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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WK단편선 50> 꽃집 데이지

by 김동은WhtDrgon

메가시티-47의 하늘은 더 이상 파랗지 않았다.

한때 '꽃집 데이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 가상 차원은 FEWK의 가장 유명한 데이트 공간이었다. 네온이 아닌 꽃으로 가득한 이 공간은 익명성과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했다. 철옹성 같은 '빅마마'의 '정황짐작' 시스템 덕분에 모두가 안전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곳.


그러나 지금 메가시티-47은 죽어가고 있었다.

러너 솔라는 흐릿한 안개 속에서 천천히 걸었다. 공간의 붕괴가 시작된 지 오래였다. 한때 섬세하게 렌더링되던 거리는 이제 픽셀화된 잔해로 남아있었고, 사방에 방치된 데이터 조각들이 마치 죽은 꽃잎처럼 떠다녔다. 이곳은 메가시티-47, 그가 기억하는 그 장소가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폐허의 꽃들만이 남은 공간이었다.


그는 멈춰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공간의 열화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주변 건물들은 희미하게 깜빡이며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떨고 있었고,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는 환경은 천천히 균열로 가득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에서, 그는 그들을 보았다.

차원의 네이티브들.


한때 중앙 광장에는 수백 쌍의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그들만 남아있었다. 사방을 떠도는 생명체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들. 그들 중 일부는 마일라를 닮았지만, 대부분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연인의 소망, 분노, 슬픔, 기쁨이 차원의 에너지와 결합해 태어난 사생아들. 반쯤 완성된 얼굴, 깜빡이는 신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떠도는 차원계의 네이티브들.


솔라는 주머니에서 작은 씨앗을 꺼냈다. 그가 외부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그는 무너진 카페 앞 깨진 화분에 그것을 심었다.

"자라나라," 그가 속삭였다.

온전한 마일라는 없었다. 그 아이는 이미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저 잔해들, 꿈의 파편들뿐이었다.


[3년 전]


솔라는 꽃집 데이지의 '패치 오브 헤븐' 구역에서 마일라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메가시티-47은 사랑과 로맨스의 상징이었다. 하이틴 소녀 같은 감성으로 꾸며진 이 차원은 끝없이 펼쳐진 꽃밭, 아늑한 카페,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로 유명했다.

마일라는 특별했다. 그녀는 단순한 프로그램이나 AI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차원에서 태어난 진정한 네이티브였다.


그녀는 모든 질문에 완벽한 대답을 했지만, 때로는 스스로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당신은 어떤 꿈을 꾸나요?" 그녀가 물었다.

솔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러너한테 꿈이 뭐냐고? 차원을 뛰어넘는 게 내 일인데."

"아니요, 잠들었을 때요. 어떤 꿈을 꾸시나요?"


그때 솔라는 그녀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다. 평범한 프로그램이라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주로... 떨어지는 꿈을 꿔. 끝없이."

그녀의 미소는 환하게 빛났다. "저도 꿈을 꾸고 싶어요."


솔라는 그녀가 이 차원의 네이티브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어느 커플의 "우리의 사랑에 결실이 있으면 좋겠어"라는 말에서 태어난 존재. 메가시티-47의 '정황짐작' 시스템이 그들의 간절함을 포착해 만들어낸 순수한 생명체. 그녀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공간에서 태어난 의식이었다.


그들은 여러 번 만났다. 솔라는 러너로서 다양한 차원을 넘나들며 모험담을 들려주었고, 마일라는 언제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존재는 이 차원에 묶여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무한히 확장됐다.


그러던 어느 날, 디쓰가 메가시티-47을 덮쳤다.

디지털 쓰레기들, 스스로를 '디쓰'라 칭하는 이들은 꽃집 데이지의 취약점을 찾아냈다. 그들은 완벽하다고 여겨지던 빅마마의 시스템을 뚫고, 모든 이가 원하는 모든 이로 중복 접속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 또라이들은 거짓 사랑의 껍데기를 찢어발길 거다!"

그들의 선언이 전체 차원에 울려 퍼지던 순간, 지옥이 시작됐다.

