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걸 생각했다니, 너무 뻔하고 유치하잖아.”
“다른 위대한 작품들에 비하면 내 아이디어는 정말 보잘것없어.”
“사람들이 이걸 보면 비웃을 거야.”
이 목소리는 모든 창작자가 평생에 걸쳐 싸워야 하는 내면의 적이다. 특히 자신의 진솔한 생각과 감정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내려는 예비 창작자에게 이 감정의 파도는 거의 익사 직전의 공포로 다가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 감정은 정말 내 아이디어가 실패작이라는 신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부끄러움의 정체는 아이디어의 질적 수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이었던 내면의 세계가, 처음으로 객관적인 ‘텍스트’나 ‘이미지’의 형태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이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처음 들었을 때의 어색함, 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낯선 모습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과 같다.
이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비유가 바로 ‘오래된 연애편지’다. 사랑에 푹 빠져 있던 시절, 우리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절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썼다. “밤하늘의 별빛이 모두 너의 눈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아”와 같은 문장을 쓸 때, 우리는 진심이었고 그 감정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그 편지를 우연히 다시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치게 된다. “어떻게 내 손으로 이런 글을 썼지?”
무엇이 바뀐 것일까? 편지의 내용은 그대로다. 바뀐 것은 편지를 바라보는 ‘나’의 위치다. 과거의 나는 사랑이라는 세계관 안에 완전히 ‘다이브(Dive)’한 상태였지만, 현재의 나는 그 세계 밖으로 빠져나온 ‘관찰자’가 되었다. 이 거리감이야말로 부끄러움의 근원이다.
창작 과정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있을 때는 그것은 나의 일부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닌, 내가 바라보는 ‘타자(他者)’가 된다. 나는 나의 창작물에 대한 첫 번째 관객이 되며, 이 관객의 시선으로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마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따라서 당신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며 ‘유치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의 아이디어가 정말로 유치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충분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온전히 잠겨야 한다. 부끄러움은 바깥 세계 사람들의 것이다. 작가는 거기 서있으면 안된다.
이 부끄러움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야말로, 평범한 아이디어 소비자와 진정한 창작자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연애편지를 찢어버리는 대신, 그 안에 담겨 있던 순수한 열정의 에너지를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힘으로 삼아야 한다.
부끄러움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면, 이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과연 무엇이 좋은 아이디어이고, 무엇이 독창적인 세계관을 만드는가? 많은 예비 창작자들은 ‘위대하고’, ‘심오하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들은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거나,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거대 담론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남들에게 멋지게 보일 것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빌려온 아이디어에는 창작자 자신의 뜨거운 심장이 뛰지 않는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모조품일 뿐,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오리지널리티를 가질 수 없다.
진정한 독창성은 거대한 곳이 아닌, 가장 작고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창작자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욕망(Desire)’과 ‘취향(Taste)’, 심지어는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페티시(Fetish)’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지문과도 같은 것이다. 욕망은 모두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쉬운 최소의 공통점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유독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에게 깊은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해보자. 사회적으로는 죽음이라는 어두운 주제에 집착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당신의 창작이 시작될 ‘특이점(Singularity)’이다. 왜 나는 그런 캐릭터에게 끌리는가?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죽음을 가장 빛나게 만들려면 어떤 세계와 서사가 필요한가? 이 질문들을 파고드는 순간, 당신은 이미 남들과는 전혀 다른 당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혹은 당신이 유독 ‘총알이 두 발씩 나가는 쌍권총’에 비이성적인 희열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너무나 사소하고 유치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쌍권총’이라는 키워드가 당신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핵심 미학이 될 수 있다. 이 세계의 모든 영웅은 왜 쌍권총을 사용하는가? 쌍권총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한가? 한 자루의 검을 쓰는 기사와 쌍권총을 쓰는 총잡이의 전투 스타일은 어떻게 다를까? 이 사소한 취향이 세계의 전투 시스템, 문화, 심지어 철학까지 규정하는 독창적인 핵으로 발전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창작물들은 결국 창작자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욕망과 집착의 산물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오래된 B급 영화에 대한 그의 광적인 애정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고, 팀 버튼의 영화는 주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에 대한 그의 깊은 공감과 연민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당신의 내면을 검열하고 사회적으로 ‘올바른’ 주제를 찾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가장 기이하고 사소하며 때로는 변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욕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원천이며, 당신의 세계관을 진정으로 독창적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무기다.
