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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WK단편선 31>사라진 계절

by 김동은WhtDrgon

# 사라진 계절


비가 내리지 않은 지 9년째였다.


도시 위로 쏟아지던 봄비도, 여름의 소나기도, 가을의 이슬비도, 겨울의 얼음비도 모두 사라졌다. 그저 끝없는 가뭄만이 지속됐다. 기상학자들은 무언가 근본적인 균형이 깨졌다고 했다. 매일 아침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한숨을 쉬곤 했다.


휘경은 그날도 우산을 들고 나왔다. 습관이었다.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 우산은 그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언젠가 다시 비가 내릴 것이라는 믿음. 혹은 그저 정연의 손이 마지막으로 만졌던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가뭄에 우산이라니. 미친 사람 취급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미친 짓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아파트로 돌아온 휘경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가끔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헷갈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 점점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 단 하나 또렷한 것은 정연의 얼굴이었다. 웃을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모습. 생각에 잠길 때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짓.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순간들.


휘경은 손끝에 맺힌 비슷한 감촉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정연과 비를 맞던 날, 그녀는 웃으며 그의 이마에 맺힌 빗방울을 닦아주었다. "당신 눈에 비치는 하늘이 너무 예뻐서."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지금은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서랍에서 꺼낸 작은 상자 안, 낡은 시간 나침반이 붉게 빛났다. 동백국 동쟁 시절의 유물이었다. 손가락으로 나침반의 차가운 표면을 어루만지자, 그 안의 흑공이 소용돌이쳤다. 마치 그의 가슴처럼 격렬하게.


"그냥 과거도 아니고 다른 차원에 억지를 만들어놓고 그 과거를 간다고요? 무슨 차원간 아크로바틱이에요? 대체 왜그래요?"


하린의 마지막 경고가 귓가에 울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연민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사랑에 미쳤어도 논리는 맞아야 할 거 아냐. 이건 패러독스가 쌓이면 인과율이 무너져. 결국 네가 사라질 거라고."


그동안 그는 모든 부작용을 견뎌왔다. 만성 두통, 불면증, 현실감 상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의 존재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 마치 지워지는 연필 선처럼.


그는 종종 자문했다. 기억 없는 정연은 여전히 정연인가? 그가 사랑했던 그 특별한 존재는 이 차원계에 그대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저 그가 창조한 환영인가? 그럼에도 그는 매번 돌아왔다. 정연의 목소리, 손짓, 미소가 담긴 그릇이 여전히 그녀라고 믿고 싶었다.


휘경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침반에 손가락을 올리자 세상이 희미해졌다. 마치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천천히.


---


휘경의 시야가 번졌다 돌아왔다. 나침반에 닿은 손가락이 흑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귓가에 낮은 진동이 울렸다. 그리고 세상이 물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비가 멈추지 않은 지 9년째였다. 비원에서는.


비원의 차가운 빗방울이 휘경의 얼굴을 적셨다. 물질계보다 정보 밀도가 낮은 이곳에서는 빗방울이 공중에 살짝 멈춰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공기는 더 가볍고 소리는 더 선명했다. 색채는 약간 바랬지만 윤곽은 더 날카로웠다. 그림자가 더 길게 늘어졌다. 이곳은 물질계와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였다.


그는 잠시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서 있었다. 이 감각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비의 질감, 냄새, 소리. 9년 동안 그는 이곳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매주, 마침내 일 년에 한 번씩. 매번 정연을 만났고, 매번 그녀는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비원에 내리는 끝없는 비와 물질계의 9년 가뭄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가 정연을 위해 만든 인과율의 균열. 한쪽에서 빼앗긴 것은 다른 쪽에서 넘쳐났다. 균형은 항상 지켜지는 법이었다.


비원은 이름처럼 버려진 정원 같았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야생화가 피어있었다. 자연이 문명의 흔적을 서서히 덮어가는 광경. 휘경은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부서진 분수대를 지나, 돌다리를 건너, 오래된 파빌리온으로. 손끝에 느껴지는 빗물이 그를 과거로 데려갔다.


멀리서 정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파빌리온 아래 서서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9년이 지났지만, 정연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녀의 실루엣이 비에 젖은 풍경 속에서 더욱 선명했다.


그가 다가가자 정연이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쉽게 잊히지 않는 음색.


"안녕하세요." 휘경이 대답했다.


"비 오는 날 산책하시나 봐요."


"네, 비가 그리웠어요."