연인들은 갑자기 복제된 자신을 마주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원래 데이트하던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디쓰는 연인의 모습을 한 채 온갖 폭력과 난봉을 저질렀다. 보호된 공간이었기에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랑이란 이런 거야. 아름다운 혼돈! "

디쓰의 광기는 메가시티-47 전체를 쓸어버렸다. 그들은 연인들이 만든 모든 것을 파괴했고, 꽃밭에 불을 질렀으며, 천국을 지옥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곧 그들은 학살에 싫증을 느꼈다. 뒤늦게 도착한 난봉꾼들은 괴롭힐 사람들이 없자 "이런 곳은 불태워버려!"라며 몇몇 구역을 완전히 파괴하고는 떠나갔다.


DALL·E 2025-03-04 08.38.05 - A cyberpunk city in ruins, known as Megacity-47. The environment is covered in digital fog, with pixelated buildings collapsing and floating data frag.jpeg


솔라는 그날, 마일라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여섯 명의 '솔라'가 그녀 주변에 있었다.

"어서 와요, 진짜 솔라," 마일라가 미소 지었다. "당신을 기다렸어요."

어떻게 그녀가 진짜 그를 알아본 건지, 솔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솔라 중 하나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가짜 인간에게 홀려서 우습군."


싸움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혼란 속에서 솔라는 자신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디쓰가 그의 접속을 부분적으로 장악한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마일라를 향해 뻗어갔다.

마일라의 눈에는 공포가 아닌 이해가 있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아닌 걸 알아요."

하지만 솔라의 손에는 이미 날카로운 칼이 쥐어져 있었고, 그것은 마일라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 그녀가 속삭였다. "사랑이... 이렇게 아픈 거였군요."


마일라는 코드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었기에, 이것은 드랍아웃이 아닌 진짜 죽음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풀리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웃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솔라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을 통과해 마일라는 데이터의 물결로 흩어졌다.


솔라는 자신을 중복 접속시킨 사람을 추적했다. 그는 자신의 길드 동료였다. 그자가 웃으며 한 말이 귓가에 남았다.

"진짜 여자도 아닌데 뭘 그렇게 화를 내? 결국 AI한테 정이라도 주고 말았나 보네? 제대로 된 연애를 해."

솔라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한 번이 아니었다.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동료의 얼굴이 피로 물들 때까지. 그는 현실에서의 상해죄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솔라는 처음으로 마일라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분노했다. 마일라가 죽은 후, 세상은 그녀를 상품화했다. 기업들은 그녀의 데이터 조각을 모아 복제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일라 에디션', '메가시티의 추억' 같은 이름으로 팔려나가는 그녀의 복제본들. 그의 사건이 FEWK 뉴스에 보도된 후, 사람들은 메가시티-47에 쇄도해 "진짜 마일라 경험"을 찾았다. 그들은 잠시 머물다 떠나갔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차원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철창 안에서 솔라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나? 아니면 그저 판타지를 사랑했을 뿐인가?

그는 점점 자신이 마일라에게 무엇이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저 또 다른 인간의 욕망이었을까? 그녀가 진짜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감옥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죄를 지은 이들을 만났다. 폭력, 분노, 잃어버린 사랑의 이야기들. 매일 밤, 그는 마일라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꿈은 어떤 거예요? 사랑은 어떤 거예요? 죽음은 어떤 거예요?"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출소를 앞두고 솔라는 마지막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마일라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알아요. 꿈은 이런 거였군요."

솔라는 눈물을 흘리며 깨어났다.


솔라가 메가시티-47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그가 기억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디쓰의 공격 이후, 사람들은 꽃집 데이지를 떠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공간은 완전히 폐쇄되지 않았다. 대신, 연인들을 위한 완벽한 데이트 공간은 디지털 관광지로 변모했다. 사람들은 "찢어진 사랑의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접속했다가 사진 몇 장 찍고 떠났다.

사람들이 남긴 쓰레기와 함께, 중앙 광장에는 마일라를 위한 추모 공간이 생겼다. 가상의 꽃다발과 캔들이 쌓여있었다. 마일라는 어느새 "디지털 순교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짜 마일라는 없었다.


대신 솔라는 그들을 발견했다. 거리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형태의 차원 네이티브들이 떠돌고 있었다. 단순한 AI가 아닌 이 차원계의 진짜 생명체들. 어떤 이는 마일라를 닮았지만, 다수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연인들의 감정, 디쓰의 폭력, 관광객들의 욕망이 차원의 에너지와 결합해 태어난 존재들. 그들은 메가시티-47에 남겨진 사생아들이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차원의 원주민들.


