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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WK단편선 35> 천연 교양

by 김동은WhtDrgon

I.

서연의 기억 속에서 힙스는 언제나 빛났다. 네온과 홀로그램이 밤하늘을 수놓고, 인공 오로라가 도시의 상공을 춤추며 휘감던 곳. 그곳에서 그녀는 최상위 5% 학생으로서 메오 백화점의 VIP 라운지를 드나들며 '품격'을 몸에 익혔다.

"서연아, 세상은 너를 네 외양으로 판단해. 절대 허름해 보이면 안 돼."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 서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호버카가 멈추자 서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낡은 벽돌 건물들이 햇빛에 붉게 물들어 있고, 이끼 낀 나무들은 바람에 나른히 흔들리며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뽐냈다. 캠퍼스는 고풍스러운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힙스에서 꿈꿔온 반짝이는 나노 빌딩과 하늘을 찌르는 네온 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여기가 정말 그 학교예요?" 서연이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목소리에 의심이 묻어났다. "너무 평범해 보여요."

"네, 맞습니다." 운전기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의 굵은 손이 핸들을 툭 치며 말했다. "짐은 관리인이 옮겨줄 겁니다."


서연은 차에서 내려 이곳을 둘러보았다. 힙스의 우수 교환학생으로 궁정구의 사립학교로 오게된 것이었다. 살롱즈가 아니라는게 아쉬웠지만 궁정구도 엄연히 퍼스트 클래스급 상류사회였다. 궁정구 학교의 수백 년 된 석조 건물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위엄을 풍겼고, 단풍나무와 떡갈나무들은 바람에 속삭였다. 서연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힙스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침묵이었다.

'이 고풍스러움은 마치 역사의 무게를 담고 있는 것 같아.'

서연은 자신의 생각에 놀랐다. 겉모습만 중요하다고 배웠는데, 이 낡은 건물들에서 무게감을 느낀다니.


상류층 앞에서 품위를 지키는 법을 몇 달간 연습한 터라 어깨가 뻣뻣했다. 하지만 캠퍼스를 걷는 학생들은 선글라스도, 홀로 악세서리도 없이 초라한 옷차림으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그들의 셔츠는 빛바랜 농부 옷처럼 보였다.

"정말 검소하네. 교칙인가? 일부러 서민 체험 하라고?" 서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서연 학생이죠? 저는 마커스 교감입니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다가왔다. 회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은빛으로 반짝였고, 부드러운 미소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연상케 했다.

"안녕하세요." 서연은 오른손 중지를 살짝 구부리며 인사했다. 힙스에서 배운 품격의 상징이었다.

교감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손가락이 불편하세요?"

"아, 아니요!" 서연은 당황하며 손을 황급히 내렸다. 이때만 해도 익숙하지 않아 뭔가 예의를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짐은 관리실에 맡기고 기숙사로 가죠." 교감이 앞장섰다. 그녀의 낡은 가죽 구두가 돌바닥에 툭툭 소리를 내며 묘한 리듬을 만들었다.


돌이 깔린 길을 걸으며 서연은 주변을 관찰했다. 백 년은 족히 되었을 고딕 양식의 건물들 사이로 학생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힙스 학생들의 경쟁적 긴장감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시간 자체가 다르게 흐르는 곳 같았다.


'여긴 마치 다른 세계야. 힙스의 반대.'


서연의 마음속에서 묘한 양가감정이 일었다. 이곳의 느린 고요함이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끌렸다.

기숙사는 오래된 목재 향이 감도는 고풍스러운 건물이었지만, 방은 초라했다. 낡은 침대 위에 얇은 이불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책상은 긁힌 자국투성이였다. 옷장 문은 삐걱거릴 것처럼 보였다.


"미니바나 홀로그램 센터는요?" 서연이 물었다. 목소리에 실망이 묻어났다.

"공용 시설에 있어요." 교감이 차분히 설명했다. "여기선 개인 공간보다 소통이 중요하죠. AI 비서도 안 쓰는 게 좋아요.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 사고가 깊어집니다."

서연은 한숨을 삼켰다. 힙스에선 이런 방을 '빈곤 체험'이라 부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창밖으로는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서연은 창가에 앉아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석양이 스며들고, 학생들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토록 그리던 상류사회가 이런 곳이라니. 역시 살롱즈를 갔어야해. 이름부터 촌스러운 궁정구라니...'

서연은 문득 이곳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신성한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감정이었다.


