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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WK단편선 39>리버힐편. 광산의 신내림

by 김동은WhtDrgon

진우는 굿플래그 광산의 먼지 속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다—3층 광맥에서 캐낸 신단석을 분류하고, 닦고, 옮기는 작업. 그는 잡부였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달랐다. 신단석을 만질 때면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울림이 그의 손끝으로 전해졌다.


"진우, 특이한 것이 들어왔다." 감독관 오석이 불렀다. "이것 좀 보게."

작업대 위에 놓인 신단석은 그가 본 어떤 것보다 특별했다. 짙은 푸른빛이 배어든 표면엔 결계문자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무늬는 시선을 붙잡지 않고 끊임없이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3층 광맥 최하단부에서 나왔네. 허가 구역 바깥이야." 오석이 말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한 걸 보니 네가 한번 닦아보게."

진우는 신단석을 받아들고 작업실 구석으로 갔다. 신단석을 만지는 순간, 이상한 전율이 그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른 천을 집어들었다. 표면의 흙을 닦아내자 무늬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의 시선이 무늬를 따라갔다.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패턴이었다. 진우는 무의식적으로 작업대 위에 놓인 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무늬의 흐름을 따라 신단석 표면을 가로질렀다.


검은 연기가 미세한 실처럼 피어올랐다가 허공에서 흐트러졌다. 진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손을 멈췄다. 그는 신호조각사가 아니었다. 단지 광산의 잡부에 불과했다. 신호를 조각할 권리는 신내림을 받은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끌은 신단석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진우는 숨을 멈추고 손끝에 모든 감각을 쏟았다. 단 한 번의 실수도 경계의 붕괴를 의미했다.


"이건..." 진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뭐하는 거지?" 오석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런, 네가 신단석을 건드렸어?"

진우는 끌을 내려놓으며 숨을 내뱉었다. 땀이 눈을 찔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오석은 진우가 손댄 신단석을 살펴봤다. 그의 눈빛에 묘한 그림자가 스쳤다.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다시 오도록."


그날 밤, 진우는 꿈에 빠졌다. 나선형 계단이 어둠을 향해 끝없이 이어졌다. 발밑의 돌은 차갑고 축축했으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시간의 흐름이 흐려진 끝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문틈으로 낮고 깊은 울림이 새어 나왔다—심장의 고동인지, 고대 종의 메아리인지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리자 어둠이 그를 삼켰다. 형체가 떠올랐다. 호랑이를 닮았으나, 눈 대신 별무리가 응축된 어둠이 자리했고, 몸은 흐릿한 윤곽만 남아 현실의 경계를 흔들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공간이 물결처럼 밀려났다.


"너는 나를 부르고 있구나."

목소리는 귀로 들리지 않았다. 의식 깊은 곳을 파고드는 원초적인 울림이었다. 진우는 자신의 존재가 그 앞에서 투명해지는 듯했다.

"누구세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청호라 불러." 별빛 눈이 그를 꿰뚫었다. "흥미로운 영혼이군."

진우는 땀에 젖어 깨어났다. 적룡, 청호, 첨작, 백무의 그 청호. 신사쪽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동백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그 유명한 신수. 심장이 공포와 경외감 사이에서 방황했다. 창밖으로 굿플래그 광산의 불빛이 깜빡였다—24시간 뛰는 강철 심장이었다.


작업실로 돌아간 순간, 신단석에 손을 댄 그의 손끝이 찔리듯 떨렸다. 어제 자신이 조각하기 시작한 패턴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다시 끌을 들었다. 이번에는 더 확신에 차서.

끌이 표면을 파자 푸른 섬광이 터졌다. 신단 중심석의 완성. 일명 코어. 신호조각사를 꿈꿔본 진우는 이 장면을 알고 있다. 신호조각사들의 가장 화려한 순간의 춤.


섬광이 천천히 느려졌고, 현실과 섬광 너머의 시야가 갈라지며 두 세계가 겹쳤다. 하나는 손때 묻은 작업실, 다른 하나는 검은 안개가 뒤덮인 풍경이었다. 흑공—그것이 현실의 틈새를 파고들며 광산 깊은 곳으로 소용돌이쳤다.

"이건…" 진우의 숨이 멎었다. 진우는 누구의 가르침도 필요없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스스로 명백히 이해했다.


그는 오석을 찾아갔다. "3층 광맥 아래에 흑공이 모여요. 제가 봤습니다."

오석이 눈을 치켜뜨더니 피식 웃었다. "신맥동 필러들도 못 잡는 걸 네가 봤다고? 피곤한가 보군, 쉬어."

"정말입니다!" 진우가 외쳤지만, 오석은 등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온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흑공을 육안으로 감지한다는 건 터무니없었다. 그러나 그 검은 안개는 환각이 아니었다—그것은 그의 뼈까지 파고드는 위협이었다. 창밖에서 푸른 빛이 일렁였다. 달빛도, 광산 불빛도 아닌 이질적인 빛이었다. 온도가 급락하며 유리창에 서리가 맺혔다. 숨결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돌아봐."

목소리가 의식을 찔렀다. 진우가 돌아섰을 때, 방 한가운데 청호가 서 있었다. 꿈속의 존재였다. 흐릿한 호랑이 형상, 별빛 눈, 다섯 갈래 그림자가 벽을 뒤덮었다. 현실이 그의 윤곽을 따라 얇게 찢어지며, 틈새로 불가해한 색채가 스며들었다.


"청호?" 진우가 떨었다.

"그렇다." 청호의 고개 끄덕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듯했다. "네 꿈이 나를 불렀다. 너는 특별하구나—이미 흑공을 보는 눈을 얻었어."