자신의 진솔한 욕망을 마주하는 용기를 얻었다 해도, 마지막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두려움이 있다. “과연 사람들이 내 이런 취향을 좋아해 줄까?” 우리는 자신의 독특한 세계관이 너무 마이너해서, 대중에게 외면받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날카로운 개성을 무디게 갈아내고,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보편적이고 평범한 요소들을 섞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창작자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다.
단언컨대, ‘모두를 위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시도는 결국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아무런 특징 없는 밋밋한 결과물로 이어질 뿐이다. 매스미디어 시대가 저물고 모든 것이 파편화된 지금, 우리의 목표는 불특정 다수인 ‘대중’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나와 똑같은 욕망과 취향을 가진,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소수의 ‘내 이웃’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들을 기어히 찾아내어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한다. 그러려면 결국 내 몸을 드러내야 비슷한 이웃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이 만약 ‘비 오는 날의 축축한 골목길 냄새’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면, 세상에는 당신과 똑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재한다. 당신이 만약 ‘녹슨 기계와 낡은 가죽이 뒤섞인 스팀펑크 미학’에 열광한다면, 그 열광을 함께 나눌 동지는 분명히 있다. 창작은 새로운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같은 것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과 연결되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의 세계관은 타협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신의 취향을 더욱 극단적으로, 더욱 선명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당신의 세계는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관광지가 아니라, 당신과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아지트가 되어야 한다. 이 아지트의 문턱이 높고 취향이 확고할수록, 그 문을 통과한 소수의 ‘이웃’들은 훨씬 더 강렬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서브컬처와 팬덤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대중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와 ‘밈(Meme)’을 통해 서로를 확인하고 결속을 다진다. 바깥에서 보면 이상하고 괴팍해 보일지라도, 그들 내부에서는 그것이 가장 큰 자부심이자 즐거움이 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의 욕망이 아무리 기이하고 독특하게 느껴지더라도,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당신이 할 일은 당신의 목소리를 최대한 선명하게 내는 것뿐이다. 당신의 진솔한 목소리가 담긴 세계관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같은 주파수의 영혼들을 끌어당기는 등대 불빛이 될 것이다. 모두를 위한 밍밍한 음료수를 만드는 대신, 소수의 미식가들만이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진한 위스키 한 잔을 빚어내라. 그 한 잔의 가치를 알아보는 당신의 ‘이웃’들이야말로, 당신의 세계를 영원히 지지해 줄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이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세계관 창조의 거의 모든 과정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창조가 그렇듯, 진정한 완성은 창작자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물이 세상에 나와, 스스로의 생명력을 얻고, 창작자의 의도마저 뛰어넘어 성장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처음에 세계관은 전적으로 창작자의 것이다. 창작자는 그 세계의 유일한 신(神)이자 절대적인 입법자다. 모든 법칙과 역사, 캐릭터의 운명은 그의 손끝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묘하고도 경이로운 전환점이 찾아온다. 바로 팬들이, 즉 당신의 세계를 사랑하게 된 ‘이웃’들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관객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설정의 빈틈을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채우기 시작하고(팬 이론),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 스쳐 지나간 조연의 숨겨진 과거를 상상하여 써 내려가며(팬픽), 당신이 글로만 묘사했던 도시의 풍경을 황홀한 그림으로 그려낸다(팬아트).
이러한 2차 창작물들이 쌓이고, 팬 커뮤니티 안에서 서로 공유되고 인정받으며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할 때, 나는 이것을 ‘카논(Canon)’의 탄생이라고 부른다. ‘카논’은 본래 ‘정경(正經)’을 의미하는 종교적 용어지만, 현대 서브컬처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설정과 이야기의 총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중요한 점은, 이 카논이 더 이상 창작자 한 사람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 자신의 주인공 셜록 홈즈에 싫증이 나 그를 죽였을 때, 분노한 독자들은 검은 완장을 차고 항의하며 스스로 홈즈를 부활시키는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결국 도일은 팬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홈즈를 되살려낼 수밖에 없었다. 셜록 홈즈라는 세계관은 이미 창작자의 손을 떠나, 팬들이 함께 소유하고 가꾸어 나가는 공동의 자산, 즉 ‘카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세계관 창작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자 가장 아름다운 역설이다. 당신의 목표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완벽한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진정한 목표는, 당신이 없어도 스스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옥한 토양과 건강한 씨앗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 아니라, 그 세계가 무성하게 자라나도록 돕는 충실한 ‘정원사’가 된다.
