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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WK단편선 26>디지털 네크로맨서

by 김동은WhtDrgon

새벽 세 시, 단말기가 경고음을 울린다.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음이었다. 루카-9는 화면을 확인한다. [에이다 복구 요청. 시한: 72시간. 선지급: ₩.....] 대체 무슨 화폐로 보낸건지 숫자가 너무 커서 표시조차 되지 않았다. 수천억조쯤 되는 단위. 그래도 환산해보니 상당한 액수였다. 크라우드 펀딩 의뢰다. 기부자 명단은 익명이다. 그는 대충 어제쯤 마시다 뒀을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킨다. 이런 의뢰는 처음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루카-9는 리설렉터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일이다. SNS, 통화, 결제, CCTV... 흩어진 데이터를 모아 시뮬라크를 만든다. 신뢰도 90%이상으로 대사국 법정이 증언능력을 인정하는 디지털 부활의 라이선스를 가진 직업이었다.


이 모든 작업은 D-LOCK이 감시한다. Digital-Law Oversight & Correctional Keeper. 대사국이 만든 감시자다. 그들은 '데이터 보안'을 말하지만, 실상은 모든 디지털 흔적을 통제한다.

그렇잖아도 그들의 통제가 시작됐다. [의뢰 불법 판정. SWD 접근 금지.] D-LOCK의 경고다.


'또 시작이군.' 루카-9는 쓴 웃음을 지으며 D-LOCK을 둔하게 만드는 특제 전용 단말기를 켰다. "숨긴 걸 파헤치는 게 내 특기지."


데이터는 썩지 않아. 숨을 뿐이지.' 스승의 마지막 말이었다. 남은 건 텅 빈 데이터뿐. 누군가 완벽하게 지웠다. 완벽한 디지털 자살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숨은 것을 찾으려는 집착이 필요하다.


단말기가 에이다의 정보를 표시한다. 데이터 윤리학자. 27세. 3년 전 실종. 마지막으로 남긴 건 논문 하나뿐이었지만 발표 직후 삭제되었다. D-LOCK의 해명은 간단했다. '사실 오류'. 그게 전부였다." 관련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 뉴스, 캐시, 토렌트까지. 너무 완벽한 삭제였다.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스승의 키보드를 꺼내들었다. 이런 작업은 원시적인 것이 최고이다. 스승이 남긴 로컬 시스템과 프로그램이 깨어난다. 로그와 캐시의 파편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24시간 동안 단말기는 쉬지 않았다. 마침내 작업실에 에이다가 나타났다. 보통의 시뮬라크는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또렷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보고 있나요?' 에이다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려있다. 방금 부활한 주제에 상황판단까지. 너무 단호해서 서둘러 대답했다. 원리상 그럴리는 없지만 이정도면 죽을 때 깨어날 준비를 했나싶을 생각이 들 정도였다. "5분 30초. D-LOCK의 다음 감시 주기까지 남은 시간이에요. 난 특제 기계가 있어서..." 에이다의 형상이 흔들렸다. '트로이의 목마... 그들이 심어놓은 코드예요. 당신의 기억, 내 기억,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어요.


경고음이 울린다. [데이터 오염 감지] 에이다의 형상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분열되고, 목소리가 잘게 쪼개진다. "그 특제 기계 별로네요...." 단말기가 뜨거워진다. [경고: 데이터 오염. 강제 종료.] 에이다의 형상이 일그러진다. 눈이 겹쳐지고, 손가락부터 지워진다. "그들이 온다..." 루카-9는 백업을 저장한다. 남은 시간 48시간.


48시간 경과. D-LOCK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하나둘 네트워크가 끊긴다. 루카-9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시간이 없다. 방화벽 경고가 뜬다. [보안층 1번 해제됨.] 루카-9가 쌓은 방어벽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D-LOCK이 해킹을 시작했다는 신호다. 루카-9이 자부하는 보안망이다.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질뻔 했지만 34...78...99... 백분의 일초 타이머가 숫자를 읽는 듯 해체경보가 사이렌처럼 이어지켜 그럴 여유가 없어졌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그는 중얼거린다. 돈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랬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겠군.' 루카-9는 화면을 노려본다. 처음엔 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승의 죽음, 에이다의 실종, 모든 게 연결된 것 같았다.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방화벽의 해체 경보가 9백대에 이르렀다.


60시간 경과. D-LOCK의 공격이 시스템 핵심부를 파고든다. 보안 프로그램들이 하나씩 무력화된다. 화면이 번쩍이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그가 심어둔 보안 코드들이 차례로 침묵한다. 마지막 방어선, 스승에게 배운 방화벽도 무너져내린다. [보안층 3만대 해제됨. 시스템 침입중]


시스템이 강제로 재부팅된다. 화면에 에러 코드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백업 데이터가 조각나 흩어진다. 문득 스승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완벽한 삭제. 디지털 세계에서의 영원한 침묵. 그래도 손가락은 계속 움직였다. 숨은 진실은 집착이다. 사명이다. 스승의 프로그램을 최적화한다.


70시간 경과. 화면에 숫자가 떴다. 91%. 법정 기준을 넘어섰다. 이전과는 다른 에이다가 나타났다. 완전한 기억을 가진 그녀였다. "D-LOCK은... 우리가 알던 그것이 아니에요. 누군가가 대사국 전체를 조종하는 코드예요. 내가 암호로 분산해둔 데이터가 있어요."


72시간이 끝났다. 보안층 해제 경보가 멈췄다.

리설렉터 라이선스 정지 통보가 울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불법 시뮬라크 감지. 강제 종료 개시] 에이다의 모습이 균열처럼 갈라진다. 디지털 공간이 뒤틀린다.
단말기가 꺼진다. 조명이 꺼지며 방 전체가 어두워졌다. D-LOCK의 집행관들이 올 것이다. 이미 건물 전체가 포위되었을 테지. 하지만 에이다가 끌어모은 중거와 증언이 해독되어 8,192개의 노드로 퍼져나간다. 이제 아무도 이 진실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문을 부술까? 창문으로 무언가를 투척할까? 고통스러울까? 긴장과 조바심 속에서도 모든 긴장이 풀어지는 후련함. 하지만 그순간 무언가 달라졌다. 작업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가 멀어진다. 다시 불이 들어왔다.


[고마워요, 루카-9. 잔금 입금 완료: 미모국 대사전 ₩....] 에이다의 동료들이 이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어졌나보다. 입금 화폐가 대놓고 대사국의 공식화폐인 대사전으로 바뀌었다.


'에이다의 동료들이 대사국이었나.' 루카-9는 화면을 응시했다. "정말 대단한 밤을 만들어줬네." 전신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은 퍼졌다. 스승이 틀렸다. 데이터는 숨는다. 찾아낼 용기만 있다면 드러난다.


하지만 억울하게 루카-9의 라이선스는 복구되지 않았다.


DALL·E 2025-02-22 00.56.18 - A cyberpunk scene featuring a futuristic hacker named Luka-9 in a dimly lit room filled with holographic screens, neon lights, and tangled cables. Luk.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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