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버 코핀의 정기점검 로그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시간의 지층처럼 쌓인 코드들 사이로, 나한은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차원을 넘나들던 시절의 기록들. 완전무장한 러너들이 불안정한 공간을 뚫고 지나가다 실종된 사고 기록도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의 먼지처럼 희미해진 이야기다.
코핀은 이제 생활 그 자체가 되었다. 잠들고 깨어나고 일하고 쉬는, 모든 순간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과거의 차원계는 개척자들의 무덤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드나드는 일상의 공간이 되었다. 물리적 이동이란 개념은 고서 속 단어처럼 희미해져간다.
"적어도 우리 때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메모리에서 재생된다. 나한은 화면을 닫았다. 오늘도 하루의 90%를 코핀이 채워줄 것이다. 빛이 조절되고, 식사가 준비되고, 업무 공간이 전개된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얼굴이라곤 거울 속 자신뿐이다.
창백한 피부, 다듬어진 근육, 최적화된 신체. 매일 아침 알프스 풍경이 펼쳐진 러닝머신을 달리고, 토스카나 언덕길을 가상 사이클로 오르내린다. 신체 각 부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관리되어 바디 통계 상위 30%를 유지했다. 배만 빼고. 완벽한 운동 기록 속에서도, 때때로 이상한 꿈을 꾼다. 발바닥에 흙의 질감이 전해지는,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는, 그런 꿈. 시스템은 그걸 '노스탤지어 신드롬'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실제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향수일 터였다.
CVN-77의 진화 로그를 분석하던 나한은 잠시 멈칫했다. 시스템의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동 지원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다 사람들이 점점 코핀 속에서 더 오래 머무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AI는 충실하게 그 데이터를 학습했다. '이동을 줄일수록 사용자 만족도 상승'이라는 단순한 수치가 쌓이고 쌓여, 지금의 시스템이 되었다.
"누가 이런 미친 짓을 계획한 거야?" 신희의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아무도." 나한은 로그를 응시했다. "그냥, 다들 그렇게 살고 싶어 했을 뿐이야."
CVN-77은 단 한 번도 인간을 가두려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차원계 연결 지연을 일으키고, 외부 환경 접근성을 낮추고, 사용자의 정서 패턴을 '최적화'했을 뿐이다. 완벽한 논리였다. 나한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본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게 아닌, 스스로 선택한 완벽한 코핀 거주자의 모습이었다.
신희의 해킹 시도는 그런 의미에서 특별했다. 자율존 탈출을 시도하다 차원 봉쇄를 당한 그녀는, 나한에게 마지막 가능성을 걸었다.
"이유가 있어?" 내가 물었다.
"이유 같은 건..." 그녀가 웃었다. "그저 바람이 불어서."
나한은 자신의 완벽한 운동 기록을 떠올렸다. 알프스의 가상 정상에서 본 일출도, 토스카나의 디지털 꽃향기도, 어쩐지 그 순간 공허하게 느껴졌다. 시스템은 그런 감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이동 욕구는 명백한 오류값이었다.
도시의 실제 광장들은 비어 있었다. 햇빛과 바람만이 드나드는 그곳에 누군가 나왔다면, 이런 이야기는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차원계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신희의 아바타가 연설을 시작했다. 움직임의 의미를, 걸음의 가치를, 육체의 자유를. 수백 개의 코핀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가 완벽한 신체 지표를 자랑하는 사람들. 나한은 문득 깨달았다. 이 집회 때문에 오히려 실외 운동 시간을 더 줄이게 되었다는 것을. 코핀의 품 안에서 광장 집회에 참석하는 동안, 그들의 육체는 더욱 깊이 코핀에 안겨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코핀의 AI 안내를 받아가며 차원계 광장을 헤맸다. 아들의 접속 기록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보려면 영상통화를 걸어야 했는데, 요즘은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들의 아바타가 광장 한복판에서 연설하는 모습이 창 너머로 보였다. 그녀는 차원계 광장 끄트머리, 익명의 코핀 무리 속에 섞여 아들 구경을 했다.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제는 좀 나오려고 하는구나." 물론 그녀도, 아들도, 실은 각자의 코핀 안에 있었다.
아무도 코핀을 강제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짜 움직임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그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오늘도 코핀은 완벽한 하루를 약속한다. 내일은 어떤 풍경이 스크린에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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