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포레스트 거리.
러너들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곳엔 하루에도 수천 건의 담보 계약이 체결된다.
거래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기억, 감각, 그리고 신뢰였다.
그날도 거리 위 홀로그램 전광판은 외쳤다.
“당신의 신뢰도는 98.2%! 프리미엄 등급으로 환영합니다!”
한 청년, 베른,은 아이언 러너전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투명한 유리 기둥과 떠다니는 데이터 스크린, 반짝이는 신경로 표시등.
건물의 입구에 서자, AI 마스코트가 그를 반기며 안내했다.
“전투기억 채권을 담보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생체데이터 연체율은 현재 3.8%입니다. 매우 안정적입니다.”
“아이언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베른은 몇 초간 망설이다 손바닥을 펼쳤다.
등록된 인격정보와 신경임플란트가 열람되며, 화면에 하트 아이콘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의 투자 신뢰도는 ‘99.1%’로 갱신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진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
아이언 러너전 거래소의 거대한 유리 외벽엔 붉은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담보이행률 89% 초과. 신뢰지수 폭락.”
이어지는 속보 영상에는 그리즐리 길드장의 검거 장면이 생중계됐다.
러너전의 핵심 운영자이자 ‘신뢰지수 시스템’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총성, 튀는 칩, 붉게 번지는 코드 잔상.
디지털 서명은 피처럼 스크린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오후, 거리 한복판에 새로운 전광 간판이 솟구쳤다.
“실버 러너전 – 피해 전액 보상!”
베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줄을 섰다.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실버 러너전은 아이언 러너전과 같은 시스템, 같은 운영자, 같은 구조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서로를 속이며, 자신을 더 깊이 속이는 선택.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베른은 실버 러너전 본사 옥상 위에서
담담히 시가를 피우는 남자의 모습을 목격했다.
실버 길드장.
그의 실루엣은 광고 속 그리즐리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신은 죽었지.”
그가 시가 연기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브랜드는, 더 강해졌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 위 또 다른 광고판이 점등됐다.
“슈퍼뉴골드 러너전 – 당신의 믿음을 자산화하세요.”
그리고 베른은,
또다시 줄을 섰다.
거래소의 입구가 열리고, AI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가입하시면 신뢰지수 100%가 보장됩니다!”
그는 이번에도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제, 무너짐마저도 하나의 자산이었다.
✅ FEWK의 화폐들: 대사만국 시대 이후 FEWK국에는 100개가 넘는 화폐전이 존재하며, 1시간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오얏전부터 국가화폐인 대사전, 종교화폐인 신성전, 직업별 실물전까지 다양한 화폐가 각자의 영역에서 통용된다. 화폐전은 일상 물건이 거래 수단으로 사용될 때 '전(錢)'을 붙여 부르며, 대부분 특정 직업군이나 지역에서만 유통되는 특수 화폐의 성격을 띤다.
✅ 러너전(Runner Exchange): 러너들이 생체 데이터, 전투 임플란트, 계약 등을 거래하는 금융 플랫폼. 신뢰도 지수를 기반으로 운영되며, 투자와 도박이 혼재된 형태.
✅ 생체 데이터 담보(Bio-Data Collateral): 러너들이 자신의 신체, 전투 기록, 신경 패턴 등을 금융 상품으로 활용하는 방식.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데이터는 강제로 매각되며, 일부는 클론 개발 및 AI 트레이닝에 사용됨.
✅ 미모대사국: 강력한 파이오니아 부대를 보유한 군사 중심 국가로, 다른 대사국들과 달리 직접적인 자원 수탈보다는 군사력과 연구 개발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인다. 제제의 콜로세움 연구소와 파이브헌드레드 캐치먼트의 군사연구소를 운영하며, 주로 대규모 팀 단위의 러너 임무를 의뢰한다. 서울 서부에 위치한 단일 대사관을 통해 파이브헌드레드 지역을 관할한다.
✅ 빅포레스트 거리(Big Forest Street): 물질계에 위치하면서도 인공계와 결합된 독특한 공간으로, 각 도시의 러너 카페와 클럽 게이트를 통해 접근 가능한 러너들의 중심지다. 리버힐의 플레인즈에 위치한 이곳은 실제 육체로만 방문할 수 있으며, 가장 작은 카페의 뒷문조차 드넓은 훈련장, 사격장, 목장이 있는 인공계로 연결된다. 수많은 길드와 금융 거래소가 밀집해 있어 러너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대사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 구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