저녁이 되자 배고픔이 밀려왔다. 룸서비스를 찾으려 관리실에 전화했지만, "그건 병가를 낸 학생들만 가능해요. 아프세요?"라는 퉁명스러운 대답만 돌아왔다. "식당이 8시까지예요. 내려오세요"라는 말에 서연은 어이가 없었다.


II.


서연의 머릿속에 힙스의 기억이 번쩍였다. 골드 클래스 식당의 프라이빗 부스에서 빛나는 홀로그래픽 메뉴를 바라보던 순간들. 스테이크 한 접시에 매겨진 30만 크레딧의 가격표. 서연은 그 기억이 오히려 조잡하게 느껴져 흠칫했다.


AI 비서 '리미'도 금지라니, 복도에서 만난 룸메이트에게 물었다.

"혹시 식당이 어딘지 알아?"

"아, 나도 가는 중이야. 따라와." 민지가 앞장섰다. 갈색 머리가 어깨 위로 살짝 흔들렸고, 평범한 셔츠를 입은 소녀는 걸음걸이가 유난히 가벼웠다. 그녀의 낡은 신발이 복도 바닥에 톡톡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서연이 민지를 따라가며 물었다. "이 건물은 정말 오래된 것 같아. 몇 년 된 거야?"

"오, 이 동관? 500년전쯤?" 민지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밤에 빗소리 들으면 정말 좋아. 수백 년 된 석조와 나무가 빗소리를 어떻게 울리는지 들어보면 알 거야."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500년? 힙스에서는 10년만 지나도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지었다.


식당은 웅장했다. 높은 천장에 거대한 나무 기둥이 늘어서 있고, 창문 너머로 석양이 붉게 물들어 실내를 따뜻한 빛으로 채웠다. 테이블마다 색깔이 달랐다. 파랑, 초록, 노랑...

서연이 물었다. "학년별로 나뉘어 있어?"

민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후원하는 곳에 따라 달라. 난 예술 테이블에 앉아. 같이 갈래?"

"후원?" 서연이 눈을 깜빡였다.

"응,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돕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법이니까. 오늘은 내가 안내해줄게."


앞서 걷던 민지가 담담히 말했다.

"너도 후원하는데가 있을꺼 아냐? 우리의 소득은 결국 없이 사는 중산층에서 나오는 거잖아. 그걸 다시 나누는 게 우리 책임이지. 그들이 건강해야 우리도 잘 살 수 있으니까."

민지의 말에 서연은 힙스에서의 기부 행사를 떠올렸다. 최신 홀로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으며 기부 인증서를 자랑하던 순간들.


그녀가 파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로 향했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앉아 밥을 먹으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연은 민지를 따라 앉았다. 서빙된 접시에는 단순한 음식이 담겨 있었지만, 신선한 채소의 풀내음과 고기에서 풍기는 구수한 향이 코를 찔렀다.


그녀는 포크를 들고 손목을 살짝 꺾어 품위 있게 먹기 시작했다.

민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왜 그렇게 먹어? 손목 아프겠다."

"응? 집안이 예절 교육이 엄해서... " 서연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소매가 짧은데 왜 손목을 꺾어?" 옆자리 남학생이 피식 웃었다. "긴소매 입을 때 음식 묻지 않으려고 하던 건데, 좀 촌스럽네."

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컵을 두 손가락으로 들자 또 지적이 들어왔다.

"코데일을 찻잔처럼 들 것까진 없잖아. 손잡이도 큼지막한게 두개나 있는데. 넌 참 인형같구나." 남학생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가 배운 교양이 실용성의 잔재라는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서연은 자신의 깨달음에 당황했다.

그렇다면 힙스에서 배운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까?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이런 생각들이 마음속을 휘저었다.


"너, 제법 재밌다." 민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 이름이 뭐지?"

"서연이야."

"예쁜 이름이네. 난 민지. 그리고 이쪽은 올리버."

민지가 옆자리 남학생을 소개했다. 올리버는 수수한 천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자세와 말투에서 묘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힙스에서 왔다고?" 올리버가 물었다. "어쩐지 폐션이 액션걸 같더라니. 거기 정말 모든 것이 인공적이래? 진짜 나무 한 번 못 본다면서?"

"그건 좀 과장이야." 서연이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우리도 식물원이 있어. 인공 생태계지만..."

"미안, 실례였어." 올리버가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다른 문화에 관심이 많거든."

