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년간 디지털 비즈니스의 세계를 지배해 온 단 하나의 신조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성장’이었다. 더 정확히는 ‘가입자 수의 성장’이다. 투자자들은 월간 활성 이용자(MAU) 그래프의 가파른 우상향 곡선에 열광했고, 스타트업들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으며 사용자를 끌어모으는 데 사활을 걸었다. 이것이 바로 ‘플랫폼 시대’의 황금률이었다.
이 시대의 비즈니스 모델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플랫폼 사업의 특징은 뭐냐면 무료예요. 사람 수만 늘리면은 투자가 들어오니까. 그게 BM이었고 그래서 100만 명, 천만 명 이렇게 사람만 늘리는 거예요.”
마켓컬리, 오늘의 집, 수많은 소셜 커머스 업체들이 이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일단 사용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면, ‘승자 독식’의 법칙에 따라 시장을 장악하고, 그 후에 수익 모델을 고민해도 늦지 않는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투자자들이 그 모양이 돼야지 회사가 괜찮구나라고 평가하는 기준이 만들어지면 그 평가하는 기준에 맞춰서 회사의 매출 규모도 맞춰져 벼려지는 구조였다.”
이 시기 회사의 재무제표에서 홍보비가 매출의 40~50%를 차지하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위한 건전한 투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이 시대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 그 종말을 알리는 신호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첫째, 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카카오페이지도, 네이버 웹툰도, 더 이상 신규 가입자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데 한계를 맞았다. 국내 시장의 파이는 정해져 있고, 이제 성장은 제로섬 게임이 되었다. 둘째, 투자 시장이 냉각되었다.
해외에서는 투자 유치 규모가 1,000억 원대에 도달하자 다음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국내에서도 투자자들은 더 이상 ‘가입자 수’라는 꿈의 지표 대신 ‘수익성’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쿠팡이 배송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고, 위메프와 티몬 같은 경쟁자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무한 성장의 시대가 끝났음이 명확해졌다.
이제 디지털 비즈니스의 성공을 측정하는 저울의 눈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시장의 관심은 “이번 분기에 몇 명의 신규 가입자를 유치했는가?”에서 “사상 최초로 월간 흑자 전환에 성공했는가?”로 옮겨갔다. 유니티가 다운로드 수 기반의 과금 정책을 섣불리 발표했다가 전 세계 개발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CEO가 사임하는 사태는, ‘무료’를 기반으로 한 성장 모델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과금이에요. 유저의 80% 잃어도 좋으니까 우리는 과금. 과금이 된다. 그래서 흑자로 돌아섰어요.” 이제 시장은 더 이상 ‘얼마나 많은가’를 묻지 않는다. ‘얼마나 버는가’를 묻는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 팬덤 비즈니스는 새로운 시대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확장을 포기하는 대신, 강력한 소수의 충성 고객으로부터 지속 가능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필자가 직접 운영하는 아이돌 팬덤 서비스 ‘베니월드’의 핵심 성과 지표(KPI)는 가입자 수가 아니라 ‘결제율’이다. 배니월드의 데이터는 이 새로운 모델의 가능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서비스 론칭 90일이 지난 시점에서, 전체 방문자 중 매일 방문하는 유저로 전환되는 비율(리텐션)은 36%에 달했다. 이는 일반적인 서비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높은 충성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일일 방문자(DAU) 중에서 실제로 결제를 하는 유저의 비율이 서비스 초반 27%에서 시작하여 현재 33%까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인 모바일 게임의 평균 결제율이 약 2.2%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15배에 달하는 경이로운 수치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베니월드는 모든 K팝 팬을 고객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배너(VANNER)’라는 특정 아이돌 그룹의 팬덤이라는, 작지만 매우 밀도 높은 커뮤니티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단순한 콘텐츠가 아닌, 자신들의 사랑과 헌신을 표현하고 증명할 수 있는 독점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플랫폼 시대의 종말은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허상의 숫자에 목맬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를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느냐다.
당신의 세계관이 단단하고 매력적일수록, 그 세계에 기꺼이 돈과 시간을 ‘투자’할 충성스러운 소수의 주민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당신의 세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든든한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강력한 소수로부터 지속 가능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커뮤니티 안에서 자신의 열정과 기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동기 부여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이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바로 ‘계급 시스템(Hierarchy System)’, 즉 구성원들에게 명예와 지위를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사다리다.
