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의 등장은 창작의 풍경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단 몇 개의 단어만으로 소설 한 편을 써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창작의 과정이, 이제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놀이터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 놀라운 기술의 이면에는, 마치 달콤한 사이렌의 노래처럼 창작자들을 유혹하는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AI가 당신의 고유한 ‘엣지(Edge)’, 즉 대체 불가능한 독창성을 무자비하게 지워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AI에게 “용과 마법이 나오는 판타지 세계관을 만들어줘”라고 단순한 명령을 내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AI는 자신이 학습한 수억 개의 데이터, 즉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모든 판타지 이야기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가장 ‘평균적’이고 ‘전형적인’ 요소들을 확률적으로 조합하여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고결한 엘프, 호전적인 오크, 고대의 예언, 사악한 흑마법사, 세계를 구원할 선택받은 영웅… 이 모든 것은 어디선가 본 듯한, 안전하지만 그만큼 지루한 통속적인 이야기의 재탕에 불과하다.
AI는 본질적으로 ‘통합 지식 체계’다. 특정 개인의 취향이나 철학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지식을 평균값으로 수렴시킨 거대한 데이터 덩어리다. 따라서 별다른 지침이 없다면 AI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즉 가장 ‘무난한’ 방향으로 회귀하려는 강력한 관성을 보인다.
“통속적이고도 포멀한 게 나와서 내가 매몰돼 버려요. 왜냐하면 그럴듯하게 쓰긴 쓰거든요.”
바로 이 ‘그럴듯함’이 함정이다. 당신이 만약 AI가 뱉어내는 유려하고 그럴듯한 문장에 감탄하며 방향키 없이 엔터키만 계속 누르고 있다면, 당신은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AI의 거대한 평범함 속에 당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익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AI라는 강력한 도구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활용하여 나만의 엣지를 더욱 날카롭게 벼릴 수 있을까? 해답은 창작의 주도권을 AI에게 넘겨주지 않는 데 있다. 우리는 AI에게 ‘무엇을 만들지’ 막연하게 묻는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구현할지’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한다. 이를 위한 첫 번째 원칙이 바로 ‘시놉시스 노트’를 먼저, 그리고 인간의 손으로 직접 작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운영하는 ‘매제의 실험적 서사’라는 프로젝트는, 다양한 시드 아이디어를 AI로 발전시키는 실험의 장이다.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목적은 “누군가가 브랜딩 세계관을 의뢰해 왔을 때에 대한 테스트”다. 즉, 클라이언트가 던져주는 단 하나의 키워드, 혹은 하나의 제품만으로도 독창적인 서사와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실피드의 시간 거울’이라는 이야기는 오디오가이라는 레이블의 ‘발레 작품 음악 피아노 편곡집’이라는 실제 음악 앨범에서 영감을 받았다. AI에게 단순히 “발레 음악으로 소설을 써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앨범의 각 트랙이 주는 감상과 이미지를 인간이 먼저 해석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의 거울’이라는 핵심 콘셉트를 도출한 뒤에야 AI에게 구체적인 장면 묘사를 맡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 ‘우체부 오토바이와 날로소 불꽃’은 ‘페치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절, 추운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이 또한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는 막연한 주제가 아니라, ‘페치카’라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사물이 주는 따뜻함과 생존의 이미지를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았기에 AI가 진부한 영웅담이 아닌, 생활감 넘치는 독창적인 서사를 생성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시도의 공통점은, AI에게 작업을 맡기기 전에 인간 창작자가 명확한 ‘의도’와 ‘방향성’을 담은 설계도를 먼저 그린다는 점이다.
AI를 유능하지만 아직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는, 경험 많은 작가 지망생이라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편집장으로서 그에게 글을 맡기려면,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주어야 한다. 바로 그 가이드라인이 ‘로그라인(Logline)’과 ‘시놉시스’, 그리고 ‘핵심 의도’다.
로그라인은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 의도를 한두 문장으로 압축한 것이다. 이것은 AI가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북극성이다. 예를 들어, ‘백꽃 스파클’이라는 가상의 전통주 브랜딩을 위해 다음과 같은 로그라인을 작성했다.
“전통주를 고집하는 여성 명인과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아들의 대립 속에서, 구례 지역의 특별한 술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정.”