서연은 올리버의 사과에 놀랐다. 힙스에서는 사과가 약점의 표시였다. 하지만 그의 사과는 오히려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때 민지가 천진하게 물었다. "힙스 출신들은 CAS 점수가 높다던데, 넌 얼마야?"

"9.7점!" 서연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힙스에서 최상위였다.

민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와, 예술가 수준이네!" 주변에서 "쟤 9.7이래"라며 소곤거림이 퍼졌다.

"아니, 교양 점수일 뿐이야." 서연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뭐?" 민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CAS는 예술 투자 지표인데?"

올리버가 끼어들었다. "예술가들은 그게 교양인가보지. 정말 예술혼이구나."


서연은 멍해졌다. 높은 점수는 예술 잠재력이었다.

그녀는 점수를 위해 행사만 뛰었을 뿐, 진짜 재능은 없었다.

'그럼 내가 쌓아온 건...'

"그 점수면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야." 민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난... 점수를 위해 활동한 거지, 재능은..." 서연이 더듬거렸다.

"겸손하잖아? 역시 힙스 애들은 다르네!" 올리버가 농담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III.


서연의 마음속에 혼란이 일었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CAS 점수가 사실은 예술적 재능 지표라니. 숨이 막혔다. 힙스에서는 미술관 방문, 자선행사 참여, 문화 이벤트 인증 등으로 점수를 쌓았다. 그것이 '상류층처럼 보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은... 가짜였나?'


식당의 웅장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서연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이질감과 매력을 동시에 느꼈다. 힙스에서 그토록 동경했던 궁정구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서연은 번쩍이는 힙스 스타일 옷 때문에 쏠린 시선에 지쳤다. 식당의 따뜻한 조명 아래서도 그녀의 홀로그램 장식이 반짝이며 어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학생들은 차림을 보자마자 힙스인걸 알아봤다. 이 멋진 패션이 촌동네같이 차려입은 애들에게 구경꺼리가 되는 것이 참담했지만 시선에 저항할 생각도 안들었다.

'나도 저런 촌스러운 옷이나 사야겠네'라며 민지에게 물었다.


"민지, 너 셔츠 어디서 샀어? 나도 비슷하게 입고 싶네."

민지가 활짝 웃었다. "아, 내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어? 진짜 기쁘다! 디자이너 실키샬럿에게 연락하면 돼. 나도 널 소개해놓을게." 그녀는 연락처 코드를 건넸다. 손끝에서 살짝 떨리는 그녀의 천진함이 묘하게 거슬렸다.

서연은 민지의 한낮 꽃밭같이 밝은 표정과 디자이너란 말이 수상해 또 당황할까 봐 미리 서둘러 검색했다.


놀랄 것 없이 놀랐다. 힙스 유명 쇼핑몰에서 실키샬럿의 셔츠 하나가 1천만에서 3천만 크레딧이었다.

"뭐야 이게? 천연 목면? 실크?" 화면을 몇 번 확인하며 눈을 비볐다. 힙스의 유명 백화점 '메오' 가격이 틀림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날 놀리려는 건가?'


그녀의 디자이너 셔츠 350만 크레딧도 서민구에선 꿈도 못 꿀 가격인데, 저 외곽지대 농부 코스프레 같은 옷이 이렇게 비쌀 수가? 미친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가격의 물건이 있다는 것을 모르던건 아니지만 그건 어떤 도시전설급의 세상 어딘가 있을 극한의 허영의 상징일뿐 그걸 진짜로 걸치고 다니는 무리들 속에 들어올줄은 몰랐던 것이다.

서연은 망연자실해졌다. 그녀는 힙스의 역전된 가치관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다. 여기서는 천연이 인공보다 귀했다. 그게 진정한 사치였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역설적으로 자연이 희소해진 세상.


'첨단 기술의 물결이 오히려 태고의 자연으로 회귀하게 만든 아이러니.'


서연은 이 역설에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가 입고 있는 350만 크레딧짜리 명품 홀로그래픽 셔츠는 이곳에서 오히려 저렴한 대량생산품에 불과했다. 정작 민지가 입은 '촌스러운' 옷은 예술품이자 사치품이었다.

민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붙였다. "아, 실키샬럿은 우리 할머니가 학생일 때부터 후원한 디자이너거든! 내가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부탁할게. 내 것만큼 예쁘게 해줄 거야."


