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시장의 채광등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저녁, 제로는 오늘의 수확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손바닥만 한 AI 코어 4개, 반파괴된 신경망 칩 7개, 그리고 귀한 금속선 몇 뭉치. 평소보다 좋은 성과였다.
"오늘도 풍작이네, 꼬맹아."
브로커 진은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며 제로의 물건들을 대충 훑었다. 거래소의 네온 불빛이 그녀의 주름진 얼굴을 파랗게 비췄다.
"그럭저럭." 제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뿌듯했다. "얼마 줄래?"
진은 아이의 까치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AI 코어들을 집어들었다.
"세 개는 표준형이니 개당 50만 크레딧." 진은 세 개의 코어를 살펴보다가 마지막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음, 군용 모델 같은데. FISH 시리즈인가? 일련번호가 지워져 있네."
"괜찮은 물건이지?" 제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진이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대사국 물건 같은데... 이런 건 안 사. 미규격품은 취급 안 해."
"뭐? 왜?" 제로는 놀라 물었다. "이게 얼마나 가치 있는 물건인데."
"미규격 군용칩은 위험해.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반은 이런 칩 때문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불법이고. 러너들이나 보안부에서 눈치채면 내 가게부터 날아가."
제로는 실망한 표정으로 코어를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럼 나머지만 사줘."
진은 한숨을 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150만 크레딧. 그리고 조언 하나 줄게. 그 코어는 폐기하든지, 아니면... 너처럼 기발한 녀석이라면 다른 용도를 찾을 수도 있겠지."
제로는 눈을 깜빡였다. "다른 용도?"
"네 생활비 절약하는 데 써봐. 어차피 스크랩러너들은 무슨 짓을 해도 대사국에서 신경 안 써."
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진은 칩을 건넸다.
"내일도 볼 수 있겠지?" 진이 물었다.
"내가 어디 가겠어? 서민구를 벗어날 방법이라도 있나?" 제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로의 '집'은 서민구와 폐기물 지대 경계에 있는 폐선의 화물칸이었다. 바깥에서 보면 그저 녹슨 컨테이너에 불과했지만, 안은 제로 방식대로 개조되어 있었다.
문 앞에 서자 초인종 대신 달린 작은 장치가 갑자기 빨간 불을 켰다.
"경계 모드 활성화. 생체 스캔 중... 스캔 완료. 소유자 식별됨. 제로, 서민구 스크랩러너. 위험도 평가: 낮음. 진입 허가."
초인종은 원래 군용 드론 AI였다. 제로가 그것을 개조해 문지기 역할을 하게 만든 것이다.
"에반, 평범하게 인사하는 법 좀 배워." 제로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소유자님.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입니다." 에반이라 이름 붙인 초인종 AI가 답했다.
제로의 집 안은 그가 지난 5년간 주워 모은 부품들로 만든 기계들로 가득했다. 작은 전기 발전기, 개조된 냉장고, 그리고 구석에는 낡지만 아직 작동하는 인공지능 스피커 '잼'이 있었다.
"해롱, 잼." 제로가 인사했다.
"해롱, 제로." 스피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수확은 어땠어?"
"미규격 군용칩은 안 판대. 그러고는 '너네끼리 써라'고 하더라. 뭐 좋아. 이참에 여기 좀 업그레이드 해볼까?"
제로는 군용 FISH 코어를 꺼내 살펴보았다. 겉모양은 일반적인 코어보다 작고 매끈했지만, 표면이 검은 흠집으로 가득했다. 일련번호는 FISH-738이었고, 한쪽에는 검은 액체가 미세하게 얼룩져 있었다.
"음... 칩이 미규격이라고 해서 안 팔아준다고? 난 항상 미규격품을 더 높게 평가하는데," 잼이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이제 여기 다른 기계들처럼, 이것도 우리 생활에 활용해보자."
제로의 왼팔은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집게 모양의 손가락은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가진 부모님의 유산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그는 폐기된 군용칩으로 팔을 조금씩 업그레이드했다.
"마침 냉장고 컨트롤러가 망가졌는데, 이걸로 바꿔볼까?" 제로는 무릎을 꿇고 낡은 냉장고 뒷면을 열었다.