팬들이 당신의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면, 축하한다. 당신의 세계는 더 이상 죽어있는 설정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침내 창작자의 품을 떠나 스스로 숨 쉬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세계’가 되었다.
이 책을 덮으며, 당신은 어쩌면 ‘세계관 창조’란 여전히 소수의 특별한 창작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거창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시 고개를 들어 당신의 삶을 둘러보라. 당신은 이미 수많은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알게 모르게 그것을 만들고 가꾸는 데 참여하고 있다.
‘가정’은 우리가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하는 가장 원초적인 세계관이다. 그곳에는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법칙이 있고, ‘가훈’이라는 상징이 있으며, ‘가족사진 앨범’이라는 역사가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명확한 역할(캐릭터)이 있으며, ‘우리 가족’이라는 강렬한 소속감을 공유하는 커뮤니티다.
‘직장’ 역시 하나의 정교한 세계관이다. 그곳에는 ‘회사의 비전’이라는 궁극적인 소명이 있고, 직급이라는 계급(정치 모델)이 있으며, 동료들만 알아듣는 은어와 ‘밈’(커뮤니티의 약속)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대리’, ‘팀장’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당신이 속한 ‘취미 커뮤니티’는 당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참여하여 만든 가장 순수한 형태의 세계관이다. 등산 동호회에는 함께 오르는 산이라는 성지(聖地)가 있고, 암묵적인 산행 규칙(법칙)이 있으며, 어려운 코스를 완주했을 때 주어지는 인정과 명예(팬덤 모델)가 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이 세계관들을 그저 주어진 환경으로 받아들이며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정의 불합리한 규칙에 불평하고, 회사의 경직된 문화에 순응하며, 커뮤니티의 관성에 그저 몸을 맡긴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다르다. 당신은 세계관이 어떻게 설계되고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당신은 수동적인 주민을 넘어, 당신이 속한 세계를 의도적으로 개선하고 가꾸어 나가는 ‘능동적인 세계관 제작자’가 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매월 마지막 주일은 스마트폰 없이 대화하는 날’이라는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떤가? 팀원들과 함께 우리 팀만의 소소한 성공을 축하하는 새로운 의식(상징)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떤가? 당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새로운 멤버들이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초보자 가이드(라이브러리)’를 만들어 공유하는 것은 어떤가?
세계관 창조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창의적인 도구다. 당신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인식하는 순간, 당신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자신만의 규칙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게임 마스터, 즉 당신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 긴 여정을 걸어왔다. 매스미디어의 거대한 광장이 무너진 폐허에서 시작하여, 팬덤이라는 새로운 부족의 탄생을 목격했다. 세계관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경험의 힘을 배웠고, 정치, 종교, 팬덤이라는 세 개의 기둥으로 그 뼈대를 세우는 법을 익혔다. 마침내 당신은 당신만의 아이디어 씨앗을 뿌리고, 그것을 체계적인 라이브러리로 가꾸어,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는 방법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제 당신의 앞에는 다시,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백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지금 당신 앞에 놓인 백지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의 그 막막하고 두려웠던 백지가 아니다. 당신의 머릿속은 수많은 아이디어의 씨앗으로 가득 차 있고, 당신의 손에는 그것을 키워낼 수 있는 구체적인 도구와 지도가 들려 있다. 이제 백지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 기회의 대지다.
창작의 길은 외롭고 더딜 수 있다. 때로는 부끄러움과 자기 의심의 그림자가 당신을 덮쳐올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당신의 욕망이 아무리 기이하고 사소하게 느껴지더라도,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과 같은 별을 바라보는 ‘이웃’이 반드시 존재한다. 당신이 할 일은 그들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당신의 목소리를 최대한 선명하고 진솔하게 내는 것뿐이다.
이 원고/ 혹은 책은 당신에게 모든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이 책은 단지 당신의 손에 나침반과 지도를 쥐여주고, 당신의 등 뒤에서 용기의 바람을 불어넣어 줄 뿐이다. 항해를 시작하고,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며, 그곳에 당신의 깃발을 꽂는 것은 오롯이 당신의 몫이다.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질 시간이다.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는 무엇인가?
그곳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기를 꿈꾸는가?
망설이지 마라. 당신의 세계는 이미 당신 안에서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