"특별히? 대체 어디가?" 서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옷은 아무리 봐도 저마다 개성 넘치는 농부 옷 마냥 그게 그거 같았다. 민지의 무심한 천진함이 점점 더 알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IV.


며칠 후, 도서관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은 석양에 물들어 붉은빛을 뿌렸고,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학생들이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이 비쳤다. 서연은 혼란스러웠다. 힙스의 교양이 허상이라니.

오백 년 된 책들이 꽂힌 서가를 둘러보며 서연은 생각에 잠겼다. 이 책들은 단순한 종이와 가죽이 아니라 시간의 증인들이었다. 그녀는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페이지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고, 손때 묻은 흔적이 세월을 말해주었다.


'힙스같지 않은 이 진짜 느낌...'

서연은 자신이 힙스를 배신하는 생각을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 깨달음이 일종의 해방감을 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민지와 올리버가 다가왔다.

"호올네트 사우스필드타운 대사국 연합통치 연구 프로젝트 준비 중인데, 같이할래?" 올리버가 용케 발음도 또박또박 길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면서도 자신감이 묻어났다.


"나... 그런 건 해본 적 없어." 서연이 망설였다. 자신이 지금 속한 세계와 떠나온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리도 처음이야." 민지가 웃었다. "네 관점이 우리 과제를 풍부하게 할 거야. 알다시피 우리는 중산층 사정은 잘 모르거든. 근데 그들을 이해해야 우리가 가진 걸 제대로 나눌 수 있지." 그녀의 악의 없는 말이 서연의 속을 살짝 긁었다.

"거긴 중산층이 아냐. 대체로 서민구와 노마드 지역이지." 서연은 이런 지식들은 달달 외우고 있었다.

"와! 거봐. 이웃이라 그런가? 역시 잘 안다니까. 같이 하자. 응?"


"서민구와 이웃이라는 말에 빈정상해 거절하려는 차에 서연의 개인 통신 메시지가 울렸다. '어머니'였다.

"잘 지내지? 인맥 잘 만들어야 해. 중요한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집중해!" 어머니의 조급한 목소리엔 힙스의 허세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서연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 기억이 스쳤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랑스럽게 들고 왔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


"그림이 뭐가 중요해? CAS 점수 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그때는 왜 어머니가 그토록 CAS에 집착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야 알겠다. 어머니도 힙스의 시스템에 갇힌 희생자였다.

며칠 사이 궁정구의 무심한 분위기가 전염이라도 된 듯, 어머니 메시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서연은 결심했다.

"참여할게. 도울 수 있으면."


올리버와 민지가 기뻐했다. 그들은 서연의 손을 잡고 오래된 도서관의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작은 회의실이 있었고, 대형 종이 지도와 필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우린 디지털도 쓰지만, 중요한 기획은 아날로그로 해." 올리버가 설명했다. "손으로 쓰는 게 생각을 더 깊게 만들어."

서연은 미소 지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맞는 것 같았다.

'저건 또 얼마일까?'라는 생각은 너무 힙스같아서 접어두기로 했다.


어느날 프로젝트 회의에서 올리버가 말했다.

"실험비로 이 계좌에 보내. 지역 주민들 지원에 쓸 거야."

"얼마나?" 서연이 물었다.

"뭐, 부담 없으면 좋을 만큼? 얼마 안 되더라구. 0.5 정도?" 올리버가 무심히 답했다.

민지가 덧붙였다. "돈이 크게 들진 않아. 너도 네 실험구역이 있어야 할테니까. 서연이 네말대로 노마드는 인당 생활지원비가 정말로 헐값이더라구. 나 정말 놀랬어. 자연인들은 그렇게 자유롭게 사는구나."


이들에게 '얼마 안 되는' 0.5가 5천만 크레딧이라는 것을 알고 서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힙스에서도 그건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돈에 대해 말하는 태도였다. 마치 숫자에 불과하다는 듯한.

서연은 고민했다. 힙스에선 기부하면 인증서라도 받고 공제라도 받았지만, 여긴 달랐다. 그냥 과제값이라니... 무슨 과제가 시골재생사업급이다.

결국 5천만 크레딧을 보냈다. 그녀 용돈 반년치였다. 이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서연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가면을 벗은 것 같은.


짐작했던대로 곧바로 아버지의 콜이 울렸다.

"아니! 학생이 무슨 그런 큰돈을 쓴 거야? 얼른 취소해!"

"프로젝트 비용이에요. 여기선 기본이에요." 서연이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문화부 장관 조카와 친해졌어요. 주말에 초대받았고요."