이 한 문장을 통해 AI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술 이야기가 아니라 ‘전통과 혁신’,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 ‘가족 관계’라는 깊이 있는 주제를 담고 있음을 즉각적으로 파악한다. 명색이 창작자라면, 이 한 줄의 의도는 스스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시놉시스는 이 로그라인을 조금 더 구체화하여 인물, 배경, 사건, 사물 같은 핵심 요소들을 포함시킨 짧은 줄거리다. “구례의 ‘이화 문배주’ 명인 김옥분과 그녀의 아들 오빈”, “아들이 개발한 ‘백꽃 스파클’”처럼 고유명사를 박아주고, “공식 계승자가 될 수 없었던 딸과 가업을 잇지 않고 도망쳤던 아들 사이의 갈등”처럼 구체적인 관계와 갈등의 양상을 설명해주면 AI는 이제 당신의 세계관이 가진 고유한 질감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핵심 의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가족은 첫 번째 커뮤니티이기 때문에 이해도가 높다”는 의도를 전달하면, AI는 가족이라는 보편적 코드를 활용해 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또한 “구례와 지리산이라는 지역적 특색을 전통주와 연결하고 싶다”는 의도를 덧붙이면, AI는 단순히 인물 간의 갈등을 넘어,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의 풍경과 문화를 서사에 적극적으로 녹여낼 것이다.
이처럼 로그라인과 시놉시스, 그리고 핵심 의도를 통해 나의 ‘의도’와 ‘엣지’를 먼저 명확하게 규정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AI에게 유의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AI는 훌륭한 조수이지만, 결코 선장이 될 수는 없다. 항해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 창작자의 몫이다.
인간 창작자가 AI라는 강력한 도구의 선장으로서 항해를 이끌기 위해서는, AI가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정교하게 반응하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해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듯, AI와의 창조적 협업을 위해서는 AI의 모국어와도 같은 소통 체계를 익혀야 한다. 그 가장 효과적인 언어가 바로 ‘트롭스(Trope)’다.
‘트롭스’는 이야기 속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관객이나 독자에게 익숙해진 관습적인 설정, 장치, 장면, 캐릭터 유형 등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명명한 개념이다. 우리는 흔히 이를 ‘클리셰(Cliché)’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며, 종종 진부하고 피해야 할 창작의 적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는 ‘작품’의 관점이며, 수많은 이야기가 피어나야 할 ‘세계관’의 영역에서는 그 패러다임을 180도 전환해야 한다.
“작품은 의외의 것이 등장하고 클리셰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작품의 얘기예요. 세계관은 오히려 클릿의 범벅이에요. 그냥. 모든 것이. 왜? 이해를 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된 ‘작품’은 기존의 틀을 깨는 파격과 의외성으로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피어나야 할 ‘세계관’이라는 토양은, 역설적으로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하고 단단한 법칙 위에 세워져야 한다. 독자나 사용자가 낯선 신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란한 파격이 아니라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익숙한 발판이다. 바로 그 발판의 역할을 하는 것이 트롭스다.
마법 학교에는 당연히 기숙사 대항전이 있고, 우주 함선에는 워프 드라이브가 있으며, 탐정의 옆에는 관찰자 역할의 조수가 있다. 이러한 익숙함이 있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진정한 새로움과 독창성은 이 익숙한 트롭스들의 ‘조합’에서 탄생한다. ‘한국의 고등학교’라는 익숙한 배경에 ‘마법 학교’라는 트롭스를 더하고, 거기에 ‘남녀공학 정책으로 인해 전통적인 마법사(Mage) 진영과 무당(Shaman) 계열의 마녀(Witch) 진영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는 새로운 갈등 구조를 얹을 때, 비로소 전에 없던 신선하고 흥미로운 세계관이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 트롭스가 AI와의 소통에서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 AI는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모든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을 문자 그대로 ‘읽고’ 학습했다. 이는 AI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트롭스를 이미 이해하고 있으며, 각 트롭스가 어떤 뉘앙스, 분위기, 감정, 서사적 기능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AI하고 일하고 싶으시면은 트롭스에 대한 이해를 하셔야 돼요. 트롭스를 가지고 소통해야 돼요.”
AI에게 트롭스는 단순한 키워드가 아니라, 수많은 문화적, 서사적 맥락과 정보를 고도로 압축한 하나의 ‘패키지 파일’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AI에게 트롭스를 활용해 지시를 내리는 것은, 마치 숙련된 영화감독이 스태프에게 “이 장면은 ‘필름 누아르’ 풍으로 찍어줘”라고 한마디 하는 것과 같다. 이 한마디에 스태프들은 조명, 카메라 각도, 배우의 연기 톤까지 일사불란하게 이해하고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AI에게 트롭스를 제시하는 것은 창작의 효율과 정교함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가장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실제로 트롭스를 활용하여 AI와 대화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 등장인물이 적에게 붙잡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차피 죽일 거잖아, 이 나쁜 새끼야!”라고 외쳤다고 가정하자. 이 한 문장에 담긴 복합적인 뉘앙스를 인간은 직관적으로 느끼지만, AI에게 이 ‘느낌’을 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주인공이 절망에 빠져 적에게 분노하는 대사를 써줘”라고 요청하면, AI는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길을 잃고 평범한 대사를 내놓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 문장을 AI에게 제시하고 ‘이 안에 담긴 트롭스를 강한 빈도 순으로 10개 리스팅하고, 각각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줘’라고 요청하면, AI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분석을 내놓는다.