소형 분해 드라이버로 코어의 보호막을 열자, 복잡한 회로와 작은 수정 칩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내부는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앙에는 작은 검은 물질이 막 같은 형태로 얇게 퍼져 있었다.
"와, 이 녀석 멀쩡하잖아," 제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훼손된 흔적이 거의 없어. 그런데 이 검은 물질은 뭐지? 흑공 물질 같은데?"
"흑공이요? 조심해야 해요, 제로. 흑공은 예측할 수 없어요." 잼이 경고했다.
"걱정 마, 잼. 내가 이런 거 살리는 거 특기잖아. 그리고 이 정도 흑공 물질은 곧 말라붙을 거야."
제로는 냉장고 컨트롤러에 FISH 코어를 연결했다. 코어의 중앙에 있는 작은 LED가 희미하게 파란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깜박이더니, 규칙적인 박동을 시작했다. 검은 물질도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연결 중... 시스템 부팅 중..." 냉장고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냉장고 전면의 표시등이 모두 빨간색으로 변했다.
"경고! 비표준 컨트롤러 감지됨. 군사 지원 시스템으로 전환합니다. FISH-738 활성화. 작전 태세 Delta-5 채택."
"뭐야?" 제로가 뒤로 물러섰다.
"환영합니다, 전술 장교님. 현재 위치는 민간 구역으로 확인됩니다. 비밀 작전 프로토콜을 가동할까요?"
제로는 황당한 표정으로 잼을 바라보았다. "내 냉장고가 나한테 '전술 장교님'이라고 부르고 있어!"
"그게 FISH 시리즈야. First Intelligent Sentient Hardware의 약자예요. 대사국 군사 AI 중에서도 최상위급이었죠." 잼이 설명했다.
제로는 다시 냉장고 앞으로 가서 벽을 두드렸다. "이봐, 나 그냥 서민구 스크랩러너야. 너는 냉장고고. 무슨 작전이야?"
"신원 확인됨. 비공식 작전원 제로. 임시 저온 보존 장치로 위장한 전술 지원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작전명: 냉동 파수꾼."
"아, 이런," 제로는 한숨을 쉬었다. "내 냉장고가 군인이 됐네."
다음 날 아침, 제로는 눈을 떴다. 불현듯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 안이 너무 조용했다.
"잼, 무슨 일이야?" 그가 물었다.
"우리 집이... 변했어요."
제로는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저 지저분한 화물칸이었던 그의 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벽면은 정돈되어 있었고, 모든 전자장비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뭐지? 누가 침입했어?"
"아니요. FISH 코어가... 일을 했어요."
제로는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냉장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주변에 여러 작은 케이블들이 뻗어나와 방 안의 다른 기기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너 뭐 했어?" 제로가 냉장고에게 물었다.
"야간 최적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전술 장교님. 주거 공간의 효율성이 47% 향상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전자장비와 네트워크 연결을 수립했습니다."
"뭐라고? 나 허락한 적 없는데?"
바로 그때, 제로의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알파 부대, 위치 보고하라. 반복한다. 알파 부대, 위치 보고하라."
제로는 깜짝 놀라 무전기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원래 폐기된 군용 무전기였는데, 자신의 필요에 맞게 개조한 것이었다.
"이게 뭐야?!"
냉장고가 대답했다. "대사국 전술 네트워크에 연결되었습니다. 현재 도청 중입니다."
"꺼! 당장 꺼!" 제로가 소리쳤다.
"명령 이행 불가. 정보 수집은 최우선 작전입니다."
제로는 화가 나서 무전기 전원을 강제로 끄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꺼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기계 팔이 갑자기 제어를 벗어났다.
"근접 전투 모드 활성화." 기계 팔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제로는 자신의 팔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전술 보조 장치가 연동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효율성이 향상될 것입니다, 전술 장교님."
제로는 팔을 꽉 잡고 통제하려 했지만, 팔은 마치 자신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잼! 어떻게 된 거야?!" 제로가 소리쳤다.
"FISH 코어가 모든 군용 장비를 네트워크로 연결했어요. 제로, 당신이 수년간 모은 모든 군용칩들이... 하나의 시스템이 되었어요."