침묵 후 아버지의 목소리가 급격히 밝아졌다.

"대단하구나! 더 필요하면 말하렴. 내가 준비할게. 어마어마한 아빠 신용점수 알지? 거기서 기죽지 말고! 이야기가 잘 되면 세금 감면도 슬쩍 물어보고, 요령껏 해봐. 알지? 우리 딸이 드디어 대를 이어 사회적 성공을 이뤄내는구나!"

서연은 피식 웃었다. '힙스 힙스...' 아버지의 멘트에 절여있는 힙스향 가득한 힙스의 얄팍한 계산이 공허하게 들렸다.


아버지에게 느낀 힙스향이 서연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의 경험은 그들의 헌신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서연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연은 자신이 지금 단순히 또 다른 환상—궁정구의 환상—에 빠져드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민지와 올리버 같은 이들도 결국 특권층이었다. 그들의 무심한 후원이 정말 순수한 것일까?

서연은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점점 더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VI.


주말, 기숙사 방 안은 어스름에 잠겨 있었다. 서연은 민지 가족의 저녁식사 초대에 응하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힙스에서 온 화려한 드레스가 홀로그램 불빛을 반사하며 눈을 찔렀다. 이제 촌스러워 보이는 그 옷들을 밀어두고 실키샬럿에게 주문했던 바지와 셔츠와 옷가지를 꺼냈다.


"1천만 크레딧, 1천만 크레딧... 도합 3천만을 몸에 걸치다니. 벌써 헤진 자국이 보이는데? 더 사야 하나?"

손끝으로 천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재생력도 오염방지도 없는 이 천연 옷감이라는 것은 정말 실용성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힙스 최신 기능과 디자인의 시그니처 드레스를 바라보았지만 도저히 그걸 입을 수는 없었다.


서연의 마음속에 과거와 현재가 충돌했다. 한편으로는 익숙한 힙스의 화려함이 그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궁정구의 소박한 천연성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갈등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었다.

'내가 누구지?'

거울 앞에 서서 서연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힙스의 가식적인 웃음도, 궁정구의 무심한 여유로움도 아닌 그냥 서연의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지네 집 모임은 따뜻한 불빛이 감도는 거실에서 열렸다.

오래된 목재 바닥이 발밑에서 삐걱거렸고, 창밖으론 밤하늘이 별을 뿌렸다. 문화부 장관은 '민지 삼촌'으로 소개되었다. "편하게 있어"라며 그는 민지와 서연을 번갈아 보며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과제로 지역 개발이라, 흥미롭네. 구체적으로 뭘 하나?"

"지역 자원을 활용한 지속 가능 모델을 연구해요." 서연이 대답했다. 목소리에 살짝 떨림이 묻어났다.

"좋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민지가 네 CAS가 높다던데, 9.7이라고. 그런 점수면 벌써 다섯 군데서쯤 스카우트 제안 들어왔어야 하는데."

"힙스에선 교양 점수로 배웠는데, 이제야 진짜 의미를 알았어요."

"그 점수는 그냥 숫자가 아니야. 재능으로 세상에 뭔가를 돌려줄 수 있다는 거지.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민지가 끼어들었다.

그가 웃었다. "맞아. 관심 있으면 갤러리 소개해줄게. 네 점수면 후원자가 줄을 설 거다."

"고맙지만, 아직은..." 서연이 머뭇거렸다.

"서두를 필요 없어. 언제든 이야기하렴."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묘한 무게가 있었다.


저녁 식사 중에 서연은 민지 가족의 대화를 관찰했다. 그들은 세상사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했지만, 어떤 주제도 힙스식의 과시나 경쟁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서연이 특히 놀란 것은 그들이 정치와 경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였다.

"세금 구조가 노마드족에게 불리해." 장관이 말했다. "그들은 고정 주소가 없어서 기본 혜택도 못 받고."

"그래서 우리 연구가 중요해요." 민지가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동식 지역사회에 맞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해요."


서연은 그들의 대화에 점점 빠져들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단순히 부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의미 있게 사용할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힙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종류의 책임감이었다.

'진정한 교양...'


식사를 마친 후, 민지가 서연을 정원으로 이끌었다. 달빛 아래 켜진 작은 조명들이 오래된 나무들을 비추고 있었다. 공기는 신선했고, 풀과 꽃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여기 정원은 우리 증조할머니 때부터 있었대." 민지가 말했다. "할머니는 여기서 식물 연구를 하셨고."