죽음의 예고 (Death Notification): 이 대사는 단순한 절규가 아니다. 상대의 살해 의도를 기정사실화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눈앞에 둔 자의 공포와 체념, 그리고 역설적인 담대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서사적 장치다.
악당에 대한 저주 (To Hell with This Infernal Job): 힘의 열세에 놓인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즉 언어적 저항을 통해 절대 악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처절한 의지를 표출한다.
감정적 폭발 (Emotional Outburst): 억눌려 있던 절망, 분노, 공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순간을 포착하여, 캐릭터의 내면 상태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관객에게 명확히 전달한다.
복수의 서막 (The Prelude to Revenge): 이 대사는 결코 끝이 아니다. 여기서 죽더라도 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으며, 나의 동료나 후세대가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는 암시를 담아 앞으로 펼쳐질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준다.
직설적 대립 (Direct Confrontation): 더 이상 에둘러 말하거나 협상할 여지 없이, 두 존재가 원초적인 적대감만으로 정면충돌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연출한다.
욕설의 사용 (Use of Profanity): 캐릭터가 처한 상황의 절박함과 격앙된 심리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장면의 현실감과 강렬함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절망적 운명론 (Fatalism): ‘어차피’라는 한 단어 속에,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깊은 체념과 비극적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다.
영웅적 분노 (Heroic Rage): 부당한 폭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통해, 관객이 주인공의 편에 서서 감정적으로 응원하게 만드는 공감의 장치다.
극적 대사 (Dramatic Line):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연극이나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강렬하고 기억에 남는 대사 그 자체로서의 기능이다.
적대적 호칭 (Hostile Appellation): 상대를 ‘나쁜 새끼’라고 부름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한 적대 관계임을 명확히 규정한다.
AI는 이처럼 하나의 대사 속에 숨겨진 여러 겹의 문학적, 서사적 장치를 정확하게 읽어낸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 즉, 내가 원하는 트롭스들을 피자 토핑처럼 조합하여 AI에게 제시하고, 이 모든 뉘앙스를 담은 새로운 문장이나 장면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승자의 운명], [부활의 소망], [버려진 병원]이라는 트롭스를 조합하여 대사를 만들어달라고 하면, AI는 “이 저주받은 병원에서 너 같은 괴물을 끝장내고, 나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이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울 거야!”와 같은, 의도에 부합하는 결과물을 즉시 생성해낸다.
이 대사에는 버려진 병원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절망감, 괴물을 끝장내겠다는 복수심,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다는 계승자의 운명, 그리고 세계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부활의 소망이 모두 압축되어 있다.
이러한 트롭스들을 공부하고 싶다면, 웹사이트 ‘TV Tropes.org’는 그야말로 보물창고다. 이 사이트에는 세상의 모든 창작물에 등장하는 수만 가지 트롭스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각 트롭스가 어떤 작품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방대한 사례가 링크되어 있다. 심심할 때마다 이 사이트를 탐색하며 ‘도시의 하수도(City Sewers)’, ‘버려진 캠프장(Abandoned Camp)’ 같은 키워드가 어떤 클리셰(괴물들의 서식지, 십 대 살인마의 무대 등)와 연결되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창작 무기고는 비약적으로 풍성해질 것이다.
“아이디어가 안 떠오른다는 건 나한테 단어가 없다는 뜻”
트롭스에 대한 지식은 당신의 머릿속에 더 많은 창의적 단어와 개념을 심어주는 최고의 훈련법이다. 트롭스는 AI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리모컨이자, 창작의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만능열쇠다.
AI 모델을 훈련하는 데이터 과학의 세계에서, ‘과적합(Overfitting, 오버피팅)’은 반드시 피해야 할 치명적인 오류로 간주된다. 과적합이란, AI가 주어진 훈련 데이터에 너무 ‘과도하게 최적화’된 나머지, 데이터에 포함된 아주 사소하고 우연적인 패턴, 즉 ‘노이즈(noise)’까지 일반적인 법칙인 ‘신호(signal)’인 것처럼 학습해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고양이 사진’을 학습시키는데 우연히 모든 사진에 붉은색 목걸이가 있었다면, 과적합된 AI는 ‘붉은 목걸이가 없는 것은 고양이가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 즉 정확한 예측이 생명인 의료 진단이나 금융 모델링 같은 분야에서 이러한 과적합은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심각한 결함이다.