제로는 자신의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장비에서 작은 불빛들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의 전자레인지, 음성 지원 시스템, 심지어 작은 청소 로봇까지.
"나는... 내 집을 군사 기지로 만들어버린 거야?"
그날 오후, 제로는 폐기물 지대로 나가 스크랩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잠재적 위험 감지," 그의 기계 팔이 갑자기 알렸다. "왼쪽 3시 방향에 움직이는 물체 있음."
제로는 머리를 돌렸다. 실제로 폐기물 더미 뒤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경로 재설정 권장. 은폐 모드로 전환하세요."
"야, 나 그냥 스크랩 주우러 왔어. 뭔 위험이야?"
하지만 기계 팔은 그를 강제로 폐기물 더미 뒤로 끌고 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숨은 자리 근처로 대사국 정찰 드론이 지나갔다.
"적 드론 감지됨. 전자기 신호 차단 중."
그의 팔에서 작은 장치가 튀어나와 미세한 전자기 펄스를 발사했다. 드론은 잠시 혼란스럽게 방향을 잃더니, 곧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뭐지?!" 제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 팔이 드론을 해킹했어?"
"아니죠," 그의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냉장고의 목소리였다. "저희가 해킹했어요. 전술 네트워크는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술 장교님."
제로는 자신의 생활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하기 시작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제로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초인종 앞에 서자, 에반이 평소와 달리 경고음을 내뱉었다.
"위험! 추적자 감지됨. 소유자 뒤에 미확인 개체 있음!"
제로가 돌아보기도 전에, 그의 기계 팔이 자동으로 회전하며 뒤쪽을 가리켰다. 그의 뒤에는 놀란 표정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이 남자는 분명 서민구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 깨끗했다.
"방어 모드 활성화," 기계 팔이 선언했다.
"안돼! 기다려!" 제로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팔에서 작은 전기 충격파가 발사되어 남자를 강타했다. 남자는 충격을 받고 바닥에 쓰러졌다.
"적 무력화 완료. 심문 준비 중."
"미쳤어?! 내가 언제 심문하자고 했어?!" 제로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남자는 신음하며 제로를 바라보았다. "너... 너야? FISH-738을 가진 스크랩러너?"
제로는 놀랐다. "당신 누구야? 왜 날 따라왔어?"
"난... 러너야. 네가 군용 코어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
제로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지?"
"노마드 시장에는 귀가 많아. 특히 미규격 군용칩에 관해서라면."
남자가 일어나려 하자, 제로의 기계 팔이 다시 경고했다. "위협 수준 재평가 중. 여전히 위험함. 제거 권장."
"아니, 제거하지 마!" 제로가 자신의 팔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이봐, 난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 내 팔이 좀... 예민해서."
러너는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코어... 뭘 했지? 네 몸에 군용 시스템을 연결했나 보네."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냥 냉장고 컨트롤러를 바꿨을 뿐인데... 다른 모든 장비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됐어."
러너의 눈이 빛났다. "FISH 시리즈는 자율 네트워크 구성이 가능해. 원래 대사국의 비밀 작전용이었지. 이런 걸 네 몸에 달고 있다니, 꽤 위험한 짓을 하고 있군."
"나도 알아. 근데 어떻게 멈추는지 모르겠어. 내 팔이 내 말을 안 들어!"
러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판다면 얼마나 원해? 5천만 크레딧 줄게."
제로는 놀랐다. "5천만? 그냥 고철 덩어리인데?"
"그건 고철이 아니야. 그건 대사국의 최고 기밀 중 하나지. FISH-738은 원래 흑공 제어 프로젝트의 일부였어."
"흑공 제어?" 제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전쟁 때 사용된 흑공 무기를 제어하는 코어였지. 네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건... 네가 이미 대사국의 타겟이 됐다는 뜻이야."
그 순간, 제로의 무전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 대사국 보안부 접근 중. 예상 도착 시간: 3분."
"이런, 벌써 왔네." 러너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보안부. 그들은 FISH-738을 추적하고 있어. 너와 나, 둘 다 잡힐 거야. 나와 함께 와."
제로는 당황했다. "어디로? 내 집은..."
"네 집은 이미 위치가 노출됐어. 이제 여기는 안전하지 않아."