잘 설계된 계급 시스템은 사용자에게 명확한 성장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 ‘명예’와 ‘지위’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강력한 내적 보상을 제공한다. 이는 단순히 사용자의 활동을 유도하는 것을 넘어, 커뮤니티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극대화하는 핵심적인 장치다. 논의된 다양한 사례와 우리 일상 속의 익숙한 서비스들을 통해,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계급 설계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유형 1: 현실의 권위를 이식하는 ‘인증’ 모델
가장 직관적인 방식은 디지털 세계 외부, 즉 현실 세계의 권위와 신분을 디지털 프로필에 그대로 옮겨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사용자의 온라인 활동과 무관하게, 그의 ‘현실 스펙’이 곧 디지털 세계의 계급이 되는 모델이다.
링크드인(LinkedIn)과 과거 트위터의 ‘블루 라벨(Blue Label)’이 이 모델의 정수를 보여준다. 링크드인 프로필에 ‘삼성전자 마케팅 팀장’이라고 기재하는 순간, 그 사람은 디지털 세계에서도 그에 걸맞은 전문성과 신뢰도를 즉시 인정받는다. 트위터의 블루 라벨 역시 해당 계정이 유명인, 정치인, 언론인 등 사회적으로 공인된 인물의 ‘진짜 계정’임을 보증해 줌으로써, 다른 일반 계정과는 차별화되는 권위를 부여했다.
이것은 현실의 인물이 디지털 세계에 강림하는 ‘화신(Incarnation)’의 개념에 가깝다. 2계층(직능)과 3계층(배역)의 세계관이 결합된 형태로, 사용자의 현실 속 ‘배역’이 디지털 페르소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이 방식은 비단 전문가 네트워크나 소셜 미디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금융 앱이나 쇼핑몰의 초기 VIP 등급 산정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정 은행의 프라이빗 뱅킹(PB)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앱 내에서의 활동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의 자산 규모가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연간 수억 원을 예치한 고객은 앱에 가입하는 순간부터 최고 등급의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이는 현실의 부(富)가 디지털 세계의 계급으로 직접 치환되는 가장 명백한 사례다.
이 모델의 가장 큰 장점은 초기 가치 부여가 쉽고, 높은 구매력을 가진 ‘큰손’ 고객이나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전문가들을 플랫폼으로 빠르게 유입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단점 또한 명확하다. 계급이 너무 고정적(Static)이라 커뮤니티 활동을 통한 역동적인 성장의 재미를 제공하기 어렵다. 현실의 권력 구조가 디지털 세계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에, 평범한 신규 사용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유리 천장’을 느끼고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링크드인이 활발한 소통보다 정적인 이력서 교환의 장이 되기 쉬운 이유도, 이러한 고정된 계급 구조가 역동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유형 2: 문화적 공감대를 활용하는 ‘내부’ 모델
두 번째 방식은 현실의 권위와는 완전히 단절된, 오직 커뮤니티 내부의 문화와 가치관에 기반하여 독자적인 계급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 모델의 성공 여부는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인접 세계관’, 즉 문화적 공감대를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시스템에 녹여내느냐에 달려 있다.
과거 한국의 유명 유머 사이트였던 ‘웃긴대학’의 ‘총장 선거’ 시스템이나,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의 ‘군대 계급’ 시스템은 이 모델의 정수를 보여준다. ‘웃긴대학’에서 ‘총장’은 현실의 학위나 지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직 커뮤니티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서만 선출되며, 가장 ‘웃긴’ 콘텐츠를 만들고 회원들과 가장 잘 소통하는 사람이 최고의 명예를 얻는다. 이는 ‘유머’라는 커뮤니티의 핵심 가치가 계급을 결정하는 독자적인 세계관이다.
마찬가지로, 이토랜드와 같은 일부 커뮤니티의 군대 계급 시스템은 주요 사용자층인 한국 남성들의 군 복무 경험이라는 강력한 공통분모를 건드린다.
“남초 사이트한테는 군대가 최고여. 잘 이해해. 직관적이죠.”
이등병에서 시작하여 활동 포인트(게시글 작성, 댓글 등)를 쌓아 일병, 상병, 병장으로 진급하고, 마침내 장교나 장군 계급에 도달하는 과정은 사용자에게 강력한 성취감과 소속감을 부여한다. 이 계급은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커뮤니티 내부의 세계관 안에서는 그 사람의 헌신과 영향력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훈장이 된다.