하지만 현실의 법칙을 따를 필요가 없는, 오히려 현실과 다른 새로운 법칙을 창조해야 하는 세계관 창작자에게 이 ‘오류’는 역설적으로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우리는 AI의 과적합 성향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역이용함으로써, 인간의 상상력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독창적인 논리와 개연성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하고 다른 거 만들고 있잖아. 완전 땡큐예요. (…) 과적합을 버리면 사실은 이건 문제가 되는데 세계관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땡큐인 경우가 많아. 왜냐하면 근거는 있거든.”
이 ‘근거’가 바로 우리가 던져주는 프롬프트이며, 이 근거 위에 세워진 ‘현실과 다른’ 논리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법칙이 된다.
이 기법을 활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AI에게 프롬프트를 줄 때, 의도적으로 구체적이고 독특하며 때로는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키워드를 집요하게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때 AI가 보이는 반응은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환각)’과는 다르다. 할루시네이션이 아무런 근거 없이 완전히 허구의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과적합은 주어진 정보(프롬프트)를 ‘과잉 해석’하여 그 안에서 어떻게든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아내려는 집요한 시도다.
“경전에 있는 단어들을 갖다가 신앙적 의미가 있다고 집요하게 해석하는 행위에 좀 더 가까워요.”
나는 이 ‘과잉 해석’의 메커니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로 ‘신성한 개(神犬)’의 탄생 일화를 이야기해준다.
위대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설교를 하는 도중,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집중을 방해했다. 스승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제자에게 “저 개를 밖에 묶어두어라”라고 지시했다.
이는 단순히 소음을 제거하기 위한 실용적인 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사소한 행위에 스승의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과잉 해석’하기 시작한다. ‘왜 하필 개였을까?’, ‘묶어두는 행위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질까?’ 수십 년이 지나, 그 종파에서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반드시 개 한 마리를 잡아다 사원 문 앞에 묶어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이 되었다. 그 개는 이제 불경한 짐승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필수적인 매개체, 즉 ‘신성한 개’라 불리며 숭배받게 되었다. 근거는 스승의 말 한마디뿐이지만, 그 위에 제자들의 과잉 해석이 쌓여 현실에서는 비약인 새로운 논리와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AI에게 프롬프트를 줄 때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판타지 세계관을 만들어줘”라고 막연하게 요청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구체적이고 독특한 프롬프트를 던졌다고 가정해보자.
“오스트리아의 높은 산, 측백나무 숲에서 길을 잃은 소년의 느낌으로, 고딕 양식의 성에서 벌어지는 뱀파이어 이야기를 써줘.”
AI는 이 쓸데없어 보이는 정보들에 ‘과적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AI의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연상 작용이 일어난다.
왜 하필 ‘오스트리아’인가? → 합스부르크 왕가, 고풍스러운 제국, 비극적인 황족의 역사, 클래식 음악, 특정 민담과 전설…
왜 ‘측백나무(Cypress)’인가? → 서양 문화권에서 죽음, 애도, 영생을 상징하는 나무.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음.
‘길을 잃은 소년의 느낌’이란? → 순수함, 연약함, 희생, 구원, 미끼…
AI는 이 키워드들을 단순한 배경 정보로 취급하지 않고, 어떻게든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엮어내기 위해 ‘과잉 해석’을 시작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예상치 못한 독창적인 설정이 탄생할 수 있다.
“이 세계의 뱀파이어들은 본래 …..
‘오스트리아’, ‘측백나무’, ‘길을 잃은 소년’이라는, 처음에는 아무런 관련 없어 보이던 우연적인 키워드들이 이제는 뱀파이어의 기원, 약점, 그리고 목표라는 세계관의 핵심 법칙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적합을 역이용하는 창의성의 마법이다.