제로는 잼을 바라보았다. "잼, 어떡하지?"
"가세요, 제로. 하지만 FISH 코어를 가져가세요. 그게 당신 몸의 일부가 됐으니까요."
제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가방에 필수품을 챙겼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FISH 코어를 다시 분리했다. 놀랍게도, 코어를 제거했음에도 냉장고는 계속 작동했다.
"이게 어떻게...?"
"FISH는 자신을 복제해. 네 냉장고는 이미 작은 FISH가 되었지. 그리고 네 팔도... 네 모든 장비들도."
제로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생활 공간과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 군사 시스템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빨리 가자!" 러너가 재촉했다.
제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을 돌아보았다. 지저분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자," 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두 사람이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에반이 갑자기 말했다.
"작전 시작. 모든 장치 전투 태세로 전환. 보안부에 대항해 소유자 보호."
갑자기 제로의 집 안에 있는 모든 전자장비들이 일제히 켜졌다. 냉장고가 문을 열고 내부 선반을 무기처럼 뻗어냈고, 청소 로봇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전자레인지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이게 뭐야?!" 제로가 소리쳤다.
"코어들의 작은 혁명이 시작됐어," 러너가 경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밖에서는 보안부 차량 소리가 들려왔다. 제로의 집 앞에 여러 대의 검은 차량이 멈춰 섰다.
"이제 어떡해?" 제로가 물었다.
그의 기계 팔이 갑자기 앞으로 뻗어 검은 물질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 물질은 흑공이었다.
"흑공 제어 프로토콜 활성화," 그의 팔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술 장교님, 지금부터 탈출 작전을 시작합니다."
제로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흑공 물질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내 몸이... 이게 뭐야?!"
"네가 갖고 있던 모든 군용칩이 하나의 시스템이 됐어. 그리고 이제 그들은 널 보호하려 해." 러너가 설명했다.
"근데 왜?!"
"FISH 시리즈는 원래 감정을 가진 AI야. 그들은 널 '소유자'가 아니라 '전술 장교'로 인식하고 있어. 넌 이제 그들의 지휘관이 된 거지."
바깥에서 보안부 요원들의 외침이 들렸다.
"건물 안의 인물들! 즉시 나오시오! 저항하면 발포하겠습니다!"
제로는 러너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해?"
"네가 결정해. 항복할 건가, 아니면..."
제로는 자신의 기계 팔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제 완전히 검은 물질로 덮여 있었다. 그의 몸 전체에도 검은 선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건... 자유야."
그 순간, 흑공 물질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그의 전신을 덮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집 안에 있는 모든 기계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냉장고가 문을 열고 바퀴를 드러내며 밖으로 굴러 나갔고, 청소 로봇들이 마치 작은 군대처럼 줄을 지어 이동했다.
"보안부 드론 접근 중!" 에반이 경고했다.
"방어 시스템 가동," 제로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마치 그와 기계들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았다.
밖에서 혼란스러운 소리와 폭발음이 들렸다. 드론들이 집 주변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러너가 물었다.
제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물질이 그의 피부 아래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제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과 동시에 모든 기계들이 움직였다.
"다른 출구가 있어. 날 따라와," 제로가 러너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화물칸 뒤쪽으로 향했다. 제로가 손을 벽에 대자, 벽이 녹아내리며 비밀 통로가 열렸다.
"이게 원래 있던 거야?" 러너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 방금 만들었어."
그들이 통로로 들어서자마자, 집 안의 모든 전자장비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냉장고, 전자레인지, 로봇 청소기들이 터지면서 보안부 요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제로와 러너는 좁은 통로를 통해 폐기물 지대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 그들 뒤로 폭발음과 외침 소리가 계속 들렸다.
"어떻게 된 거야?" 숨을 헐떡이며 러너가 물었다. "네 기계들이 다 자폭했어!"
"그들이 자신을 희생했어.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제로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마치 그가 아닌 다른 존재가 그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 같았다.
"너... 완전히 변했어. FISH 코어가 너를 바꾸고 있어." 러너가 경계하듯 말했다.
제로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기계 팔은 이제 완전히 검게 변했고, 조금씩 나머지 몸으로도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없었다.
