘 있었던 일들로 가득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중얼거리며 천장을 바라보던 케이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위험할지 모르지만 가슴 뛰는 모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세계. 두려움과 기대감이 뒤섞인 묘한 감정. 오늘 케이티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 같았다. 


3-3 고전명작


"영화 필름을 찾아달라고?"

수덕 팀의 리더, 강인한 인상의 남자가 홀로그램 화면에 띄워진 의뢰 내용을 설명하자 전투복 차림의 팀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의뢰인은 한 유명 러너, 화사한이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살롱즈 브로드웨이 경매소에 보관 중이라는데... 돌파 작전이 필요할 것 같긴 한데, 거기서 함부로 난동 부리면 우리 이미지에 타격이 갈 거야."

누군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롱즈 브로드웨이, 그곳은 상류층들의 아지트이자 철통 같은 경비로 유명했다. 수덕 팀은 화끈한 전투가 특기였지만, 그런 곳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업계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었다.    

"일단 정보를 더 모으고, 접근 방식을 고민해 보자." 리더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들 얼굴에는 이 부담스러운 임무에 대한 망설임이 엿보였다. 

그때, 지현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선 인물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한 명 더 영입했어. 우리에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해서."

긴 생머리를 묶은 채 나타난 건 케이티였다.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에겐 묘한 카리스마가 흘렀다.

"케이티라고 해요. 심상을 읽고 전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죠."

재생사라니, 러너들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직업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누구도 재생사를 떠올리진 못했을 터. 하지만 이번 의뢰를 조용히 끝내기 위해서는 그 능력이 필요할듯 했다. 

화려한 살롱즈 브로드웨이. 그 공간에 잠입하기 위해, 케이티는 우아한 드레스로 치장했다. 지현과 수덕 팀의 도움으로 그녀는 완벽하게 변신했다. 아무도 그녀가 서민구 출신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저쪽 구석, 바에 앉은 남자... 뭔가 수상한데.'  케이티의 직감이 속삭였다. 표적의 마음속에선 거래, 영화 필름, 창고 같은 단어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가 경매 관계자이면서, 호기심에 이끌려 온 허영 가득한 인물임을 간파한 케이티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관심 있으신 작품이라도 있나요?"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그의 곁에 다가앉은 케이티. 남자의 눈빛이 그녀의 곡선을 훑었다. 욕망이 깃든 시선.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비웃으며 오히려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여기선 못 들어본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우리만의 공간은 없을까요?"

"당연하죠, 주차장에 제 리무진이 있어요." 

손짓으로 남자를 이끈 케이티. 어둠이 내려앉은 주차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수덕의 팀원들이었다. 총구를 겨눈 채 남자를 둘러싼 그들. 당황한 남자가 소리쳤지만, 케이티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상황을 통제하려 애썼다. 그녀의 말에 강렬한 설득력이 담겨있었다.

"필름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주세요. 그러면 모두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케이티의 눈빛을 마주하다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결국 저항할 의지를 상실했다.  케이티의 능력 덕분에 필름의 정확한 위치가 드러났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작전의 첫 단추는 훌륭하게 끼워졌다. 리무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케이티가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화사한이라는 분이 되찾고 싶어 하는 그 필름, 그렇게 귀한 물건인가요?"

"내 스승님도 옛날에 화사한과 한 팀이었대. 그 필름 말이야, 사실 화사한이 배틀 마커로 전향하기 전에 찍었던 에로 영화래. 제목이 '쌍맷돌'이라나? 아무래도 흑역사로 묻어두고 싶은가 봐."

"에로 영화라고요? 상상도 안 가는데..." 화사한의 은밀한 과거에 케이티의 호기심이 동했다.

"어찌 됐건, 그녀의 소중한 필름이겠죠. 우리가 되찾아줘야 해요."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일행은 다음 작전 수행을 위해 창고로 향했다. 


3-4 필름창고


케이티는 방금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동안 숨을 골랐다. 두려움, 긴장, 그리고 묘한 전율까지. 오랜만에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는 뿌듯함과 복잡한 심경이 어려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이뤄낸 성과였지만, 손에 쥔 필름은 그저 3류 에로물일 뿐이었다. 새우거리에서도 찾지 않을 수준이라 이 임무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이 필름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물건일까요? 우리가 단단히 준비했는데 말이에요."

수덕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대답했다. "뭐,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우린 의뢰를 완수한 거니까." 그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흑역사는 있는 법이고, 화사한은 자신의 과거 '신세이' 시절의 기록이 부자들의 괴팍한 취미에 이용되는 걸 분노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 비용이라니, 화사한은 갑부라도 된 걸까? 아닐 텐데.' 의뢰 비용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통 큰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더 깊이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수덕의 팀이 맡은 건 영화상 필름의 회수였지만, 다른 러너들 덕분에 이 경매에 입찰한 부자들이 무더기로 드랍아웃되면서 '쌍맷돌' 사건은 꽤 오래 화제가 되었다.

수덕은 케이티를 치하했다. "아무튼 케이티 덕분에 생각보다 조용히 끝났어.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끝난 것도 오랜만이야." 그는 케이티의 반응이 과하다고 느꼈지만, 신입의 놀라움이 즐거웠다. 케이티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건 그녀가 바라던 삶이기도 했다.

무대 위에선 크리스의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지고, 그의 노래는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듯 깊은 여운을 남겼다.

케이티가 말했다. "크리스 노래 참 좋지? 묘한 매력이 있어."

지현이 공감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있잖아, 케이티. 혹시 우리 팀 리더 수덕한테 크리스 소개시켜 줄 수 있어?"

"해볼게요. 근데 서로 잘 맞을진 모르겠네요. 그런데 수덕 씨나 지현 씨 정도면 직접 얘기해도 될 정도 아닌가요? 둘 다 비슷하게 유명한 것 같은데..."

지현이 말을 이었다. "수덕이는 의외로 그런 면에선 완전 내성적이라 좀처럼 낯을 트지 않아. 재벌들에겐 건방지게 협상도 잘하는데 말이야."

수덕이 당황해하자 케이티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수덕 씨도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전 여기 온지 얼마 안되서요."

수덕이 대답했다.

 "아니, 나는 사실 기업과 재벌 전문이라 이곳에 올 일이 없었어. 그렇다고 따로 다니는 길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현이가 케이티를 만나러 온 덕분에 알게 된 거지. 와보니까 빅포레스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러너 길드보다는 이런 자유로운 공간이 맘에 드네."

지현이 덧붙였다. "레드 몽키즈는 최초로 세워진 러너 길드예요."

케이티는 살짝 놀라며 공감을 표했다. "와, 그렇게 유서 깊은 곳이었군요!"

수덕이 케이티에게 물었다. "케이티, 넌 왜 재생사가 된 거야?"

케이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가난했던 것도 있지만, 난 이 일밖에 할 줄 몰라서요."

지현이 격려했다. 

"아니야, 케이티의 능력은 타고난 재능이야. 넌 훌륭한 러너가 될 거라고 확신해."

케이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인정받는 기분은 언제나 기뻤다. 수덕이 싱긋 웃으며 잔을 들자, 세 사람은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동료가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이전 02화 FEWK:KEITI -Q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