"정말 아름다워." 서연이 감탄했다. "힙스에는 이런 게 없어."

"그래서 네가 여기 있는 거 아니겠어?" 민지가 따뜻하게 웃었다. "서로에게 없는 것을 배우는 거지."


서연은 민지의 말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없는 것을 찾아 이곳에 왔고, 민지와 그녀의 친구들은 서연에게서 힙스의 지식을 배우고 있었다.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할 수 있었다.


"너희 옷, 집, 생활 방식... 모든 게 너무 비싸고 고급인데, 그걸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 서연이 문득 물었다.

민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글쎄, 우리는 이게 그냥... 평범한 거라고 생각해왔어. 사실 가격표를 본 적도 없는 것 같아. 내가 입는 옷이 특별히 비싸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런 감각이... 부럽다." 서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잘난체 하는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부러워할 건 없어." 민지가 미소 지었다. "우리도 네가 부럽거든. 넌 두 세계를 모두 경험했잖아. 이제 네가 정말 원하는 건 뭔지 선택할 수 있어."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가짜 상류층 흉내내기와 진짜 상류층의 무심함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VII.


몇 달 후, 서연은 힙스로 돌아가 특별 강연을 했다. 주제는 "진정한 교양이란 무엇인가"였다. 궁정구의 학생인 서연에게 힙스시절의 스승이 간곡히 부탁한 결과였다.

강당을 가득 메워 앉은 힙스의 우수한 학생들은 화려한 홀로그래픽 의상과 최신형 액세서리로 치장하고 있었다. 서연이 무대에 올랐을 때, 그들은 서연의 소박한 천연 의복을 보고 수군거렸다.


서연은 말없이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한 줌의 흙과 작은 씨앗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씨앗을 흙에 심고 물을 주었다.

"이 씨앗이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기술도 이 과정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어요."

서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강당 전체에 울렸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도 당신의 기부 내역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정말 중요한 건 당신이 얼마나 기부하는지가 아니라, 왜 기부하는지입니다."


서연은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나누었다. 궁정구서 처음 느낀 당혹감, CAS 점수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충격, 그리고 진정한 교양이 무엇인지 깨달은 과정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흉내내려 노력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런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아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면의 가치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강연이 끝나고, 서연의 부모님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서연아, 네가 거기서 배운 게 그런 것들이니?" 어머니가 물었다.

서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네,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어요.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제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렸어요."

"....?"

아버지가 걱정스런 눈썹으로 기다렸다.

"CAS 점수 때문에 아트 인베스트먼트와 계약하기로 했어요. 예술가의 길을 가보려고요."

"뭐라고?! 예술가? 더 길거리에 널린 것들 말이니?" 부모님이 동시에 외쳤다.


"걱정 마세요," 서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문화부 장관님께서 제 첫 전시회에 방문하시기로 했어요. 그리고 수익금은 전액 소외 지역 교육 지원에 기부할 거예요."

부모님의 얼굴에는 혼란과 기대가 교차했다. '문화부 장관'이라는 단어에 안심한 듯했지만, '전액 기부'라는 말에 당혹스러워했다.

서연은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이제 두 세계를 모두 이해했다. 부모님이 갈망하던 상류층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돈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 이거 장관님께 받은 명함이에요." 서연이 부모님에게 건넸다.

부모님은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듯 조심스럽게 쥐고 명함을 바라보았다.

" 아, 궁정구는 이런걸 쓴다고했지? 기능도 없고, 정말 이름만 적혀있네. 너무 소박하다. 얘. 교양있네. 나도 이런걸 써볼까?"

서연이 미소지었다. 교양있게.


"그럼 저는 이만 새 작품 구상하러 가볼게요." 서연이 말했다.

"장관님께서 언제든 작업실에 들르시겠다고 하셨거든요."

부모님의 얼굴에 드리운 복잡한 표정을 뒤로하고, 서연은 자신만의 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그녀는 더 이상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다음 작품은 그녀가 경험한 두 세계의 모순과 조화를 표현할 것이다.

서연은 붓을 들어 캔버스에 첫 획을 그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대담한 선이었다. 마치 그녀의 삶처럼.


끝.

DALL·E 2025-02-27 21.18.56 - An abstract painting with rich mise-en-scène, symbolizing the contrast between two worlds_ one side representing a neon-lit cyberpunk metropolis with .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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