이 모델의 강점은 외부 요인과 상관없이 커뮤니티의 결속력을 극도로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출발선에서 시작하여, 오직 커뮤니티에 대한 기여도만으로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높은 참여도와 몰입감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단점은, 그 문화적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에게는 매우 배타적이고 유치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세계관 역시 타겟 사용자들이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열광할 만한 그들만의 문화 코드를 찾아내어 계급 시스템에 녹여내야 한다. 그것은 마법사 길드의 등급일 수도, 아이돌 팬덤 내의 ‘서포터즈’ 직책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유형 3: 생태계 기여를 유도하는 ‘게임화’ 모델
가장 진화되고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은, 단순한 활동 포인트를 넘어, 커뮤니티 생태계 전체에 기여하는 복합적인 행동을 보상하는 정교한 게임화(Gamification) 모델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 모델은 앞선 두 모델의 장점을 결합하여, 모든 사용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기여할 수 있는 다층적인 경로를 제공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의 고객 등급 시스템이 바로 이 모델의 대표적인 예시다. 이 시스템들은 단순히 ‘돈을 많이 쓰는’ 행위(구매 금액)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구매 빈도: 얼마나 자주 방문하여 구매하는가? (충성도)
상품 리뷰 작성: 다른 고객의 구매 결정에 도움을 주는가? (정보 기여)
친구 추천: 새로운 고객을 유입시키는가? (생태계 확장 기여)
이벤트 참여: 플랫폼이 주최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 (활성화 기여)
이처럼 다양한 기여 활동에 각기 다른 점수를 부여하고, 그 총점에 따라 ‘브론즈’, ‘실버’, ‘골드’, ‘VIP’와 같은 등급을 부여한다. 그리고 각 등급별로 할인 쿠폰, 무료 배송, 전용 라운지 이용 같은 차별화된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사용자들에게 끊임없이 다음 등급으로 올라가고 싶은 동기를 부여한다.
가상의 K팝 팬덤 플랫폼에 적용되기 위해 구상한의 ‘라인(Line) 시스템’은 이 게임화 모델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 시스템에서 사용자는 역할에 따라 여러 ‘라인’으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 실제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연결되어 수익 창출이 가능한 전문가 그룹은 ‘블루 라인’, 뛰어난 2차 창작물을 만드는 아티스트 그룹은 ‘화이트 라인’, 깊이 있는 분석 글을 쓰는 비평가 그룹은 ‘골드 라인’으로 나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계급 상승의 조건이다. 블루 라인 멤버가 더 높은 등급인 ‘라이트 블루’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성을 과시하는 것을 넘어, 두 명 이상의 재능 있는 화이트 라인(아티스트)을 발굴하고 추천하여 플랫폼 생태계에 기여해야만 한다. 즉, 개인의 성장이 곧 커뮤니티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된 것이다. 또한, 계약을 체결하거나 다른 전문가로부터 ‘리스펙’을 받을 때마다 프로필에 ‘링(Ring)’이 추가되는 시각적 보상은 사용자의 명예욕을 강력하게 자극한다.
이처럼 잘 설계된 계급 시스템은 사용자들이 스스로 문턱을 넘어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계단’ 역할을 한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보이던 시스템도, 사용자가 자신의 노력으로 한 단계씩 계단을 오르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자 성취가 된다.
“프랑스 프로듀서가 포인트를 쌓더니 갑자기 계급장을 달았어. 그럼 그 순간 이제부터 계급장, 이 월드에 설계자가 설계한 가치가 작동하기 시작해요. 내가 잘 보여야 되는 사람이 계급장을 달고 있잖아. 그럼 나도 달아야 된다는 소리야.”
당신의 세계관은 주민들에게 어떤 성장 서사를 선물할 것인가? 그들이 오르고 싶어 할 매력적인 계급의 사다리를 설계하는 순간, 당신의 커뮤니티는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팬덤 비즈니스의 심층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팬덤과 가장 유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모델, 즉 ‘종교’와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둘 다 특정 대상을 향한 열정적인 믿음과 헌신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진짜(Real)’와 ‘가상(Virtual)’을 다루는 방식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팬덤 커뮤니티의 독특한 심리를 파악하고,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그들의 ‘역린(逆鱗)’을 건드리지 않기 위한 필수적인 통찰이다.
종교는 ‘가상을 진짜로 만드는’ 힘이다. 종교의 핵심 교리—전지전능한 신, 영원한 천국, 업보에 따른 윤회—는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가상의 개념이다. 하지만 신도들에게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현실보다 더 ‘진짜’인 궁극의 실재(Reality)다.