"광산 아래에..." 진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공포 속에서도 이상하게 친밀감이 일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존재를 다시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곧 분출이 일어난다." 청호가 다가왔다. 공기가 진동하며 중력이 뒤틀렸다. 책상 위 연필이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나는 이곳을 지나던 중 네 흔적을 감지했다. 네 손끝에서 신기가 흘러 나와 나를 불렀다."


청호의 목소리에는 수천 년의 기억이 압축되어 있는 듯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시간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당신은... 그 청호가 맞나요? 저를 찾아온게 맞아요?"

청호의 별빛 눈이 깊어졌다. "나는 너를 찾았다. 네 손은 이미 신호를 새기고 있었어."

"하지만 저는 일개 잡부입니다...."

"네 눈앞에 신이 서 있다." 청호의 목소리에 미소가 실렸다.


청호의 별빛 눈이 진우를 꿰뚫었다. 의식이 무너지며 그는 우주로 내던져졌다. 별들 사이에서 성운이 그를 내려다봤다—청호의 본질이었다. 은하 소용돌이로 된 줄무늬, 별무리로 응축된 눈, 시간과 공간이 그를 중심으로 굽어졌다. 진우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나다."

청호의 목소리에 별들이 진우에게 쏟아져 내렸다. "너에게 나의 각인을 새기겠다."

진우는 별들을 온몸에 받아 크게 요동치며 깨어났다.


현실로 돌아왔지만 침대 주변에서는 기호들이 허공에 떠돌며 형상을 그리고 있었다. 형상들이 가슴에 닿자 종소리가 몸속에서 울렸다. 내면이 펼쳐지며 빛이 스며들었다. 시야가 열리자, 침대의 줄기들이 창 밖 멀리 땅속까지 이어지는 푸른 신맥이 보였다—맥동하는 생명의 줄기였다.


"신맥…" 진우가 속삭였다.

"흑공을 막으려면 신맥을 끌어당겨라." 청호가 말했었다.


청호의 그림자가 그를 이끌었다. 밤의 광산 속, 3층 광맥 최하단부로 내려갔다. 하강할수록 흑공이 진득하게 공기를 채웠다. 진우는 신단석에 끌을 대고 패턴을 새겼다. 이번에는 그의 손끝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각 선, 각 곡선은 그가 그어낸 문장이었다—현실을 재정의하는 차원의 언어였다.

손끝에서 빛이 번쩍이며 선들이 차원을 잇는 다리를 그렸다. 진우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 깨달았다. 그가 신단석에 새긴 각 무늬는 우주의 섭리를 담고 있었다.


최하층 벽 너머로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진우가 신단석을 벽에 대자 푸른 빛이 폭발하듯 퍼졌다. 땅속으로 뻗은 빛이 신맥을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얹고 흐름을 잡았다. 가슴의 각인이 맥동하며 의지를 불어넣었다.

신맥이 저항했지만, 그의 손끝 아래 굽어졌다. 푸른 줄기가 검은 안개와 맞닿자 안개가 흐려졌다. 두 기운이 얽히며 공기가 진동했다. 진우는 그 순간 깨달았다—흑공과 신맥은 서로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두 세력,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


진우의 몸이 떨렸고, 땀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숨이 찢어질 듯했지만, 그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범의 각인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그것은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차원의 수호자가 대대로 이어받아 온 계약의 상징이었다.

흑공이 흩어지자 벽이 투명해지듯 맑아졌다. 진우는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숨소리가 거칠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워졌다—세계의 경계를 깨우친 자의 눈이었다.


청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차원의 비밀은 깊다, 어린 조각사여. 너는 이제 그 문턱에 섰다."


우르르 몰려온 야간조들이 진우를 발견하곤 외쳤다.

. "흑공분출을 진짜 막았어. 네가 아니었다면 광산은 무너졌을거야."

그의 손에는 어젯밤 완성한 신단석이 들려 있었다. 오석이 그를 보자마자 다가왔다.

"측정기가 흑공 반응을 강하게 잡았다가 갑자기 사라졌어. 이상한 일이..." 오석의 말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진우의 손에 든 신단석으로 향했다. "이게 뭐지?"

진우는 조각된 신단석을 내밀었다. 그 표면에는 복잡한 패턴이 완벽하게 새겨져 있었다. 생명력이 흐르는 듯한 무늬였다.

오석의 눈이 커졌다. "이건... 네가 조각한 거냐?"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석의 표정이 변했다. 놀라움과 당혹감, 그리고 묘한 존중이 뒤섞였다. "이런... 이제 너에게 존댓말을 써야겠구나. 신호조각사님." 그의 목소리에 어정쩡한 감탄이 묻어났다. "대단하다! 어쩌면 좋아..."


진우는 그제야 자신의 변화를 실감했다. 그는 더 이상 광산의 잡부가 아니었다. 가슴의 각인이 미세하게 울렸다. 오석이 물러선 후, 진우는 신단석을 들어올렸다 이 최초의 코어는 이 광산의 심장이 될 것이다.


평생 들어온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신호조각사는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는 말.

그때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네가 나의 신이 되어준 거구나."


진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신단석이 푸르게 빛났다.

그것은 아직 가려진 수많은 문들을 향한 첫 번째 열쇠였다.

세계는 그의 눈앞에 진실의 베일을 벗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것을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DALL·E 2025-03-01 00.58.51 - A deep underground mining chamber filled with eerie blue light. In the center, a mysterious glowing stone (Shindan-seok) with intricate patterns rests.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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