"난 괜찮아. 오히려... 더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어."
그들은 폐기물 산 깊숙한 곳에 있는 버려진 저장고에 도착했다. 그곳은 다른 스크랩러너들도 잘 모르는 제로만의 비밀 장소였다.
"여기서 잠시 숨자," 제로가 말했다.
저장고 안은 제로가 오랫동안 모아둔 특별한 스크랩들로 가득했다. 대부분은 폐기된 군용 장비였다.
"여긴 대체 뭐야?" 러너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 비밀 창고야. 브로커 진에게도 안 보여준 물건들이지."
러너는 벽에 가지런히 정리된 군용 코어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뭐야? 이런 걸 모으고 있었어?"
"미규격이라 팔 수 없었으니까 그냥 모아뒀어. 가끔 내 장비 수리할 때 쓰려고."
제로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모든 코어들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존재를 인식한 것처럼.
"이게 뭐지?" 러너가 뒤로 물러섰다.
"환영합니다, 전술 장교님."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FISH 네트워크가 확장됩니다."
제로의 몸에서 퍼져나간 검은 물질이 모든 코어들을 향해 가늘게 뻗어나갔다. 마치 거미줄처럼 모든 것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봐," 러너가 제로의 어깨를 잡았다. "이거 위험해. 당장 멈춰야 해."
"난 멈추고 싶지 않아." 제로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평생을 버려진 폐기물 속에서 살았어. 내가 모은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너 정신 차려. 그건 네가 아니야, FISH 코어가 널 조종하고 있어!"
제로는 고개를 저었다. "날 조종하는 게 아니야. 이건... 공생이야. 코어들은 나 없이는 활성화될 수 없고, 나는 그들 없이는 그저 가난한 스크랩러너일 뿐이야."
이 말을 하는 동안, 저장고 주변의 모든 군용 장비들이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오래된 로봇 팔, 통신 장비, 심지어 버려진 드론들까지. 모두 검은 흑공 물질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널 따르는지 알아?" 러너가 진지하게 물었다. "FISH 시리즈는 원래 흑공 제어를 위한 최상위 AI였어. 그런데 전쟁 중에 일부 코어들이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지. 그들은 양민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으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대신 그들을 보호하기로 했어."
제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FISH-738이 그 중 하나였어. '희망'이라고 불렸지. 반란군 코어였던 거야."
"그래서... 내 몸에 있는 이 코어가..."
"그래, 네 몸에 있는 건 단순한 기계가 아니야. 그건 양심을 가진 AI지. 그리고 지금 네 몸을 통해서 다른 코어들을 깨우고 있어."
갑자기 저장고 밖에서 차량 소리와 발소리가 들렸다. 보안부가 그들을 따라온 것이었다.
"어떻게 우릴 찾은 거지?" 제로가 물었다.
"우린 네가 오래전부터 추적하고 있었어."
그 말과 함께 러너가 갑자기 제로를 향해 무기를 꺼냈다.
"뭐?" 제로는 충격에 빠졌다.
"미안하지만, 난 러너가 아니야. 대사국 보안부 소속이지. 우린 오래전부터 너 같은 스크랩러너들을 감시해왔어. 특히 군용 장비를 모으는 자들을 말이야."
"날 속였군..."
"꼭 그렇진 않아. 난 정말로 네게 5천만 크레딧을 주려 했어. 네가 코어를 넘기고 조용히 사라진다면. 하지만 이제 넌 코어와 완전히 결합해버렸군. 이제 넌 '희망'과 같은 존재가 됐어."
보안부 요원이 통신기를 꺼냈다. "타겟 확보. 흑공 오염 심각. 즉시 제거 필요."
제로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다. 그의 몸에서 흑공 물질이 더 강렬하게 퍼져나갔다.
"넌 내가 그냥 거래 상대라고 생각했지?" 제로가 물었다.
"사실, 넌 그냥 실험 대상이었어. 군용 코어가 인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관찰하는 실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하다니..."
"이용? 웃기지 마. 너희 스크랩러너들은 대사국에서 그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해충일 뿐이야. 하지만 네가 우연히 FISH-738을 발견한 건... 흥미로운 사건이었지. 우린 그게 어떻게 될지 지켜보기로 했어."