“가상이지만 진짜라고. 가상이라는 소리도 함부로 하면 안 돼. 하나님이 실제 하시니까.”
이 믿음은 절대적이고 신성하기에, 그것에 대한 모독은 현실 세계의 어떤 폭력보다 더 심각한 범죄로 간주된다. 이슬람교도 앞에서 코란을 찢는 행위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종이책을 훼손하는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가장 신성한 ‘실재’를 공격하고 부정하는 영적인 테러 행위이기 때문이다.
“교도 앞에 가 갖고는 경전을 찢으면서 선지자를 모욕했다. 그래서 맞았대."
그러면 적어도 이걸 듣는 사람들은 왜 맞았는지 아무도 궁금하지 않아. (…) 맞을 짓을 한 것 같아.
이처럼 종교의 세계에서 가상은 현실을 지배하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궁극적인 진리다.
반면, 팬덤은 ‘진짜를 가상으로 해석하는’ 힘이다. 팬덤의 숭배 대상인 아이돌 아티스트는 명백히 실존하는 ‘진짜’ 인간이다. 그는 우리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때로는 실수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팬덤 커뮤니티 안에서 그는 현실의 한 개인을 넘어, 팬들이 부여한 다양한 서사와 역할이 덧씌워진 ‘가상적 존재’, 즉 하나의 거대한 ‘캐릭터’로 소비된다.
이 독특한 메커니즘 때문에 팬덤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음주운전이나 대마초 흡연과 같은 명백한 사회적 물의, 즉 ‘범죄’를 일으켰다고 가정해보자. 일반 대중은 그를 법적, 도덕적 잣대로 비난하겠지만, 핵심 팬덤은 오히려 그를 옹호하는 독자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오빠가 예술적 고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나”, “살인적인 스케줄에 지쳐 매니저가 실수로 음주운전을 했을 수도 있다”
와 같은,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변론이 진지하게 유통된다. 이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현실의 법보다 팬덤 세계관의 법칙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이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현실 세계의 모범 시민이 아니라, 팬들에게 꿈과 위안을 주는 ‘가상적 캐릭터’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법을 어긴 ‘실수’는, 그 캐릭터의 서사(예: ‘고뇌하는 예술가’, ‘희생적인 아이돌’)의 일부로 해석하고 감싸줄 수 있는 문제다. 마치 자식을 둔 어머니가 “내 아들은 그럴 애가 아니에요”라고 맹목적으로 변호하는 것과 같다. 이 맹목적인 보호 본능이야말로 팬덤의 본질 중 하나다. 팬덤이 아이돌을 변호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나?
하지만 이 관용에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선이 있다. 바로 팬들과 맺은 ‘감정적 약속’을 깨뜨리는 행위다. 팬들에게 자신은 연애에 관심이 없으며 오직 팬들만을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뒤에서 비밀 연애를 하다 발각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현실 세계에서 20대 청춘 남녀의 연애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축복받아야 할 사생활이다. 하지만 팬덤 세계관 안에서 이것은 팬들과 맺은 ‘유사 연애’라는 가상적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배신 행위이자, 그들이 투자한 막대한 감정과 시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가장 끔찍한 ‘신성모독’이다.
“감정에 대한 배신은 절대 용납을 못해. 오히려 사람들과 그러니까 일반인들과는 평가의 가치가 달라.”
범죄는 ‘오빠가 힘들어서’라는 서사로 감싸줄 수 있지만, 감정적 배신은 팬덤이라는 세계관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이기에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팬덤 비즈니스를 다루는 창작자와 기획자는 이 미묘하고도 결정적인 경계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커뮤니티는 기본적으로 모두 비슷하다. 정당, 정치, 종교, 팬덤은 모두 가치,크레딧을 중심으로 구성된 집단이고 그 안의 가치가 따로 존재한다. 존재한다면 역으로 그것을 설계하고 만들 수도 있다.
팬덤을 현실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하려 하거나, 그들의 ‘비논리적인’ 열정을 계몽하려 해서는 안 된다. 대신, 그들이 어떤 ‘가상적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으로 규정되는지를 존중하고 그 규칙 안에서 함께 플레이해야 한다. 팬덤의 마음을 얻는 길은 그들의 ‘현실’을 바꾸려는 오만한 시도가 아니라, 그들이 믿고 사랑하는 ‘가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겸손한 봉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