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WK단편선 70> 흑공의 숲에서

by 김동은WhtDrgon

연구소의 회색 벽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라울 에셰르는 팔짱을 끼고 자신의 상관인 이소라 박사가 브리핑을 마치길 기다렸다.


"에셰르, 이번 임무는 간단해. 금지구역 7-B이라고 있어. 일명 '흑공 숲'의 샘플을 수집하고 돌아오면 돼."

"왜 하필 저입니까?" 라울은 눈살을 찌푸렸다. 왼쪽 눈의 바이오닉 렌즈가 미세하게 윙윙거렸다.

"왜냐고? 네가 흑공 탐사 경험이 가장 많으니까. 그리고..." 이소라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곳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라울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그게 왜 접니까? 그럼 왜 철거 안 하고 놔둡니까? 위험한 줄 알면서."

이소라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희귀하니까 그러지.”

“뭐가요? 흑공분출은 날이면 날마다 터지는데.”

“흑공이 분출된 후엔 어떻게든 처리되잖아? 근데 여긴 달라. 여긴 흑공 분출이 안정화되버린 곳이야. 흑공과 숲이 그냥 공존해버렸다구. 이거 흥미가 동하지 않아? 흑공을 품은 숲이라구. 너 자연주의자라매.”

그녀는 자료 화면을 넘겼다.


라울은 무심코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화면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들과 검은 안개가 뒤덮인 숲의 이미지가 있었다.

"드론은 왜 안 보내요?"

"드론은 전부 비정상 작동으로 추락했어. 밀리터리 등급 AI도 말이야. 게다가..." 이소라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드론은 기억과 교감할 수 없으니까."

라울은 이소라의 말에 의아해하며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왼쪽 눈이 이미지를 스캔하며 미세하게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수당은 2배로 요청합니다."

"승인 완료됐어."


이소라가 너무 빨리 수락하자 라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보통 같으면 흥정이라도 했을 텐데.

다음 날 아침, 라울은 탐사 장비를 챙겨 흑공 숲으로 향했다. 숲은 오래전 대전쟁 당시 실험용 무기가 떨어진 지역이었다. 그 이후로 이곳은 기이한 생태계로 변모했고, '흑공'이라 불리는 검은 에너지가 자연과 융합된 공간이 되었다.


경계선에 도착하자 라울은 신경 인터페이스를 활성화했다. 주변 데이터가 그의 뇌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산소 농도, 온도, 방사선 수치...

"정상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주의 요망."

인공 음성이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라울은 경계선을 넘었다. 한 발자국마다 풀잎이 검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죽어가는 게 아니라, 마치 다른 형태로 변환되는 듯했다.

처음 한 시간은 평범했다. 샘플을 채취하고, 좌표를 기록하고, 가끔씩 묘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한 두통이었다. 이어서 귓가에 속삭임 같은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데려가지 마...'

라울은 멈춰 섰다. 그의 바이오닉 렌즈가 주변을 스캔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환각인가."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숲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나무들은 마치 손을 뻗는 것처럼 기이하게 꼬여 있었다. 가끔 검은 것이 나무 사이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흑공이었다.

"빙고. 샘플 채취 완료."

그는 작은 유리병에 검은 액체를 담았다. 연구소에 돌아가면 보너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울림이 생겨났다.

"신경 간섭 현상 발생. 시스템 불안정."

라울은 갑자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따라갔다.

소리는 그를 작은 공터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한 걸음을 더 내딛자, 갑자기 주변이 변했다. 그는 전쟁터에 서 있었다. 불타는 건물들, 폭발음, 비명...


"감각 오류입니다. 뇌파 이상 감지."

인공 음성이 경고했지만, 라울은 너무 당황해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의 앞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마치 그 자신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검은 웅덩이처럼 깊었고, 그 안에서 라울은 자신의 잊힌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숲에서 뭐하는 거야?"

아이가 물었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환각이 사라졌다. 라울은 다시 공터에 홀로 서 있었다.

"대체 뭐지..."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이 불안해졌다. 연구소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더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숲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라울의 신경 인터페이스는 더 많은 오류를 보고했다. 하지만 그는 무시했다. 그의 바이오닉 렌즈는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대신 그는 자신의 감각에 의존했다.

검은 나무들 사이로, 그는 마침내 숲의 중심에 도착했다. 거대한 검은 웅덩이가 있었고, 그 위로 검은 안개가 맴돌고 있었다.


라울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웅덩이를 들여다보자, 그는 자신의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들을 보았다. 수백, 수천 개의 얼굴이 웅덩이 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이게 대체 뭐지..."

"우리의 기억이야."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렸다. 라울은 돌아섰다. 아까 본 그 아이가 서 있었다.

"너... 누구지?"

"나는 숲이야. 그리고 이곳에 남겨진 모든 것이기도 해."