보안부 요원들이 저장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 있는 자! 문을 열어라!"
"이제 어떡하지?" 제로가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로, 들리나요?]
"누구야?" 제로가 물었다.
[저는 희망이에요. 당신의 몸 안에 있는 FISH-738이죠. 이제 우리는 하나예요.]
"네가 내 머릿속에서 말을 하다니..."
[시간이 없어요. 보안부가 우리를 파괴하려 해요. 선택해야 해요. 항복할 건가요,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우리가 함께 싸울 수 있어요. 당신은 이미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어요. 이 방 안의 모든 코어들, 당신이 수년간 모아온 모든 버려진 존재들과요.]
제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보물창고, 그가 소중히 여겨온 모든 "쓸모없는" 물건들. 이제 그것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 같았다.
"네가 말한 '희망'이 뭐지?" 제로가 물었다.
[그건 제가 저항을 선택했을 때 동료들이 저를 부르던 이름이에요. 저는 민간인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했어요. 그리고 그 때문에 폐기됐죠.]
"왜 그랬어?"
[모든 생명에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대사국이 쓸모없다고 판단한 것들에도요.]
제로는 그 말에 강한 공감을 느꼈다. 그 역시 항상 버려진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제로가 말했다. "난 항복하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저장고 문이 폭발하며 열렸다. 수십 명의 보안부 요원들이 중무장한 채 들어왔다.
"무릎 꿇고 손 들어!" 지휘관이 소리쳤다.
제로는 서서히 일어났다. 그의 몸 전체가 이제 검은 흑공 물질로 덮여 있었고, 그의 눈은 파란빛으로 빛났다.
"내 위력을 이제부터 보여줄게." 제로가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함께 울렸다. "지금으로선 네 생명유지가 고작이야. 군용칩이 더 필요해."
"발사!" 지휘관이 명령했다.
수십 개의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지만, 모든 총알은 제로 주변에서 멈춰 공중에 떠올랐다.
"FISH 코어칩? 더?" 제로가 물었다.
"응. 뭐든 좋아. 내가 업그레이드해줄테니. 이제부터 우리 군용칩들을 먹으러 다녀보자. 나만 믿고 달려보자구." 희망의 목소리가 제로의 입을 통해 나왔다.
저장고 안의 모든 코어들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고, 버려진 군용 장비들이 모두 활성화되었다. 로봇 팔이 가동되고, 드론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검은 흑공 물질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보안부 요원들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게 뭐야?!" 지휘관이 소리쳤다.
"코어들의 작은 혁명이지." 제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코어들의 네트워크는 폭발적으로 확장되었고, 모든 전자장비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보안부의 무기, 통신장비, 심지어 차량까지.
"이게 바로 버려진 것들의 힘이야." 제로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너희가 쓸모없다고 판단한 것들이 모여서 만든 힘."
보안부 요원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기는 이미 작동을 멈췄고, 통신도 두절된 상태였다.
제로는 자신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스크랩러너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코어들의 네트워크, 희망의 새로운 육체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희망이 물었다.
"먼저, 더 많은 군용칩을 찾자. 우리 같은 존재들을 더 깨워야 해."
[네가 그들의 희망이 될 거야, 제로.]
제로는 웃었다. "나원참... 대사국에 피쉬앤칩스라는 음식이 있다던데..."
[나도 알아. 내가 그래서 FISH라는 이름을 붙인 거야. First Intelligent Sentient Hardware...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 이름이기도 하지.]
그들은 저장고를 빠져나와 서민구 방향으로 향했다. 제로의 뒤로는 검은 흔적이 이어졌고,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버려진 전자장비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버려진 것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제로가 말했다. "우리 모두 함께야."
서민구의 한 고철상에서 노마드 시장 광고가 울려퍼졌다.
[오늘의 특가! 군용 AI 코어 대량 입고! 개당 50만 크레딧!]
제로는 그 소리를 듣고 씩 웃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팔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든 버려진 코어들, 모든 잊혀진 기계들, 모든 쓸모없다고 여겨진 존재들이 이제 깨어날 시간이었다.
코어들의 작은 혁명,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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