9년 동안, 그는 정연을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정연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경의 얼굴을 천천히 탐색했다. "이상하게 낯이 익은데요. 전에 만난 적 있나요?"


정연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휘경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9년 전 그녀가 늘 하던 습관이었다. 그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몸이 기억하는 것일까?


휘경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치 오래 닫혀있던 창문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


갑자기 두통이 휘경을 덮쳤다. 눈앞이 흐려졌다. 주변의 소리가 이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정연의 목소리가 한 순간 둘로 겹쳐 들렸다. 빗방울이 갑자기 공중에 멈춰 서는 듯했다가, 다시 떨어졌다. 머릿속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았다.


"정연 씨..." 휘경이 속삭였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정연의 눈이 커졌다. 놀라움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마치 피를 흘리는 것처럼. 비원 전체가 붉은 빛에 휩싸였다. 빗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울렸다. 인과율 보정의 시작이었다.


"저는 이제 가봐야 해요," 휘경이 일어섰다. 무릎이 떨렸지만, 그는 마지막 존엄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정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여기서 행복하세요?"


정연의 눈에 이상한 빛이 어렸다. 마치 아주 오래된 기억의 잔상 같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휘경은 웃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지만, 빗물과 구분할 수 없었다. "그냥... 알고 싶어서요."


정연은 잠시 생각했다.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생각에 잠길 때 늘 하던 표정. "행복해요... 그런 것 같아요. 비록 제가 왜 여기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가 차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이 향,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휘경의 가슴이 아팠다. 정연이 다시 살아있게 하기 위해, 그는 그녀에게서 모든 기억을 빼앗았다. 그들의 사랑도, 그녀의 정체성도 모두. 과연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이기심이었을까? 그런 질문을 할 시간도 없었다.


휘경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물에 번지는 수채화처럼.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빗방울이 그의 팔을 통과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물질이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잠깐만요!" 정연이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가지 마세요!"


정연은 다가와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손을 뻗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휘경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가 아파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그곳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당신을 보면."


"당신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 정연이 애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휘경이에요." 그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그 순간, 정연의 눈에 번쩍이는 빛이 스쳤다. 마치 번개가 그녀의 기억을 관통한 것처럼.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휘경...?"


그녀가 중얼거렸다. 말의 울림이 그녀의 기억 깊은 곳에 무언가를 건드린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동안 그녀는 두 개의 현실 사이에 있는 듯했다. 비원의 정연과 물질계의 정연이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녀의 두 눈에서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혼란스러운 눈빛이 또렷해졌다.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허공을 붙잡았다.


"계속 생각했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언가 빠진 것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비가 내리면 항상 느꼈어,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느낌을."


휘경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9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정연의 눈에서 인식의 빛이 번졌다.


"당신이었네," 그녀가 말했다. "매번 비가 올 때마다 창가에 서서 기다렸던 사람. 내가 왜 항상 비 오는 날이면 창가에 서 있었는지. 그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었어."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휘경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목구멍이 메어왔다.


"미안해," 정연이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 때문인 줄 알았으면 더 빨리 기억해냈을 텐데."


그녀는 그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는 9년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었다. 사랑과 그리움, 미안함이 뒤섞인 제스처.


"이제 그만 괜찮아," 그녀가 속삭였다.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미 늦었다. 휘경의 몸은 빛으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평화를 느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휘경!" 정연이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멀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미소 지었다. 그가 기억하는 정연이 여기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행복하게 살아, 정연아."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정연은 그가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이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듯 했다. 휘경. 낯설면서도 너무나 친숙한 이름. 그녀는 빗속에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맺힌 물방울이 그의 눈물 같았다.


---


물질계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9년 만에.


첫 비였다. 사람들은 놀라며 환호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비를 만지려 손을 뻗었다. 메마른 땅이 물을 받아들이며 축복처럼 빛났다. 마치 세상이 오랜 갈증을 해소하는 것 같았다.


휘경의 아파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는 깨진 시간 나침반만이 남아있었다. 다음 날, 관리인이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방은 9년간 비어 있었다. 하지만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낡은 우산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흐릿한 글씨로 쓰인 메모가 있었다. "비가 오면 돌아올게." 마치 누군가가 방금 사용하고 간 것처럼. 마치 시간이 그 누군가를 기억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마치 존재의 흔적이 인과율보다 강한 것처럼.


DALL·E 2025-02-26 16.48.14 - A melancholic, cinematic illustration depicting a rain-soaked ruins on a misty hill, inspired by the story _사라진 계절._ The atmosphere is heavy with long.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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