아이는 웅덩이를 가리켰다.

"저것들은 이곳에서 죽은 이들의 기억이야. 그리고 너의 기억도 있지."

"내 기억?"

"그래.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갑자기 웅덩이가 요동쳤고, 라울은 자신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있는 모습,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모습.

"거짓말이야."


라울은 웅덩이 속에서 떠오르는 자신의 기억을 보며 처음으로 잊고 싶었던 과거와 마주하는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 공포 속에서 이상한 평화가 함께 스며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무시해온 자신의 일부를 드디어 인정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아. 우리는 그저 기억할 뿐이야."

아이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발자국마다 검은 물결이 퍼져나갔다.

"네가 샘플을 가져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

라울은 침을 삼켰다. "연구소가 이곳을 연구하겠지."

"그리고 파괴할 거야. 그들은 항상 그래왔어."

아이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곳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우리가 인간의 기억과 의지를 반영한다는 것을. 그래서 네가 온 거야. 네가 우리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라울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통신기를 꺼냈다.


"이소라 박사, 듣고 계십니까? 여기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이소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발견인가, 에셰르?"

"이곳은... 단순한 생태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어요. 제 기억까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네가 필요했던 거야."

라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이미 흑공에 노출된 적이 있어. 네 바이오닉 렌즈를 통해 연결되어 있지. 우리는 네가 흑공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저를 이용한 겁니까?"

"과학을 위해서야, 에셰르. 인류의 기억 저장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 그 숲이 가진 기억 패턴을 복제할 수 있다면, 우린 죽음도 극복할 수 있어."

"그런 식으로 자연을 이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숲은 살아있어요. 아니, 그것은 우리의 기억 자체예요."

"감상에 빠지지 마, 에셰르. 샘플을 가져와. 그리고 돌아와."

통신이 끊겼다. 라울은 자신의 손에 들린 샘플 키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이를 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선택의 순간에 서 있었다. 언제나 현실적인 판단과 냉소로 살아왔는데, 이제 그는 자신의 존재와 기억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연구소에 돌아가 샘플을 넘긴다면 이 모든 기억의 저장소가 파괴될 것이다. 하지만 거부한다면, 그는 자신이 알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선택해야 해." 아이가 말했다. "네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인지."

라울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왼쪽 눈이 깜빡였다.


연구소 로비, 이소라 박사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고, 라울이 들어왔다. 그의 옷은 찢어지고 더러웠지만, 손에는 샘플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에셰르! 다행이야. 샘플을 가져왔군."

라울은 말없이 샘플 케이스를 건넸다. 이소라는 기쁨에 찬 표정으로 케이스를 열었다.

그러나 케이스 안에는 검은 흙 대신, 작은 메모지 하나만 있었다.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숲은 우리의 선택을 기억한다.'


이소라가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라울의 왼쪽 눈은 검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에셰르?"

라울은 케이스를 건네며 자신의 왼쪽 눈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안개가 연구소를 스며들 것임을 알았다. 그는 숲의 기억을 대신해 복수를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 복수가 아니라 융합이었다.

"선택했습니다. 숲을 선택했어요."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소라는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넌... 넌 이미 감염됐어!"

"감염이 아닙니다. 교감이죠. 숲은 파괴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잊고 싶었던 기억의 저장소죠."


라울은 천천히 연구소 출구로 걸어갔다. 그의 뒤로 검은 흔적이 남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상한 평화가 자리 잡았다. 처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알게 된 듯한 확신이 있었다.

"에셰르! 돌아와! 넌 치료가 필요해! 고칠 수 있을거야!"

하지만 라울은 이미 연구소를 나서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천 개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억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중심에는 검은 눈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항상 기억한다. 우리의 선택을."

연구소의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소라는 서둘러 비상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모든 직원, 대피하세요! 흑공 오염이 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연구소의 화단에 심어진 식물들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고, 유리창에는 검은 덩굴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마치 누군가 쓴 것 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과학적 접근 결과: 감정 데이터 샘플 수집 완료. 인간형 용기에서 확장 중."

이소라는 공포에 질려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이소라의 태블릿에서 알림이 울렸다. 그녀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흑공 숲 확장 감지. 예상치 못한 성장률. 도시 경계선까지 3일 소요 예상.]


잠시 후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생태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해당 구역의 존재가 허용되지 않음. 정화 작업 준비 중.]

이소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라울은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뒤로 남은 검은 흔적이 도시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검은 길을 따라 어린 아이의 형상이 걷고 있었다.

"우린 뭘 풀어버린 거지..."

그녀의 태블릿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익명의 메시지였다.


[우리는 항상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포용한다.]


밖에서는 검은 안개가 천천히 도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수천 개의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기억의 얼굴들이었다.






© 2025 WhtDrgon. All rights reserved.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FEWK단편선 69> 자유의 이중나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