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태백숲 북쪽 계곡에 신맥동이 포착되었다.
지하에서 솟구친 미세한 진동—신맥동은 흑공이 분출되기 직전, 차원의 결이 뒤틀릴 때 감지되는 전자기 파장이다. 수호사 센서 필러들이 이를 감지하자, 본부는 즉시 '레벨-실트 작전'을 발동했다.
수호사 전단과 함께 파견된 이들 중 하나가 야전교수 한칸이었다.
“또 흑공이군.”
누군가가 중얼였고, 한칸은 묵묵히 고글을 내렸다.
그는 군인이 아니었다. 연구자였다.
하지만 야전교수에게 있어 이 순간은 기회였다.
흑공이 직접 분출하는 현장을 관측하고, 현화 과정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
흑공.
그것은 이계의 ‘어둠’이며, 인간의 상상력에 반응하는 존재다.
살아 있는 자의 두려움, 기억, 욕망을 빨아들여 실재하지 않아야 할 형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흑공은 인간만을 감염시키는 게 아니었다. 오래된 기록물이나 예술품에 깃들어 초자연적 현상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 물건은 기억과 세계 사이의 틈이 되어 물적각성을 일으킨다.
한칸은 그러한 현장의 단서를 쫓아,
수색 중 발견된 폐건물 내부에서 낡은 심상 녹화테이프 하나를 수거했다.
기술자가 말렸다. “심상재생은 위험합니다. 기계 재생으로 충분해요.”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가장 진한 정보는… 화면이 아니라, 체감 속에 있습니다.”
테이프를 재생하는 순간,
그의 뇌는 영상과 ‘접속’되었다.
기억처럼 흐르는 화면 속에서, 무언가 흐릿한 형상이 일렁였다.
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미명존재.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고요한 영상 속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심장은 요동쳤고, 손끝이 얼었다. 그것은 단순한 영상의 일부가 아니었다.
현실을 왜곡하고 감각을 침식하며, 테이프 속으로부터 그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설마… 매팅?”
그는 스스로 중얼이며 곧장 알았다.
이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물적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매팅’.
흑공에 감염된 존재가 괴수로 변이하는 비가역적 감각변이 현상.
일부는 능력을 각성하고 샤이닝으로 진화하지만, 매팅은 그저 ‘망가짐’만을 남긴다.
괴수화,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것.
한칸은 이를 수년간 연구해왔지만, 그 자신이 대상이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피부 아래서 꿈틀거리는 감각.
입 안이 말라붙고, 귀를 타고 들어오는 소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는 겨우 돌칩 권총을 쥐었다. 손끝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떨렸다.
남은 시간, 10분.
“버텨낼 수 있을까…?”
광기가 번져가며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렀다.
“한칸… 나는…… 아직……”
하지만 그 순간, 미명존재의 실루엣이 그의 시야를 삼켜버렸다.
—
10분 후.
태백숲 작전 통제망에 경고음이 울렸다.
“대상자 신경신호 미확인. 감시장치 소멸.”
수호사 대원 하나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폐건물 안엔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참 뒤—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심상재생(心象再生) : 기록된 심상을 감각적으로 재생하는 기술.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까지 포함해 체험할 수 있어, 교육, 증거보존, 초자연적 현상의 기록 등에 사용됨. 숙련된 재생사는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기록을 읽을 수 있다.
✅ 미명존재(未名存在) :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초자연적 존재. 일반적인 괴수와 달리 흑공, 신기, 또는 미지의 요소에 의해 형성되며, 존재 자체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러너들은 이를 ‘아주 고약한 것을 교수들이 점잖게 부르는 말’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 물적각성(物的覺醒) : 기록된 정보나 사물이 특정 조건에서 현실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 보통 인격이나 작위가 가미된 물건에서 발생하며, 접촉하는 순간 강제적인 각성이 일어날 수 있음. 샤이닝(광중독)과 매팅(미지각성)으로 구분된다.
✅ 매팅(Matting, 미지각성) : 초자연적 존재나 물적각성에 의해 발생하는 변이 현상. 샤이닝(광중독)과 다르게 능력을 부여하지 않으며, 괴수화되거나 더욱 끔찍한 변형이 일어남. 매개체에 따라 증상이 달라지며, 생존율은 50% 미만.
✅ 돌칩 : 신단석에 일정한 회로설계가 들어가 특정한 기능을 하는 도구이다. 돌칩은 신단석을 도안이나 회로설계 가공한 것으로 돌멩이 + 컴퓨터칩 같은 느낌의 신기 메카트로닉스 부품이다. 신호연결 기술에 쓰이기도 하고, 배터리 혹은 특수용도의 에너지를 저장하는데 사용한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돌칩 권총의 탄환 용도
✅ 돌칩 권총 : 돌칩을 탄환으로 사용하는 특수한 무기. 물리적 살상력은 낮으나 흑공과 신수에 반응하여 변이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돌칩의 종류에 따라 특수한 기능을 가지며, 러너들에게는 필수적인 기본 장비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