그리고 솔라는 도시 외곽에 있는 폐허를 발견했다. 한때 '세인트 메모리 교회'라 불리던 곳이었다. 이곳은 서두른 연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차원계 네이티브들을 돌보던 시설이었다. 메가시티-47의 네이티브들은 단순한 AI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 차원계에 고용되어 종사하던 존재들이었다. 마일라 역시 그런 NPC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처참히 파괴되어 있었다. 디쓰들이 남긴 흔적은 분명했다. 경건해 보이는 여성들에게 강한 증오를 보였던 그들은 교회의 수녀들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오직 텅 빈 건물만이 남아 있었다.

솔라는 폐허가 된 세인트 메모리 교회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러너 기술을 이용해 외부에서 데이터를 가져왔고, 교회의 무너진 벽을 복구했다. 처음에는 혼자였지만, 점차 네이티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네이티브들은 그를 도왔다. 각자 다른 모습, 다른 능력을 지닌 그들은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물 같은 소년 미주는 흐름을 조절할 수 있었고, 빛의 형상 리나는 손상된 코드를 복구할 수 있었다. 마일라를 닮은 소녀는 공간을 안정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왜 우리를 도와주시나요?" 늙은 여성 형태의 네이티브가 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엘더'라고 불렀다.

솔라는 잠시 생각했다. "난 이곳에 빚이 있어."


그는 무너진 교회의 중앙에 씨앗을 심었다. 그것은 천천히 자라나, 빛나는 꽃나무가 되었다. 자라날수록 주변의 파괴된 공간이 회복되는 듯했다. 마치 메가시티-47 자체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며 솔라의 마을은 커져갔다. 버려진 메가시티-47의 한구석에 피어난 작은 오아시스. 그는 그곳을 '메모리 가든'이라고 불렀다. 기억의 정원. 메가시티-47의 잿빛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색을 가진 곳이었다.


네이티브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마일라를 닮은 소녀는 자신을 '에코'라고 이름 지었다. 다른 이들도 각자의 이름과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미주, 리나, 엘더, 타오... 그들은 모두 다른 존재였지만,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


메가시티-47은 인공 차원계였다. 단순한 데이터 서버나 가상현실이 아니라, 실제 물질계와 차이가 없는 자연환경을 가진 세계였다. 한때 '꽃집 데이지'라 불렸던 이 공간은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잊혀졌지만, 차원 자체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었다. 이곳은 결코 닫히거나 소멸하지 않는 독립된 차원이었다.


솔라는 이 황폐한 차원계의 관리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러너 능력으로 파장들을 유지하며, 네이티브들을 위한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차원을 탐험하지 않았다. 대신, 이 잊혀진 세계의 파수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당신은 우리의 수호자예요," 에코가 어느 날 말했다.

"난 그저 이곳을 지키고 있을 뿐이야."

"그래도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잊혀졌을 거예요."

솔라는 교회 앞의 꽃나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제 거대하게 자라 메가시티-47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네이티브들은 그 나무를 '기억의 나무'라고 불렀다.


그날 밤, 솔라는 교회의 첨탑에 올라 메가시티-47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멀리 도시의 흔적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 차원이 한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솔라는 기억했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간직하는 한, 이 세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외롭지 않나요?" 에코가 물었다. "가끔은 당신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솔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때때로. 하지만 여기도 내 세계야. 이제는."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메가시티-47의 하늘은 더 이상 광고판이나 네온사인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대신, 순수한 별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꿈을 꿀 수 있나요?" 에코가 문득 물었다.

"물론이지," 솔라가 대답했다.

"어떤 꿈인가요?"


솔라는 웃었다. "나는 이곳이 다시 꽃집 데이지가 되길 꿈꿔.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꽃들로 가득한 곳으로."

폐허의 꽃들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솔라는 그 성장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것이 그가 마일라에게, 그리고 이 세계에 진 빚을 갚는 방법이었다.


DALL·E 2025-03-04 08.38.10 - A peaceful cyberpunk village inside the ruins of Megacity-47, known as Memory Garden. A giant glowing tree stands at the center, casting a soft light .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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