그러니 AI에게 질문할 때, 너무 정제되고 논리적인 단어만 사용하려 애쓰지 마라. 오히려 당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가장 기이하고 직관적인 이미지와 단어들을 과감하게 던져보라. AI의 과적합이라는 ‘창의적 오류’가, 당신의 평범한 아이디어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비범한 세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
결국 AI 시대에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AI가 우리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그럴듯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오랜 시간 기술을 연마해 온 인간 창작자는 설 자리를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지금 수많은 창작자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근원적인 불안의 핵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역할이 바뀔 뿐이다. AI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생성 엔진’이지만, 결코 스스로 시동을 걸 수 있는 ‘의지’를 가질 수는 없다. AI는 ‘무엇을(What)’ 만들고 ‘어떻게(How)’ 만들지에 대해서는 인간을 능가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인 ‘왜(Why)’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영원히 답할 수 없다. 바로 이 ‘왜’에 해당하는 것, 즉 창작의 근원적인 동기와 방향성, 고유한 철학과 취향을 제시하는 것이 AI 시대 인간 창작자의 새로운 역할이자 대체 불가능한 가치다.
우리는 더 이상 모든 벽돌을 직접 손으로 빚고 하나하나 쌓아 올려 거대한 성을 짓는 고독한 건축가가 될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에게는 무한한 속도와 힘으로 벽돌을 생산하고 쌓아 올리는 수억 명의 자동화된 일꾼, 즉 AI가 생겼다. 따라서 우리의 역할은 노동자에서 ‘총감독’이자 ‘큐레이터’로 진화해야 한다.
총감독으로서의 역할은 이 장에서 내내 강조했던, 나의 고유한 ‘의도’와 ‘취향’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AI가 이해할 수 있는 ‘청사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은지, 나의 세계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내 욕구에 의존해서 써야 내가 자연스럽게 쓸 수 있고 (…) 그래야지 이게 오리지널이 되죠. 남이 따라 할 수 없는 게 되는 거죠.”
이처럼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당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진솔한 욕망이야말로 당신의 가장 큰 자산이다. AI는 ‘사랑’에 대한 수만 편의 시를 쓸 수 있지만, 당신이 특정 인물을 사랑하게 된 그 고유한 경험과 감정을 대신 써줄 수는 없다. 그 ‘왜 사랑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총감독의 역할이다.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은 AI가 쏟아내는 수많은 결과물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섬세한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AI는 당신의 지시에 따라 100개의 평범한 아이디어를 순식간에 생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당신의 세계관을 한 단계 도약시킬 단 하나의 비범한 아이디어, 즉 당신의 의도와 완벽하게 공명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창의성을 보여주는 그 ‘한 줄’을 알아보는 것은 오직 당신의 안목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고전을 읽고, 더 많은 작품을 비평적으로 분석하며, 무엇이 좋은 아이디어이고 무엇이 진부한 클리셰인지를 구분하는 자신만의 기준과 철학을 세워야 한다.
“아이디어가 안 떠오른다는 건 나한테 단어가 없다는 뜻이다.”
AI라는 외부의 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내면의 뇌를 더 풍부한 단어와 개념, 그리고 깊이 있는 미학적 기준으로 채워야만 한다. 유재석이 모든 연예인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미리 준비해 벽에 붙여 놓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수많은 ‘트롭스’와 ‘키워드’를 내면의 벽에 가득 채워두어야만, 어떤 상황에서도 AI를 자유자재로 지휘할 수 있는 순발력을 갖게 된다.
미래의 창작 과정은 인간과 AI의 긴밀한 협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풍경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의도 제시] 인간 감독이 ‘의도’를 담은 시놉시스 노트를 제시한다. (예: “전통을 중시하는 어머니와 혁신을 꿈꾸는 아들의 갈등을 ‘가족’이라는 코드로 풀어내고 싶다.”)
[1차 생성] AI 작가가 이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수십 개의 스토리 초안과 핵심 장면 아이디어를 생성한다.
[선별 및 심화] 인간 큐레이터는 그중 가장 잠재력 있는 초안을 선택하고, ‘과적합’ 기법을 활용하여 독창적인 설정을 더하도록 지시한다. (예: “이 가족이 만드는 술의 재료에 ‘지리산의 달빛 이끼’라는 요소를 추가해서 신비감을 더해줘.”)
[2차 생성 및 수정] AI가 수정된 설정을 반영하여 새로운 버전의 시나리오를 생성하면, 인간 감독은 ‘트롭스’를 활용하여 디테일한 묘사와 대사를 수정하도록 지시한다. (예: “어머니가 아들을 꾸짖는 장면에서 ‘사랑하기에 엄격한 스승(Tough Love)’ 트롭스를 강화해줘.”)
이처럼 인간의 ‘왜’와 AI의 ‘어떻게’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인간의 비전과 AI의 생성 능력이 결합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AI는 우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해방시키고 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생성의 노동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보다 본질적인 질문, 즉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AI라는 강력한 엔진에 당신의 독창적인 의지라는 운전대를 결합하라. 기술에 지배당하는 대신 기술을 지배할 때,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놀라운 창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